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화 히든 공락법(8)
짙은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현성은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어둠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 갇혀있는 시간은 마치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며.
동시에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또각, 또각.
어둠 너머로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현성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하나 뿐.
그리고 다가오던 소리가 바로 앞에서 멈춰선 순간이었다.
[…간만의 손님이로군.]
부드러운 목소리.
그와 함께 목소리의 주인이 손가락을 퉁겼다.
-따악!
그러자 경쾌한 소리가 현성의 귓가를 때림과 동시에 그의 눈앞에 드리워진 어둠이 순식간에 걷혔다.
마치 단번에 환한 달이 뜬 것 같은 느낌.
이에 현성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
방금 전만 해도 사방을 뒤덮었던 어둠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화려한 샹들리에.
서재에 빽빽하게 꽂혀있는 책들.
탁자 위에 놓여있는 고급스러운 은색 촛대까지.
주변은 그야말로 중세 귀족들의 집무실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그런 현성의 맞은편에는 한 여성이 앉아있었다.
그대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마의 거래에 온 걸 환영하지.]
밤이 녹아든 것 같은 짙은 흑발.
붉은 루비처럼 타오르는 적안.
거기다 깔끔한 연미복과 그 너머로도 느껴지는 매혹적인 몸매.
동시에 위험했다.
뱀이 몸을 휘감듯 발목부터 천천히 올라오는 진한 마기.
-스으으.
크루페돈의 폭발적인 마기와는 그 분위기는 달랐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존재는 크루페돈, 아니 그 이상으로 위험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은 오히려 그녀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페르안.”
그런 현성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호오, 내 이름을 알고 있었나?]
그 반응에 현성이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방금 전 대답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성공했다.’
그녀의 이름은 거래의 악마, 페르안.
마계의 모든 거래를 주관하는 유일한 인물임과 동시에 진명을 가지고 있는 마계의 귀족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가진 힘과 권력은 상상 그 이상.
‘마계에서 순위를 매긴다면 마왕 바로 그 다음으로 거론되는 인물.’
그게 바로 지금 현성의 눈앞에 있는 페르안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마계의 귀족이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악마의 피와 살은 거래를 위한 최고의 재료니까.’
전에 말했듯 <이스페리아>의 설정상 악마는 몬스터 중에서도 꽤나 상위개체.
그리고 이들의 피와 살을 포함한 모든 부위에는 마계의 마력과 마나가 담겨져 있다.
무려 다른 차원의 기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의 신체는 마법계에서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싸고 희귀한 마법재료였다.
당장 마법강화부터 마도구 제련까지.
악마의 신체만 있다면 할 수 있는 마법연구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아마 지금 당장 마법학 교수 리플레카에게 악마의 피를 5방울만 준다하면 그는 그대로 눈이 돌아갈 정도.’
그 정도로 가치가 높은 게 바로 악마의 부산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악마의 피와 살의 진정한 힘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악마는 소원을 이루어준다.’
당장 현실에서도 흔히 들어 볼 수 있는 말이었다.
생전 악기를 다뤄본 적도 없는 자가 갑자기 모든 악기를 압도적으로 뛰어나게 다루지 않나.
백년에 한 번 나올 그림을 그려내지 않나.
과거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야기의 주인공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 보통 악마와 거래를 한 자. 혹은 악마의 재능을 가진 자.
라고 부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스페리아>에서는 그게 실존한다.’
악마의 거래를 통해 인간은 대가를 치르고 원하는 걸 얻는다.
또한 이 모든 거래는 마계의 귀족이자, 거래의 악마 페르안에 의해 행해진다.
이게 바로 <이스페리아>의 설정이었다.
‘여기서 악마의 거래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바로 마계의 기운을 담고 있는 물질. 즉 악마의 피와 살.’
이것이 현성이 마지막에 크루페돈의 피와 살을 씹어 먹은 이유였다.
무엇보다 이는 악마의 급이 높을수록 그 효과가 커진다.
‘…아무리 크루페돈이 봉인되어 있었다고 한들, 그는 과거의 마계의 귀족자리까지 올랐던 고위 악마.’
그의 피와 살은 그만큼 진하고 방대한 마계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펼쳐진 상황이 바로 지금.
악마의 거래.
결과적으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현성이 내린 이 선택은 그가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현성이 크루페돈과 싸우던 때를 떠올렸다.
‘…하마터면 그대로 뒤질 뻔했지.’
악마의 거래는 무조건 100%확률로 이루어지는 맘 편한 거래가 아니었다.
마계의 기운을 몸이 버티지 못한다면 거래는 그대로 무산.
솔직히 도박수였다.
‘만약 페르온이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고 체력이 다 깎였다면 그대로 죽었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관문이 있었다.
거래를 시작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들.
그 상대나 내용이 페르온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한다면 역시나 거래는 실패하며, 그 대가는 당연히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거래를 성사시킨다면?
‘시전자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의 거래의 끝은 언제나 파멸뿐이었다.
즉 악마의 거래는 오로지 페르온 그녀의 주관에 따라 결정되는 불공정거래이자, 그 말로는 죽음 혹은 파멸.
그야말로 괜히 악마의 거래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니었다.
‘…이득밖에 없으면 그게 악마의 거래가 아니라 천사의 거래겠지.’
그러나 현성은 다 알고 왔다.
알고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면 그 어떤 방법도 없으니까.
‘아무튼 악마의 거래에 들어오는 데까지는 성공.’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거래를 시작할 차례였다.
현성이 마주 앉아있는 페르온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거래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그런 현성의 말에 페르온이 그를 유혹하듯 달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원하는 게 무엇이지? 평생을 써도 넘칠 돈? 모든 사람들이 시기할 만큼 뛰어난 재능? 그게 아니면…본능에 충실한 욕구?]
그러면서 페르온이 혀로 자신의 붉은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허어, 이거 게임에서 봤을 때랑 직접 볼 때랑은 차원이 다르네.’
짙은 흑발과 적안.
아름다운 미모와 연미복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육감적인 육체.
거기다 사람을 홀리는 눈빛과 부드러운 말투까지.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였다.
‘…이러니 유저들이 뻑이 가지.’
무려 <이스페리아>의 히로인들을 제외한 인기투표에서 언제나 부동의 1위를 차지한 등장인물.
그게 바로 거래의 악마, 페르온이었다.
심지어는 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히로인으로 넣어달라는 요청 또한 상당했다.
덕분에 페르온이 나온 영상이나 게시물은 전부 ‘눈나 나 죽어’로 도배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죽하면 제작사에서도 이 말을 인정할 정도.
이에 현성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상황은 다 보고 있었잖습니까. 알면서도 이러시다니…얄궂으시군요.”
현성이 원하는 것은 당연히 크루페돈을 저지하는 것.
그러자 페르온이 의외라는 듯 작게 감탄사를 내며 현성을 위아래로 훑었다.
[흐응? 간만에 재밌는 인간이 왔군. 이렇게 재밌는 걸 그동안 크루페돈 혼자 즐기고 있던 거야? 그 아둔한 떨거지 같으니라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마 비슷할 겁니다.”
[크흐, 역시 재밌는 인간이라니까. 이 맛에 내가 거래를 못 끊지….]
그대로 페르온이 턱을 매만지며 조소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가 손가락을 저으며 말했다.
[그치만 그건 불가능해.]
“…이유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간단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게 없잖아.]
페르온이 하얀 손가락으로 현성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악마의 거래는 항상 대가가 존재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현성은 크루페돈과의 전투에서 죽기 직전까지 간 상태.
지금의 그에게는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 숨이 붙어있는 것은 악마의 거래덕분.
만약 거래가 끝난다면 그는 곧바로 죽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페르온이 자리에서 일어난 뒤, 천천히 현성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멈춘 곳은 현성의 바로 옆.
곧 페르온이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차라리 방금 말한 것처럼 순수한 욕망에 맡기는 건 어때? 그 정도라면 지금 당장 해버리는 것도 가능한데….]
그대로 페르온이 현성을 부드럽게 껴안았다.
동시에 온 몸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육체.
그런 그녀의 제안에 현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허나 여기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영혼.
만약 여기서 현성이 그녀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그는 크루페돈에게 가기도 전에 여기서 죽을 터.
“죄송합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잠시 뒤.
현성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그녀를 밀어냈다.
곧 페르온의 유혹을 떨쳐낸 현성이 차갑게 말했다.
“제가 원하는 요구는 오직 크루페돈을 저지하는 것. 그거 하나뿐입니다.”
그런 현성의 대답에 페르온의 미간이 작게 움찔거렸다.
[…자꾸 이러면 내가 심한 짓을 할지도 몰라.]
앞서 말했듯이 거래는 어디까지나 페르온의 마음대로 이루어진다.
만약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흥미를 떨어트린다면 거래는 바로 종료.
그 끝에 기다리는 현성의 운명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 다른 걸 선택하는 건 어때?]
방금 전과 같은 부드러운 말투.
하지만 그 사이 섞여있는 약간의 살기.
지금의 제안은 권유보다는 협박에 가까웠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알고 있는 페르온이라면 지금 당장 자신을 죽이고 그 시체로 방을 장식해도 모자랐다.
현성이 페르온을 향해 말했다.
“…특별히 제게 뭔가 마음에 드는 거라도 있는 모양이신지?”
그 말에 페르온이 멈칫거렸다.
그대로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딱히 부정하지는 않겠어. 너는 뭐랄까.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페르온이 다시 한 번 할짝거리며 현성을 바라봤다.
[상당히 맛있을 거 같거든.]
그런 그녀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뱀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이어진 페르온의 말.
[넌 마치 한 인간의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간 거 같아.]
이에 현성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도 잠시.
그가 피식 웃으며 방금 전 페르온이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그렇다.
페르온이 유독 현성 그에게 호기심을 가지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이곳 <이스페리아>의 유현성이라는 몸에 빙의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페르온의 입장에서는 현성의 영혼은 그야말로 별미 중의 별미로 보일 터.
확실히 다른 인간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선택의 시간이야. 뭐라도 얻고 나한테 먹힐래 아니면 크루페돈 그 아둔한 떨거지한테 먹힐래?]
그 말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뭘 선택해도 먹히는 건 똑같았다.
그러나 현성은 올곧았다.
“말했잖습니까. 전 크루페돈을 저지할 힘을 원한다고.”
[….]
이에 페르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해서 제안을 거부하다니.
아무리 그가 특별하더라도 결국은 인간.
[착각이 지나치구나.]
페르온의 말투가 바뀌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감히 인간 따위가 마계의 귀족인 자신을 거스르다니.
[네가 특별하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래 봤자 한입거리 인간일 뿐. 난 어지간해선 받기 힘든 기회를 주려고 한 거지. 네 좋을 대로 기어오르란 뜻이 아니었는데.]
그대로 페르온이 현성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돌연 주변의 공간이 뒤틀리더니.
어느새 주변은 불타오르는 검은 화염이 가득했다.
[좋아. 너에 대한 내 흥미가 가셨어. 아쉽게도 말이야.]
-화르륵!
검은 불꽃의 절벽.
마계의 귀족, 페르온만의 고유 공간이었다.
여기서는 현성 그가 제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었다.
이곳의 주인은 오직 페르온 그녀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은?]
페르온이 현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껏 오른 흥이 깨져버렸으니 이대로 그를 죽일 셈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터업!
현성이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손길.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페르온. 아니….”
그대로 현성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르시온.”
동시에 페르온의 몸이 움찔거렸다.
분명 짧은 틈에 불과했지만 현성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그녀가 동요했다.
이에 현성이 여유롭게 말했다.
“…진명을 불린 건 오랜만이죠?”
에르시온.
그 이름은 다름 아닌 거래의 악마, 페르온의 진명이었다.
그리고 마계의 규율 상.
진명을 알아낸 자에게는 한 가지 보상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딱 한 번. 당사자가 무슨 부탁을 하던 무조건 이에 응하는 것.’
이것이 거스를 수 없는 마계의 법칙이자.
현성 그가 알고 있는 <이스페리아>의 설정 중 하나였다.
그런 현성의 말에 페르온, 아니 에르시온이 그대로 현성을 째려보며 말했다.
[…그 이름. 어떻게 알고 있지?]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