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전조(1)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빛이 걷혔을 때.
헌리스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현성의 눈앞에는 하나의 메시지 창이 떠있을 뿐이었다.
[헌리스의 축복을 받아 창의 봉인이 해제됩니다.]
이에 현성이 방금 전까지 창이 있던 제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시리도록 맑은 푸른빛을 토해내는 창 한 자루가 박혀있었다.
전과 같은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고고함 뿐.
“허어….”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헌리스의 영혼과의 상호작용.
그 보상은 다름 아닌 창에 걸린 봉인의 해제였다.
-터업.
곧바로 현성이 창을 쥐었다.
이제 봉인이 풀린 창의 진가를 확인할 시간이었다.
[얼음의 기사 헌리스의 창]
[등급 : 유니크]
설명 : 과거 얼음의 기사라고 불리던 헌리스가 쓰던 창. 그의 이명만큼이나 이 무기에는 방대한 얼음의 힘이 담겨있다. 헌리스의 축복이 함께하는 한 창에 깃든 얼음은 오로지 주인의 의지를 따라 무기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설명창을 전부 읽은 현성의 표정이 밝아졌다.
본디 봉인해제를 할 경우.
아이템의 등급은 그대로거나, 아주 낮은 확률로 능력치가 감소하는 패널티가 걸릴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봉인해제를 안할 수는 없는 노릇.’
허나 눈앞의 설명은 달랐다.
헌리스의 축복덕분일까.
레어에 불과하던 아이템의 등급이 한 단계 올라 유니크로 변했다.
거기다 자체 디버프 제거까지.
이건 한마디로.
‘…노 리스크 하이 리턴.’
그야말로 최상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현성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헌리스의 창을 뽑았다.
-파앗!
그러자 바닥에 박혀있던 푸른 창날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위로는 얼음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창대의 문양이 보였다.
그대로 현성이 가볍게 창을 내질렀다.
-피잇!
시리도록 푸른 창날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그 끝으로 얼음속성임을 드러내듯 한기가 아지랑이처럼 새어나왔다.
정말이지 저절로 모 드립의 대사가 떠오를 정도였다.
‘…이 서늘하고도 묵직한 감각.’
그와 함께 현성이 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보고 있습니까. 길동좌.”
무려 속성이 부여된 유니크 등급의 무기였다.
‘이 정도면….’
현성이 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불의 둥지 공략은 문제없었다.
거기다 벤시 퀸을 잡으면서 드랍된 마법서를 통해 습득한 얼음폭풍까지.
이번 얼음무덤으로 얻은 수확은 기대이상이었다.
그때였다.
“으음….”
뒤에서 하린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아무래도 잠에서 깨려는 듯 했다.
이에 현성이 헌리스의 창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재빨리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잠시 뒤.
하린이 막 잠에서 깬 듯 눈을 비볐다.
그런 그녀의 앞에는 현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하린이 반쯤 뜬 눈으로 현성을 바라봤다.
“…오빠?”
하린은 아직 눈앞의 현성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이에 잠시 고민하던 하린은 생각하는 걸 관두고 쓰러지듯 현성의 품에 포옥 안기며 웅얼거렸다.
“으응. 5분만 더….”
꿈치고는 폭신한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지만, 이미 잠에 취한 하린에게는 그런 걸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저 잠에 몸을 맡길 뿐.
품에 안긴 하린을 보고 현성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직 졸려?”
“….”
그 말에 다시 쓰러졌던 하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분명 현성 선배.
그대로 하린이 멍하니 현성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했다.
“…?”
하린이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현성과 자신을 번갈아보았다.
바로 앞에 있는 현성.
무엇보다 그 품에 안겨 있다시피 한 자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곧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움찔거리며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흐, 흐잇?!”
그런 하린은 마치 깜짝 놀란 토끼를 보는 듯 했다.
잠시 뒤.
하린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설마 그대로 잠들었나요?”
동시에 밀려오는 부끄러움.
던전에서 잠든 것도 모자라, 잠결에 어리광까지 부렸다.
덕분에 지금 하린의 귀는 어느새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흐아아아….”
하린이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응. 피곤하면 더 잘래?”
어차피 얼음무덤에서 얻을 건 다 얻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카데미에 돌아가는 것 뿐.
그리고 그 정도는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됐다.
“아, 아뇨! 괜찮아요!”
현성의 말에 하린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래?”
현성이 하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아픈 데는 없고?”
현성이 하린을 살피며 물었다.
아무리 그녀가 신성력을 타고났다고 한들.
그동안 신성력을 감춰왔던 터라 짧은 시간에 많은 신성력을 쓰느라 무리가 왔을 수도 있었다.
이에 하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벤시 퀸은….”
“덕분에 무사히 잡았어. 고마워.”
현성이 하린을 향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 다행이네요….”
물론 하린의 귀는 여전히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아무튼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부끄러움에 한참동안 머뭇거리던 하린이 조금 진정된 듯 현성을 향해 물었다.
“오빠. 벤시 퀸은 잡았다고 했죠?”
“응.”
“그럼 얼음무덤에서 필요하다고 했던 건 다 얻었나요?”
“아. 그거라면 다 얻었어.”
이미 마법서부터 헌리스의 창까지.
챙길 건 싸그리 다 챙겼다.
오히려 그의 예상보다 수확이 더 좋았다.
그런 현성의 대답에 하린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되는 건가요?”
그러자 현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더 안 자도 된다면?”
동시에 진정되었던 하린의 얼굴에 급속도로 붉어졌다.
그대로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안 졸려요.”
“응? 뭐라고?”
이에 하린이 덥썩 현성의 손을 잡으며 외쳤다.
“그, 그냥 빨리 아카데미로 돌아가자구요!”
그런 하린의 모습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돌아가야지.”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얼음무덤을 클리어 한 뒤.
아카데미로 돌아온 현성과 하린은 저마다 불의 둥지 진입을 앞두고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준비라고 해봐야 별 건 없었다.
어차피 공략의 중심이 되는 것들은 다 챙겨왔다.
거기다 현성은 얼음무덤에서 돌아오는 길에 빙결초까지 알뜰하게 챙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빙결초를 곱게 빻아 환 형태로 만들면 일정시간 약간의 화염저항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는 직접적으로 화염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낼 정도는 아니지만, 화산지형에서의 열기를 버티기에는 상당히 유용한 효과.
그리고 현성은 진즉에 아카데미에 돌아와 빙결환 제작을 끝내둔 상태.
그렇다면 이제 그가 할 일은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철커덩…철컹!
반복적인 운동 뿐.
얼음무덤에서 추가적인 마법도 배워왔겠다.
힘법사인 현성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최적으로 활용할 육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후우….”
어느새 한 세트를 마친 현성이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았다.
높은 의지 스텟 덕분일까.
운동을 하면 할수록 가속이 붙는 느낌이었다.
‘간만에 스텟이나 확인해볼까.’
그러면서 현성이 자신의 상태창을 펼쳤다.
[이름 : 유현성]
성별 : 남성
나이 : 17
종족 : 인간
클래스 : 힘의 마법사(physical wizard)
업적 : [데일런트를 쓰러트린], [폭풍의 창을 받아낸], [새로운 마도(魔道)의 길을 걷는], [신화를 거머쥔], [구식이 아니라 클래식], [새로운 주인공], [얼음무덤의 비밀을 알아낸]
체력 15
지력 14
민첩 13
행운 10
의지 15(+15)
*스킬상세
[파이어 펀치. LV3]
[얼음폭풍. LV1]
특수스킬
[투신의 길. LV2]
고유스킬
[게이머의 감각. MAX]
역시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나가 깃든다고.
그동안의 운동과 공개대련, 얼음무덤 공략이 쌓여 어느새 스텟이 꽤 늘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체력과 지력.
‘…나쁘지 않네.’
이대로만 간다면 힘법사 특유의 마법을 구사하는데도 훨씬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대로 현성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하린은 잘하고 있으려나?’
현성은 보다시피 매일 운동을 하고 있었고, 하린은 그의 조언에 따라 신성마법에 대한 지식을 쌓고 있었다.
마침 아카데미 도서관에서는 관련 서적이 많으니 이론적인 면에서는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유하린 : 오빠.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사진)
하린이 보낸 사진에는 도서관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책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책들은 당연하게도 전부 신성력에 관련한 서적들.
현성이 그녀가 보낸 사진을 훑어보고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유현성 : 응. 그 정도면 충분할거야. 그리고 4번째 책은 신성력보다는 마법학에 가까우니 참고해.
그렇게 답장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린의 답장이 도착했다.
유하린 : 네! 고마워요. 오빠
(인사하는 토끼 이모티콘)
그런 하린의 코톡을 보고 현성이 피식 웃었다.
하린은 그녀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에 현성 역시 질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다름 아닌 ‘배틀 시뮬레이션 룸.’
그곳은 바로 가상현실을 이용해 학생이 원하는 지형은 물론 원하는 몬스터와 무기들까지 설정한 채 모의전투를 할 수 있는 아카데미 내 최고의 시스템을 자랑하는 공간이었다.
그만큼 현성이 배틀 시뮬레이션 룸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불의 둥지에 들어가기에 앞서 몬스터의 패턴을 확인하기 위해서.’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가 알고 있는 패턴과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몇 번 간의 시뮬레이션 룸을 체험해본 결과.
현성은 확신할 수 있었다.
‘…몬스터의 패턴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똑같다.’
그 후로 현성은 감각을 익히기 위해 최근 며칠간은 계속 배틀 시뮬레이션 룸을 사용하고 있었다.
곧 현성이 그 안에 발을 내딛자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원하는 지형과 몬스터를 설정해주세요.]
이에 현성이 익숙한 듯 몸을 풀며 말했다.
“화산지형. 화염늑대”
[화산지형. 화염늑대 확인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현성이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주변의 환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스으으.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현성은 화산지형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내음.
[5초 뒤에 몬스터가 생성됩니다.]
[5…4…3…2…1]
곧 카운트가 끝나기 무섭게 현성 그의 앞으로 몬스터가 등장했다.
“크르르….”
마치 늑대를 연상케 하는 모습.
허나 불꽃이 타오르는 갈기와 날카로운 송곳니는 결코 보통 늑대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몬스터가 바로 불의 둥지에서 주로 출몰한다고 알려진 화염늑대였다.
그때였다.
-타앗!
화염늑대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현성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화염늑대가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오른쪽.’
현성이 최대한 간결하게 스텝을 밟으며 몸을 틀었다.
티리카의 보법을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지만 아직 그에 비하면 모자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늑대의 공격정도는 피하기에 충분했다.
“크르륵!”
이에 허공을 물어뜯은 화염늑대가 갈기를 털며 급속도로 방향을 틀었다.
‘이번에는 아래에서 위쪽.’
그러자 현성이 몸을 숙이고는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단숨에 늑대의 얼굴을 향해 어퍼컷을 박아 넣었다.
-퍼억!
그대로 쉬지 않고 현성이 다른 손으로 늑대의 복부를 향해 펀치를 꽂아 넣었다.
묵직한 타격음.
그 충격에 달려들던 화염늑대가 역으로 바닥을 굴렀다.
“깨갱!”
허나 그것도 잠시.
화염늑대가 재빨리 일어나, 다시 현성에게 달려들었다.
이에 현성은 속으로 타이밍을 재며 최소한의 스텝으로 공격을 피하기 시작했다.
‘왼쪽 상단. 물기. 그 다음은 화염 갈기. 돌아서 꼬리치기.’
이미 선천강에서 데일런트의 공격을 전부 피한 경력이 있는 현성이었다.
똑같이 패턴만 알고 있다면 화염늑대의 공격 정도는 그에게 있어서 식은 죽 먹기였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
‘…한 박자 쉬고. 오른쪽으로 할퀴기.’
제 3자가 보기에는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내는 현성의 모습은 그야말로 묘기에 가까웠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화염늑대는 계속해서 현성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는 공격을 피해내며 사이사이 주먹을 내질러 유효타를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화염늑대가 현성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직전.
현성이 짧게 숨을 고르고는 그대로 늑대의 턱주가리를 향해 뒤돌아 차기를 날렸다.
-콰앙!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완벽한 킥.
이에 늑대의 턱이 돌아가며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화염늑대의 시체가 사라지며 주변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배틀 시뮬레이션 종료. 기록을 등록하시겠습니까?]
[기록 : 1분 24초.]
이에 현성이 기록을 흘깃 바라보며 눈앞에 뜬 홀로그램 키보드를 두들겼다.
-타다닥.
그러자 가장 상위의 기록에 현성의 기록이 랭크되었다.
그리고 랭크된 현성의 이름은 다름 아닌 ASDF.
그가 이런 이름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건 ASDF가 국룰이지.’
별다른 뜻은 없이 키보드 배열 그대로 쓴 단어지만, 현성은 항상 기록을 랭크할 때마다 이 닉네임을 애용하곤 했다.
아무튼 그렇게 전투를 마친 현성이 배틀 시뮬레이션 룸을 나왔다.
이걸로 오늘 운동은 끝.
그렇게 그가 트레이닝 룸을 나서려는 찰나.
현성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말했다.
“…하시연?”
그것은 다름 아닌 하시연.
아무래도 그녀 역시 트레이닝 룸에 가려는 모양이었다.
이에 현성을 발견한 시연이 입을 열었다.
“아. 반갑습니….”
그 순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경어로 부르려던 시연이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뒤.
시연이 큰 결심을 한 듯 심호흡을 하며 현성에게 말했다.
“트, 트레이닝 룸에서 나오는 거야?”
그리 말하는 시연은 반말이 영 익숙하지 않은 듯.
어딘가 약간 부끄러워 보였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