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전조(6)
현성이 서있는 불의 둥지 안쪽.
그런 그의 발밑에는 쓰러진 연합의 학생들뿐이었다.
방금 전 쓰러진 지성을 끝으로 더 이상 움직이는 학생들은 없었다.
이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들고 있는 창을 매만졌다.
‘…역시 창도 꽤 괜찮은 무기란 말이지.’
물론 창이라는 무기도 무기 나름이지만 그가 이만한 위력을 낼 수 있는 본질은 현성 그의 피지컬에 있었다.
그리고 그런 피지컬을 만든 것은 바로 경험.
<이스페리아>의 주인공인 유진은 설정 상.
어떤 무기를 써도 육성이 가능한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그에 따라 현성 그 또한 게임을 플레이하며, 작 중 유진이 쓸 수 있는 무기란 무기는 전부 사용해봤다.
게임과 현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는 한들.
이를 전부 알고 경험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보다시피 명확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만약 이곳이 게임과 똑같다면 그는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 자신이 게임을 플레이할 당시의 컨트롤을 얼추 구현해낼 수 있었다.
‘물론 하린의 케이스처럼 타고난 신성력은 따라할 수 없지만….’
그런 걸 제외하고 경험적인 면에서만 두고 본다면 현성에게 불가능한 것은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노력이나 훈련으로 커버 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현성은 그야말로 격이 달랐다.
동시에 이게 바로 현성 그가 <이스페리아>에 빠진 이유였다.
근성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실제로 과거 그가 <이스페리아>의 고인물로 등극할 수 있게 해준 동력은 노력이었다.
즉 현성은 재능이 있는 게이머는 아니었다.
‘…그랬으면 내가 프로게이머를 했겠지.’
fps게임에서 에임이 좋다.
리듬게임에서 패턴을 외우는 능력이 좋다.
aos게임에서 컨트롤이 좋다.
이는 모두 현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평범했기에 노력했으며,
아이러니하게 평범했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는 유일한 재능은 근성이었다.
악으로, 깡으로 패턴을 외우고.
안되면 될 때까지 트라이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게 바로 지금의 현성.
<이스페리아>의 망령이었다.
어쩌면 기절하기 전 지성이 한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미친놈.
정말이지 현성 그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그럼 이제….’
쓰러트린 학생들의 붉은 결정을 털 시간이었다.
이에 현성이 기절한 학생들의 품을 하나하나 뒤지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결정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됐다.”
현성이 한 손 가득 붉은 결정을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품을 뒤져 나온 결정의 수는 얼핏 봐도 10개 이상.
그렇다면 기존에 현성이 모은 20개와 합쳤을 때.
이걸로 2라운드 진출에 필요한 포인트는 전부 모은 거나 다름없었다.
-스윽.
곧바로 현성이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매만졌다.
그 팔찌는 전에 말했듯이 위급 상황 시 불의 둥지를 벗어날 수 있게 만든 기권용 팔찌.
하지만 이 팔찌에는 숨겨진 기능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2라운드 대기실까지 이동시켜주는 것.
이에 현성이 팔찌를 꾹 움켜쥐고 약간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스으으!
그러자 팔찌의 겉면을 타고 복잡한 문양이 새겨지더니 점차 주변으로 푸른 입자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푸른 입자가 현성의 몸을 에워싼 순간.
팔찌가 빛을 뿜어내며 불의 둥지 가운데 환한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 * * * *
잠시 뒤.
현성이 서있는 곳은 불의 둥지 안쪽에 마련된 간이 대기실.
구조를 보아하니 입구와 보스가 있는 곳의 딱 중간쯤에 위치한 곳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게임 내에서는 플레이어의 정비를 위해 구현된 안전지대.
지금은 2라운드를 위한 대기실로 쓰이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기실에 도착한 것은 그가 처음인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서있는 현성을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응? 벌써?”
그런 그의 가슴팍에는 아카데미의 사람인 걸 알려주는 문양이 달려있었다.
거기다 차고 있는 완장을 보아하니 대기실 관리를 임명받은 아카데미의 시험관으로 보였다.
그대로 시험관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 학생. 팔찌의 사용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숙지한 게 맞나?”
간혹 그런 학생들이 있었다.
혹시나 이대로 2라운드로 갈수 있나 싶어 팔찌를 풀지 않고 대기실로 오는 안일한 생각의 학생들.
그리고 이런 경우를 대비해 있는 것이 바로 시험관이었다.
즉 시험관의 임무는 대기실로 온 학생의 포인트를 제대로 확인하는 것.
이에 그가 현성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미간을 좁혔다.
‘테스트가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빨리….’
물론 누군가는 첫 번째로 도착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현성의 등장은 그런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게다가 아카데미 내 유명한 상위권의 인물.
그러니까 하시연 정도면 모를까.
현성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학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포인트도 채우지 않고 그냥 와봤군.’
곧바로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혹시 포인트로 제대로 모으지 않고 호기심에 왔다면 유감이군. 바로 탈락처리 하도록 하겠….”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현성이 품에서 붉은 결정 한 다발을 꺼내 들이밀었다.
그대로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총 30포인트 맞죠?”
“…뭐?”
그런 현성의 말에 시험관이 현성과 그가 내민 붉은 결정을 번갈아보았다.
한눈에 봐도 상당한 개수.
이에 시험관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 그럼 우선 이쪽으로….”
그러면서 그가 대기실 가운데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마치 제단을 연상케 하는 기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험관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져온 붉은 결정을 모두 여기 넣어보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챙겨온 붉은 결정을 기계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곧 마법진이 발동되며, 올려둔 붉은 결정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본 기계는 붉은 결정을 감별하는 기능으로써 혹시 모를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였다.
-위이잉.
그렇게 잠시 뒤.
감정이 끝났음을 알리는 알림음과 함께 마법진이 꺼졌다.
그 결과는 당연히 붉은 결정들은 모두 진짜.
거기다 그 개수는 정확히 30개.
스크린에 떠있는 30P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허어….”
시험관이 작게 헛웃음을 터트리며 현성을 바라보았다.
“대단하군. 1라운드 최초 합격자다. 게다가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30포인트를 모으다니…어떻게 한 거지?”
순수한 놀라움에 나오는 질문.
그 질문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현성이 대기실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런 현성을 보고 시험관이 내심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다니.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 테스트는 단순히 운만으로는 통과할 수 없다.
아니 만에 하나 정말로 운이 좋아 통과했다고 한들.
제일 처음 통과했다면 그건 분명히 실력이었다.
시험관이 아무 말 없이 현성을 바라보았다.
‘…범상치 않는 학생이군.’
그 뒤로 한 5분정도 지났을까.
대기실을 타고 푸른 입자가 흩어지며 다른 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사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엇, 또 다른 합격자가…하시연 학생?”
하시연이었다.
대기실에 도착한 그녀가 항상 짓던 차가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현성을 발견한 그녀의 표정이 작게 움직였다.
“…현성?”
그러자 미리 도착해있던 현성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안녕. 너도 다 모은 모양이네.”
그런 현성의 말에 시연이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포켓과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보다 먼저 30포인트를 모았다는 소리.
동시에 시연이 현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꽤 빨리 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현성은 한발 더 빨랐다.
이에 시연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현성 그는 보통 학생이 아니었다.
시연이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트레이닝 룸에서 봤던 정체불명의 ASDF도 그렇고 아직 모자란 부분이 많았다.
곧 시연이 뭔가 결심한 듯 검집을 움켜쥐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어.’
* * * *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시연에 이어 한참동안 아무도 등장하지 않았다.
이에 현성과 시연은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간만이네. 테스트는 어땠어?”
현성이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시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어. 그냥…화염늑대 위주로 잡다가 중간부터는 다른 학생들이 오길래 같이 잡았지. 너는?”
“나도 뭐…비슷해.”
“음. 1라운드라서 그리 어렵게 내지는 않은 건가.”
“….”
그런 시연의 말에 현성이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숨 쉬듯 기만하는 것을 보아라.
역시 아카데미 1등은 달랐다.
“허허….”
물론 시연에게는 악의는 없었으나, 다른 학생들이 듣는다면 정말이지 입에 게거품을 물 발언이었다.
1라운드라서 그리 어렵게 내지 않았다니.
현성 그는 어디까지나 그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기묘한 방법으로 포인트를 벌었으니 예외로 친다지만, 이번 테스트는 어려우면 어려웠지 절대 쉬운 난이도는 아니었다.
‘이게 바로 메인급 등장인물의 위엄인가.’
현성이 시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선천강 때도 느꼈지만 역시 메인급 등장인물은 달랐다.
그리고 지금.
시연은 그런 현성의 눈빛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간만에 나누는 현성과의 대화.
이에 현재 시연은 최대한 티 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현성을 대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 혹시 티 나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서 시연이 잔뜩 긴장했지만 그렇지 않은 척.
현성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그렇게 대기실에서 둘이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 둘씩 다른 합격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테스트가 중후반 정도에 접어들었을 때.
마침내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앗.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유하린.
그대로 하린은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누구를 찾는 듯 급하게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찾는 사람은 바로 현성.
머지않아 곧 현성을 찾은 하린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향해 달려갔다.
“아! 오…아니 선배!”
하린은 순간적으로 평소 부르는 대로 ‘오빠’라고 부르려다가 이곳에 다른 학생들도 있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이에 현성 역시 하린을 발견하고 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한달음에 달려온 하린이 현성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선배. 역시 먼저 와있었네요.”
“너도 무사히 통과했네.”
“다 선배덕분이죠.”
그런 하린의 모습은 마치 주인을 만나 잔뜩 신난 강아지를 연상케 했다.
그때였다.
현성의 옆에 있던 시연이 그녀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하린 학생이라고 하셨죠?”
어느새 시연의 말투는 평소 다른 학생들을 대하는 사무적인 투로 바뀌었다.
현성과 단 둘이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말투.
하지만 현성을 제외한 다른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이게 당연한 이미지였다.
이에 하린이 뒤늦게 시연을 발견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아, 회장님. 안녕하세요.”
하시연.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자, 명실상부 아카데미의 톱.
하린 역시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부터 그녀에 대한 위상은 많이 들어 알고 있었다.
덕분에 하린은 약간 긴장한 듯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혹시 앉아도 될까요?”
그러자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편하게 앉으세요.”
“네! 그럼….”
그 말에 하린이 다행이라는 듯 활짝 웃으며 현성의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았다.
동시에 그녀가 자연스럽게 현성의 팔짱을 꼈다.
그러면서 하린이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는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그런 하린의 말에 순간 시연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시연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현성을 향해 말했다.
“오빠…라니요?”
그렇게 되묻는 시연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