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38화 (38/240)

038화 전조(2)

그런 시연의 말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응. 너는?”

그런 현성의 물음에 시연이 트레이닝 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나, 나는 이제 들어가려고.”

“그래? 아쉽네. 조금만 일찍 왔으면 같이 할 수 있었는데.”

현성이 그녀와 트레이닝 룸을 번갈아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역시 시연 그녀가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었다.

거기다 곧 불의 둥지 진입이 예정된 만큼 관련 업무는 평소보다 더 많을 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현성이 그녀를 향해 피식 웃으며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보자.”

그러자 시연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현성이 떠나고.

트레이닝 룸에 들어온 시연이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쉽네….’

현성은 몰랐을 테지만 사실 시연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 현성의 말대로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운동을 끝내고 같이 식사라도 할 기회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무엇보다도 요새 1학년생이랑 자주 만나고 있었지.’

분명 금발의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종종 트레이닝 룸 앞에서 현성을 기다렸기 때문에 시연 역시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쪽에서 먼저 하린을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었다.

‘이름이 분명 유하린이라고 했었지.’

인사까지 했었는데 시연이 이를 기억 못할 리가 없었다.

그대로 시연이 그녀와 현성을 떠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많이 친한가.”

물론 자세히는 모르지만 얼핏 보기에 둘은 오빠와 동생을 연상케 할 만큼 꽤나 친해보였다.

그리고 그런 둘을 떠올릴 때마다 시연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섭섭함에 가까운 거 같았다.

그도 그럴게 시연의 입장에서 현성은 아카데미 내에서 유일하게 가까워진 사이.

다른 학생들은 그녀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반대로 시연 역시도 다른 학생들 앞에서는 학생회장, 그리고 하 가문의 품위를 갖춰야 했다.

그러나 현성은 뭔가 달랐다.

선천강에서의 첫 만남 후로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시연은 현성 앞에서는 한결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덕분에 아카데미 내 경어로 부르지 않는 유일한 사람.

한마디로 말하자면 친구.

즉 시연에게 있어 현성은 아카데미에서 유일하게 그 친구라는 사이에 근접한 사람이었다.

거기다 오늘은 무려 반말로 말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런 현성에게 더 친해 보이는 후배가 있었다니.

이에 시연이 다시 한 번 묘한 섭섭함을 느끼며 현성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시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내가 뭐하는 거람.”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겨우 현성이 남과 친하게 지낸다고 섭섭해 하다니.

‘무슨 어린아이도 아니고….’

아무래도 최근 업무가 늘어나다보니 피로했던 모양이다.

그대로 시연이 고개를 저으며 작게 심호흡을 했다.

‘우선 잡생각은 버리고 오늘 치 훈련부터 하자.’

시연이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배틀 시뮬레이션 룸으로 향했다.

항상 훈련의 첫 시작은 모의전투로 몸을 푸는 것.

그게 그녀의 트레이닝 루틴이었다.

이에 시연이 배틀 시뮬레이션 룸으로 들어와 모의전투를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음?”

그런 그녀의 눈앞에는 오늘 동안의 순위를 기록한 창이 떠있었다.

그리고 가장 맨 위에 써진 기록.

화염늑대. 1분 24초.

오늘의 최고 기록을 따낸 시간이었다.

화염늑대.

크기는 중형 몬스터에 해당하며, 그 위험도는 중상위권에 들어가는 몬스터.

특히 불 속성을 가지고 있는 점과 특유의 화염 갈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시선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앞에 적힌 ASDF.

시연이 작게 미간을 좁혔다.

“이번에도 또….”

이번에도 1위의 이름 칸에는 ASDF라고 적혀있었다.

당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1위 자리에는 항상 하시연 그녀의 이름이 달려있었다.

헌데 최근 들어 자꾸 누군가 그녀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상황.

‘…도대체 누구야.’

차라리 이름이 적혀있으면 모를까.

항상 ASDF라는 이상한 닉네임 뿐.

시연 입장에서는 그게 누군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앞서 말했듯 그전까지 배틀 시뮬레이션의 부동의 1위는 하시연.

처음에는 그냥 별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어차피 다시 기록을 엎으면 그만이었으니까.’

허나 하루가 이틀이 되고 날짜가 점점 더 늘어날수록 1위의 이름에는 그녀 대신 ASDF가 적혀있었다.

그러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승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업무에 치여 살던 시연은 최근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당연히.

‘1위를 재탈환 하는 것.’

그리고 알게 모르게 시연은 이런 대결을 즐기고 있었다.

그동안 지루한 업무만 봐서 그랬을까.

1위 싸움은 시연에게 있어 소소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즐길 거리였다.

곧 시연이 옆에 배치된 연습용 검을 쥐었다.

-터업.

1위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시연이 1등과 똑같은 화염늑대를 설정하고는 자세를 잡았다.

이 대결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와 똑같은 조건에서 승부를 보는 것.

그러자 잠시 뒤.

[화산지형. 화염늑대 확인되었습니다.]

[5초 뒤에 몬스터가 생성됩니다.]

[5…4…3…2…1]

카운트가 끝나기 무섭게 시연이 1등을 갈아치우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런 그녀의 검에는 알게 모르게 평소보다 더욱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 *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불의 둥지 진입을 앞둔 하루 전.

야심한 새벽.

모두가 잠든 병원은 조용했다.

하지만 맨 위층에 위치한 VIP 전용 특별실 같은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으으윽….”

문 너머로는 계속해서 누군가 앓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그 소리는 분명 공포에 질려 악몽을 꾸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문 앞에는 ‘이성준’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여기서 VIP 전용실은 기본적으로 1인실.

그렇다면 그 앓는 소리의 주인공은 오로지 성준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으으윽…허억!”

뒤척이던 성준이 기겁하며 퍼뜩 잠에서 깼다.

그렇게 악몽에서 깬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이번에도 또…!”

자신이 악몽을 꾸다 일어난 것을 알아차린 성준이 이를 갈았다.

-으드득.

이번에도 같은 꿈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카데미 공개대련 당시의 상황.

그리고 그 대련에서 패배한 이후.

성준은 계속해서 악몽을 꾸고 있었다.

“유현성….”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

온 몸을 따라 느껴지는 작열의 고통.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오직 폭발하듯 솟아오른 푸른 불기둥뿐.

곧 뒤따라오는 감정은 분노와 치욕이었다.

감히 그깟 녀석한테 진 것도 모자라 악몽까지 꾸다니.

이는 틀림없이 성준 그가 현성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말과도 똑같았다.

거기다 매일 악몽을 꿀 정도의 공포면 트라우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그 망할 개자식이!”

그대로 성준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 그의 주먹은 하얀 깁스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콰앙!

그런 성준의 깁스와 벽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병실 가득 울려 퍼졌다.

그 날 대련 이후.

기절한 그는 아카데미에서 응급 처치를 받고, 재빨리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치료.

그 덕분에 성준은 생명에 큰 지장은 없었지만 그의 장래는 말이 달랐다.

아카데미 내에서 폭로된 그의 만행.

“…제기랄.”

그로 인해 성준은 단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정학 6개월에 사회봉사.

처음에는 퇴학이었지만, 어떻게든 가문에서 손을 쓴 덕분에 퇴학까지는 막았다.

하지만 그게 가문에서 그에게 준 마지막 자비였다.

성준은 공개대련에서 어떻게든 현성을 이기기 위해 가문의 비기를 숨기라는 가문의 말까지 무시하고 비기를 썼다.

그리고 차라리 비기를 쓰고 이겼으면 모를까.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공개대련은 그의 패배로 끝났다.

거기다 앞서 말한 아카데미 내 만행까지.

그야말로 성준은 가문의 위상에 보란 듯이 먹칠을 한 셈이 되었다.

그 결과 차기가주로 예정된 성준은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렇게 가문간의 세력다툼에서 밀려난 그의 말로는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가문의 장기 말로 쓰이다 버려지겠지.’

동시에 그런 그의 분노는 온전히 현성에게로 향했다.

그대로 성준이 주먹을 꾹 쥐었다.

-꾸구국!

그의 주먹이 분노에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성준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젠장!”

곧 성준이 침대를 박차고 병실을 나섰다.

도저히 이대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무작정 성준이 나간 곳은 병원 바깥에 마련된 산책로.

산책로에는 새벽이라 그런지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화를 식힐 겸.

산책로를 걷고 있던 때였다.

돌연 성준이 걸음을 멈추었다.

-멈칫.

어둠 너머.

누군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길함.

정체불명의 인형(人形)이 성준을 향해 물었다.

“아카데미의 이성준. 맞나?”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는 기분 나쁜 목소리.

그 물음에 성준이 주춤거리며 말했다.

“…누가 보낸 놈이냐?”

앞서 말했듯 성준은 이번 일로 인해 가문에서 밀려난 신세.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빠르든 늦든.

좋은 의도든, 나쁜 의도든 가문의 누군가가 자신에게 접촉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풍기는 분위기로 봤을 때.

상대는 호의적인 느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성준이 뒷짐을 지는 척하며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런 그의 주먹을 타고 푸른 마나가 일렁였다.

아무리 다쳤다고 한들. 그는 아카데미 내 상위권에 있던 학생.

제압까지는 모르겠지만 기습을 먹이고 도망칠 시간은 충분했다.

그대로 성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걸며 앞으로 다가갔다.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일단 천천히 이야기 하면서….”

그리고 주먹이 닿을 거리까지 도달했을 때.

성준이 냅다 주먹을 내지르며 외쳤다.

“생각해보자고!”

그렇게 성준의 주먹이 정체불명의 녀석에게 꽂히기 직전이었다.

-스르륵.

순간 형체가 흩어지는가 싶더니 단숨에 검은 손이 성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대로.

-콰직…!

살이 찢기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성준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카데미 상위권을 자랑하는 그가 채 반응하지도 못했다.

성준이 천천히 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주르륵.

자신의 복부를 관통한 검은 손.

그리고 그 손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

그제야 뒤늦은 고통이 성준의 몸을 찔렀다.

“끄극…커헉…!”

성준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도대체…누, 누가 보낸….”

허나 그 순간이었다.

허공에 은색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성준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털썩.

그리고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허망했다.

전혀 손을 쓸 수도 없는 압도적인 전력 차.

“….”

잠시 뒤.

정체불명의 그는 죽은 성준의 품에서 그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 그의 핸드폰 케이스 뒤에는 학생증이 꽂혀있었다.

-스윽.

이에 아무런 감흥 없이 학생증을 뽑아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증은 이정도면 충분하겠고. 이건…뭐 상관없나.”

그가 성준의 시체를 흘깃 바라보고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그의 발밑을 타고 삐져나온 그림자가 그대로 성준은 물론 그 아래 피까지 깔끔하게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가 손가락을 퉁겼다.

-따악.

뒤이어 그의 그림자를 타고 방금 전 성준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솟아져 나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야말로 성준과 똑같은 모습.

그때였다.

-움찔.

성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성준과 똑같은 모습을 한 무언가가 움직였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대로 정체불명의 그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 다음은 대충 가사상태 정도로 해두면 충분하겠군.”

그것은 일종의 대역이었다.

일이 귀찮아지지 않도록 세워두는 대역.

이는 바꿔 말하면 그 누구도 오늘 성준이 죽은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원인불명의 가사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일 터.

그리고 그가 손을 휘젓자 성준을 닮은 무언가가 비척비척 거리며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이에 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학생증을 매만졌다.

“그래. 모든 건 우리의 자유를 위해….”

정체불명의 그의 대사.

만약 이 자리에 현성이 있었다면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을 터였다.

‘본격적으로 <이스페리아>의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체불명의 그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스르륵.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야심한 새벽.

아무도 없는 산책로에는 짙은 어둠만이 깔려있을 뿐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