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화 히든 공락법(5)
악마.
<이스페리아>의 설정 상 악마는 몬스터 중에서도 꽤나 상위개체에 속하였다.
그 중에서도 진명을 가지고 있는 악마는 마계의 귀족이라 불리며, 그 권력과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눈앞의 크루페돈 역시 진명을 가지고 있던 악마였다.
‘…허나 크루페돈은 기사단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봉인된 후 그 자리를 박탈당했다.’
거기다 크루페돈을 직접 봉인한 사람이 다름 아닌 기사왕 티리카.
그게 벌써 <이스페리아>의 설정 상 수십, 수백 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만큼 오래 봉인되어있던 만큼 갓 봉인이 풀린 크루페돈의 몸은 온전치 못했다.
그 증거가 바로 현성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
‘만약 눈앞의 녀석이 전성기였다면 지금 이렇게 막아서는 건 엄두도 못 냈다.’
그게 아니었으면 현성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은 진즉에 크루페돈에게 당해 전원 몰살당했을 게 분명했다.
동시에 이를 반증하듯 크루페돈이 하린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쯧. 예전이었으면 진즉에 다 잡아먹고도 남았는데 아쉽군. 꽤나 맛있어 보이는 인간이었는데 말이지. 꼭 먹음직스러운 병아리 같았지.]
크루페돈이 흉하게 잘려나간 자신의 뿔을 긁적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망할 기사단 놈들만 아니었으면….]
그때 봉인당하지만 안했어도 크루페돈은 이깟 불의 둥지가 아닌, 마계에서 귀족자리를 꿰차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 꼴을 보라.
흉하게 잘려나간 검은 뿔.
볼품없는 몸뚱아리.
누군가 자신을 위해 산 제물을 바쳐 봉인에서 풀려난 건 다행이었지만 아직 한참 모자랐다.
오랫동안 봉인에 갇혀있던 리스크가 너무 컸다.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야….]
크루페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크루페돈이 눈앞의 현성과 시연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히죽 웃었다.
[그래도 뭐 상관없다. 어차피 빨리 먹느냐. 늦게 먹느냐의 차이일 뿐. 방금 도망친 귀여운 병아리는 네놈들을 처리하고 느긋하게 먹어주지.]
중요한 건 봉인에서 풀려났다는 사실.
설사 지금은 전성기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상태라 하더라도, 힘은 되찾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바로 눈앞의 신선한 인간들을 전부 잡아먹는 것.
[…어차피 네깟 놈들은 전부 나를 위한 제물이 될 운명.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해라.]
그대로 크루페돈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마계의 귀족이었던 내게 먹히는 거니까 말이야.]
해골너머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 말에 시연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마계의 귀족이라면….”
시연 역시 그에 대해서는 짧게나마 들은 적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악마가 마계의 귀족이라면 승산은 제로에 가까웠다.
이에 시연이 검을 꾹 움켜쥐며 현성에게 말했다.
“…우리가 잡을 수 있을까.”
그 말에 현성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 쫄지 마. 마계의 귀족은 개뿔.”
곧바로 현성이 크루페돈을 향해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렸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귀족‘이었던’ 것으로.”
“그렇다면….”
“맞아. 귀족 아니야.”
그 말에 크루페돈이 움찔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 난 아직 귀족…!]
그대로 현성이 크루페돈을 흘깃 쳐다보았다.
기왕 싸울 거.
데일런트 때처럼 어그로 한 번 제대로 끌어볼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게 너도 생각해봐. 귀족도 귀족 나름이지. 귀족이라는 게 기사단한테 당한 것도 모자라서 인간계에 봉인되었잖아. 다른 귀족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수치스럽겠냐. 거기다 저기 잘린 뿔 있지? 저것도 기사단이랑 싸우다가 잘린 거일 걸?”
현성이 그런 크루페돈의 잘린 뿔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 듣자하니 악마는 뿔이 크고 아름다울수록 인정받는다는데 넌 어쩌냐. 인간으로 따지면 탈모 비슷한 거 아니냐? 지금은 인간 따위를 먹는 것보다는 프로페시아를 먹는 게 낫지 않을까. 탈모는 관리가 중요해.”
쉴 새 없이 나불거리는 현성의 혀.
그럴수록 크루페돈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참으려 했건만 감히 뿔까지 건드리다니.
크루페돈이 중얼거렸다.
[…닥쳐라. 탈모 아니다.]
이에 현성이 크루페돈의 말을 따라하며 비아냥거렸다.
“댁쳐라 탤모애니다.”
그런 현성의 말에 크루페돈이 이를 갈며 그를 바라보았다.
-으드득!
겨우 인간에 불과한 녀석이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것도 모자라 대놓고 심기를 건드려?
게다가 방금 전 저 말투.
당장에라도 혀를 뽑고 싶을 정도였다.
치욕적이었다.
전성기였으면 손가락하나 까딱하면 죽었을 하찮은 인간주제에 감히 이런 치욕을 선사하다니.
[역시 네놈은 내가 꼭 먼저 죽여주마.]
방금 전과는 달리 명백한 살기가 느껴지는 발언.
이에 시연이 크루페돈과 현성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데일런트 때도 그렇고 왜 너만 보면 이래?”
“글쎄다.”
현성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창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크루페돈을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저러니까 귀족에서 박탈당했지. 꼭 머리털 없는 것들이 성질 더럽더라. 그렇게 성질이 지랄 맞으니까 니 뿔이 도망갔지.”
[이, 이런 하찮은 인간주제에….]
크루페돈 역시 나름대로 맞받아쳐보려 했지만 현성의 유려한 혀놀림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분명 무력으로는 그가 앞설지 모른다.
허나 말싸움이라면 말이 달랐다.
유현성.
지금껏 장르를 막론하고 한국에서 게임을 해오면서 들어왔던 패드립이 몇 개인가.
한국에서 게임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컴퓨터가 아니었다.
제일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부모님을 지키기 위한 실력과 말빨.
“흐음….”
현성이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원하는 게 떠오른 듯 작게 조소하며 크루페돈을 가리켰다.
[…타르칼.]
타르칼.
<이스페리아>에는 독자적인 언어체계가 몇몇 존재했다.
그 중 마계어 역시 존재했으며 현성이 방금 말한 타르칼의 뜻은 바로.
‘마계어로 탈모.’
이에 크루페돈은 그저 현성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그야말로 완벽한 현성의 마무리.
이미 크루페돈의 라이프는 제로였다.
‘…마계어 배워두길 잘했다.’
현성이 그런 크루페돈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스토리를 다 밀고 할게 없어서 <이스페리아>의 언어나 배워볼까 했는데 이게 이렇게 빛을 발할 줄이야.
[이, 이…이런…으아아아아악!!]
곧 분노에 휩싸인 크루페돈이 날개를 퍼덕였다.
동시에 그의 몸 주위로 거센 불꽃이 타올랐다.
-화르륵!
봉인에서 풀린 후.
아니 봉인 전에도 이렇게 분노에 찬 일은 없었다.
그대로 크루페돈이 현성을 향해 달려들며 외쳤다.
[죽인다! 기필코 죽여 버리겠다!]
이에 현성이 재빨리 자세를 잡고 들고 있던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 창끝에 서려있던 얼음이 크루페돈의 불꽃과 격돌하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콰가각!
그 사이.
현성이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등을 노려!”
그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연이 벽을 밟고 도약했다.
그리고 그녀의 양옆을 타고 수십 개의 검이 펼쳐졌다.
공중에 날개를 펼친 듯 소환된 검.
곧이어 시연이 양손으로 검을 하나씩 뽑아든 채.
재빠르게 크루페돈의 등을 노리고 내려쳤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이것들이 감히…!]
크루페돈이 날개를 휘두르며 몸을 틀었다.
-채앵!
그와 함께 마치 검과 방패가 마주치는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불꽃을 두른 크루페돈의 날개는 웬만한 병장기보다 단단했다.
그대로 크루페돈이 시연을 향해 입을 벌렸다.
이어서 해골의 턱 부분이 양옆으로 쩌억 갈라지며 화염 브레스가 쏘아졌다.
“…!”
이에 시연이 미간을 좁히며 양손의 검을 버리고 뒤에 수납되어 있는 순백의 검을 쥐고 순식간에 내리그었다.
절도 있는 깔끔한 검로.
그런 그녀의 검신을 타고 푸른 마나가 일렁였다.
-피잇!
동시에 시연의 검이 말 그대로 화염 브레스를 갈랐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 화염 브레스는 그녀의 양옆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에 현성이 시연과 순백의 검을 번갈아보았다.
‘…제 2식 낙천(落天).’
하 가문의 검술 중 하나로 검을 내리긋는 모습이 마치 하늘을 떨어트리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에 현성이 자기도 모르게 작게 감탄했다.
물론 현성이 그 기술을 아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은 전부 게임 속에서만 봐왔을 뿐.
이렇게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겉멋만 든 기술인줄 알았더니….’
시연의 손끝에서 펼쳐져 화염을 가르는 검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잠시 뒤.
불꽃을 벤 시연이 검을 한 번 털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칫.”
브레스를 베어 가른 탓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유효타를 못 먹인 건 양쪽 다 마찬가지였다.
크루페돈은 뿔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실력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래보여도 과거 마계의 귀족까지 올랐던 악마.
절대 방심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대로 현성이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전. 등에 있던 상처 봤어?”
현성의 말에 시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봤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연은 분명히 봤다.
크루페돈의 등에 나있던 상처.
그곳은 다른 부위와는 달리 흉측하게 파여 있었다.
“…그게 바로 크루페돈의 약점부위야.”
현성이 작게 속삭였다.
그 상처는 다름 아닌 과거 크루페돈이 기사단, 그 중에서도 티리카에 의해 봉인당할 당시 입은 치명타였다.
다른 곳은 이미 재생되었지만, 유독 그 한 곳만은 쉽게 낫지 않았다.
바꿔 말하자면 유일하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부위.
그게 바로 등 쪽에 나있는 상처였다.
허나 방금 봤듯이 등의 상처를 쉽사리 노릴 수 없었다.
‘온 몸을 두른 불꽃은 물론이며, 크루페돈 역시 이를 알기에 필사적으로 상처를 막을 터.’
시연이 크루페돈을 주시하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런 시연의 말에 현성이 크루페돈의 뒤쪽.
그러니까 넓게 펼쳐진 돔 형태의 동굴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일단은 크루페돈을 저쪽으로 유인해야해.”
크루페돈 공략 시 가장 우선되는 조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좁은 골목이 아닌 아래 돔 형태의 필드까지 내려갈 것.
동시에 현성이 그렇게 크루페돈의 성질을 긁어대며 어그로를 끌어댄 이유 또한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좋아. 그럼….”
시연이 작게 심호흡을 하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녀 또한 현재 크루페돈이 우선적으로 노리는 대상이 현성인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역할이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
“내가 길을 열게.”
그대로 시연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발밑으로 푸른 마나가 일렁였다.
그리고 시연이 자세를 낮춘 순간.
“…간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시연이 있던 바닥이 움푹 파이며 그녀의 몸이 쏜살같이 쏘아졌다.
-파앗!
크루페돈이 이를 보고 두 날개로 바닥을 지탱하더니 목을 뻗었다.
[속도라면 뚫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그와 동시에 크루페돈의 검은 몸을 타고 수십 개의 촉수들이 뻗어 나와 곧바로 시연을 저지하기 위해 날아왔다.
하지만 그에도 불구하고 시연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저 침착하게 크루페돈을 주시할 뿐.
이에 크루페돈의 몸에서 뻗어 나온 촉수가 시연의 사지를 속박하려는 때였다.
시연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림과 함께 입을 열었다.
“…비켜.”
그대로 시연의 검이 번쩍이며 검집에서 뽑아져 나왔다.
그때였다.
시연이 양옆에 있던 검의 날개가 촤악 펼쳐지더니.
날갯짓 한 번에 수십 개의 검이 단번에 크루페돈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
수십 개의 검을 동시에 다루는 시연만이 쓸 수 있는 그녀의 오리지널 기술.
하 가문에서는 펼쳐진 검을 날리는 그 모습이 마치 하얀 날개와 같다고 하여.
백익(白翼)이라 칭하였다.
그 공격에 시연을 결박하려던 크루페돈의 촉수는 말 그대로 산산 조각난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채 3초도 안 되는 시간, 시연의 일합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동시에 시연이 외쳤다.
“현성. 지금이야. 달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