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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52화 (52/240)

052화 히든 공락법(9)

그런 에르시온의 질문에 현성은 그저 작게 웃을 뿐이었다.

물론 눈앞에 있는 그녀의 반응이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시점에서는 에르시온 그녀가 등장하는 것도, 이렇게 거래에서 진명이 밝혀지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진명을 알아내는 조건은 마계에 관련된 모든 퀘스트를 하나도 빠짐없이 클리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계에 관련한 스토리가 언급되는 타이밍은 지금보다 한참 뒤.

채 1막의 스토리도 끝나지 않은 지금.

페르온의 진명을 알고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말이지.’

하지만 이는 현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가 <이스페리아>의 모든 엔딩을 해금하기 위해 게임을 몇 번이나 클리어 했는가.

그 과정에서 알아낸 사실이 몇 백가지인가.

그만큼 지금껏 현성의 행보는 일반적인 경우가 단 하나도 없었다.

최초로 튜토리얼 보스를 클리어.

최초로 기사왕 티리카의 건틀렛을 입수.

최초로 히든 클래스 힘의 마법사로 전직.

그리고 지금.

그가 또 다른 최초의 업적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현성의 눈앞으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최초로 거래의 악마, 페르온의 진명을 알아냈습니다.]

[그 보상으로 페르온에게 단 한번, 그 어떤 소원이든 빌 수 있습니다.]

[업적달성 : 악마의 진명을 부른]

눈앞에 떠오른 3개의 메시지 창.

이에 현성이 히죽 웃었다.

그대로 그가 에르시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글쎄. 질문이 잘못된 거 같은데 말입니다. 어떻게 알아냈느냐가 아니라….”

현성이 찬찬히 에르시온을 바라보며 조소했다.

“이 다음 어떻게 할지를 물어봐야죠.”

허를 찌르는 현성의 대답.

그의 말에 에리시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눈앞의 인간이 그녀의 진명을 언급했다면 지금 중요한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가 아닌, 마계의 규율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 규율이란 다름 아닌 무조건 현성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

[….]

에르시온이 꾸욱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원하는 건 크루페돈을 저지할 힘이라고 했나.]

“맞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에르시온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현성이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아래 타오르고 있는 검은 불꽃을 가리켰다.

“장소를 옮겼으면 좋겠는데…어떠십니까?”

[…흥.]

이에 에르시온이 싫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을 퉁겼다.

-따악.

그러자 다시 한 번 주변의 공간이 뒤틀리며, 현성과 그녀는 어느새 방금 전에 있던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그대로 에르시온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만족하나?]

그런 에르시온의 물음에 현성이 턱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글쎄요. 진명을 부른 것치고는 영 아쉽긴 하군요.”

[말조심해라. 인간.]

동시에 에르시온이 작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현성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그리고….”

[….]

“인간이 아니라 유현성. 제 이름입니다.”

그대로 현성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 거래 안 하실 건가요? 에르시온 님.”

그런 현성의 마지막 말에는 묘한 강조가 들어가 있었다.

이에 에르시온이 미간을 구겼다.

하필 인간에게 진명이 들키다니.

거래를 주관하는 마계의 귀족.

마계에서 마왕다음으로 거론되는 강자.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런 수식어는 아무런 소용없었다.

‘아무리 에르시온이라고 해도 결국은 <이스페리아>의 법칙아래에서 움직이는 등장인물.’

그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이 세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에르시온이 거래를 파기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본격적인 거래를 시작해볼까요?”

사실상 거래를 이미 시작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지금 현성이 내뱉는 말은 그 무게가 달랐다.

그리고 에르시온 역시 이를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제가 원하는 건 크루페돈을 죽일 수 있는 힘.”

현성의 말에 에르시온이 미간을 좁혔다.

[…방금 전에는 분명 크루페돈을 저지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자 현성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공교롭게도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단호한 그의 대답.

거기다 한술 더 떠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러면 안 되나요?”

[…크루페돈이 그렇게 네 녀석을 죽이고 싶어 한 이유를 알 거 같군.]

에르시온이 현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그저 재밌는 인간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은근하게 성질을 건드리는 꼴이 마치 자신을 상대로 간을 보는 것 같아 짜증났다.

그런 에르시온의 대답에 현성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상대방을 칭찬하는 방법은 수만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본디 게임에서의 칭찬은 바로 상대방에게서 “게임 X같이 하네.”라는 말이 날아오도록 만드는 것.

그 말은 게임 내에서 최고의 찬사나 다름없었다.

“자, 그럼 어서 진행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래보여도…꽤나 급박한 상황이거든요.”

현성이 작게 조소하며 말했다.

이에 에르시온은 순간 그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하아….]

에르시온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펼쳤다.

[…잠시만 기다려. 확인할 게 있으니까.]

곧 그녀의 손을 따라 검은 책 한권과 안경이 소환되었다.

그대로 에르시온이 안경을 쓰며 책을 내려다봤다.

그런 책의 겉면에는 악마의 문양이 장식되어있었으며, 그 주변으로 검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지금껏 에르시온이 주관했던 모든 거래의 내용이 적혀있는 책.

동시에 지금 거래를 주관할 책이었다.

그리고 에르시온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검은 책의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촤르륵!

그렇게 페이지를 넘겨가며 내용을 확인하던 에르시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소원은 좀 힘들 거 같군.]

그러면서 에르시온이 안경을 치켜 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인과율의 법칙에 어긋날 가능성이 너무 커. 한 마디로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말이야. 내가 소원을 이뤄준다고 한들 자칫 잘못하다가는 너까지 죽을 수도 있어.]

거래가 시작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확인한 현성의 남은 체력은 1%.

이대로라면 거래가 끝나기 무섭게 크루페돈을 죽이기는커녕 현성 그가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 관계로 나는 웬만하면 다른 소원을 추천….]

그러자 현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힘들 거 같다는 거지. 불가능한건 아니잖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인과율이….]

“그 정도는 에르시온님의 권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 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현성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크루페돈을 죽일 힘을 달라는 것.

아무리 소원이라고 한들 어려운 조건이었다.

하지만 현성이 그걸 몰라서 말했는가.

확실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라면 할 수 있다.

<이스페리아>의 설정이라면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진명까지 불렀던 것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애초에 크루페돈의 피와 살점이라는 괴식을 먹을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방금 에르시온이 언급한 인과율의 법칙.

인과율, 그러니까 크루페돈을 죽이는 건 어디까지 지금 현성이 낼 수 있는 한계를 기준으로 그 한도 내에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갑자기 마왕급의 힘을 발휘해 크루페돈을 죽인다?

그런 건 불가능하다.

허나 현성의 능력을 이용하되, 부가적으로 에르시온의 힘으로 그 한계를 넘어설 조건을 충족시켜준다면 그건 가능했다.

‘물론 드럽게 빡세겠지.’

이른바 수만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해 아슬아슬하게 인과율이 허락하는 선을 찾아야했다.

에르시온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못 박는 게 아니라 교묘하게 말을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이 정도라면 보통은 다 한수 접기 마련이니까.

‘역시 수백 년 간 거래를 해온 짬바는 어디 안 가.’

거래의 악마다운 말솜씨였다.

하지만 에르시온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바로 눈앞의 상대가 ‘보통’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종 중에 별종이라는 사실.

“모자란 인과율은 에르시온 님의 힘으로 채우면 되지 않습니까.”

[…큿.]

현성의 말에 에르시온이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인간주제에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애초에 진명을 알아낸 것부터 의심스러웠다.

‘이런 인간은 파우스트 이후로 처음이군….’

그대로 현성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이어서 진행해볼까요?”

에르시온이 그런 현성을 바라보며 책을 꾹 쥐었다.

무엇보다도 저 말투와 태도.

여기서 더 숨겨도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그는 모든 걸 꿰뚫고 있었다.

당장 지금도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차갑게 내려앉은 눈동자가 그 증거.

이에 곧 에르시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다. 그럼 네 말대로 해주지. 대신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불의의 사고는 알아서….]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경우, 저 뿐만 아니라 에르시온 님에게도 피해가 가는 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동시에 에르시온이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으드득.

그 소리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물론 에르시온 님이라면 그럴 일 없겠지만요.”

그 말에 결국 에르시온이 그를 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어느 것 하나 인과율의 법칙이고 불의의 사고고 단 1도 없이 완.벽.하.게. 끝내주지.]

그 말에 현성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에르시온 님의 넓은 아량에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이에 에르시온이 현성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주의로 짙은 마기가 일렁였다.

[그럼 지금부터 거래를 시작하겠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이 촤르륵! 넘어가며 에르시온과 현성의 발밑으로 검은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한 눈에 봐도 복잡해 보이는 구조.

그리고 그런 에르시온의 이마에는 어느새 검은 뿔이 솟아있었다.

크루페돈과는 달리 완벽하게 형태를 갖추고 있는 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화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악마의 모습.

[나, 거래의 악마 에르시온은 진명을 알아낸 대가로 그대에게 단 한 번, 소원을 들어줄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그 소원은 ‘크루페돈을 죽일 힘’. 맞나?]

“맞습니다.”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르시온 주변의 마기가 점점 더 짙어지고.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이에 나, 에르시온은 권능을 이용해 계약자에게 아무런 반동 없는 힘을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

그대로 에르시온이 현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계약자는 이 거래를 받아들이겠는가.]

그런 에르시온의 말에 현성이 히죽 웃었다.

거래내용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거래를 받아들겠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현성과 에르시온 주변으로 검은 책의 페이지가 흩날렸다.

그렇게 둘을 에워싼 페이지.

곧 현성의 눈앞에 떠오른 백지.

그 중앙으로 검은 불꽃이 타오르며 방금 전 말한 거래내용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거래내용이 적혔을 때.

[이것으로 거래는 성립. 돌아가면 곧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말과 동시에 현성의 몸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스으으.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에 에르시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똑똑히 기억해라.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대로 현성이 사라지기 직전.

에르시온의 그의 넥타이를 잡고 끌어당기며 말했다.

[…다음번에 만날 땐 기필코 네 영혼을 가져가겠다.]

에리시온의 살기가 느껴지는 한마디.

그러자 현성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해보시죠. 할 수 있으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성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

그곳에는 오직 검은 불씨가 흩날릴 뿐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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