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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35화 (35/240)

035화 얼음무덤(7)

그 폭발을 시작으로 분위기는 점차 현성 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아무리 벤시 퀸이 까다로운 몬스터라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유령형 몬스터이자 정신계 공격을 날리기 때문.

그리고 이에 대한 모든 대비를 끝낸 현성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포식패턴으로 아무리 속박을 걸었다고 해도 현성은 보란 듯이 단시간에 속박을 풀어냈다.

심지어는 그 텀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었다.

벌써 현성은 벤시 퀸의 전투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겉으로는 틀림없는 물리공격으로 보이지만, 마법 데미지가 들어가는 기상천외한 공격까지.

물론 그때마다 벤시 퀸은 한기를 몸에 둘러 화염을 꺼트렸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든 충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현성은 꾸준하게 벤시 퀸에게 데미지를 축적하고 있었다.

“후우….”

현성이 작게 심호흡을 하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페이스도 적당히 유지하고 있고, 체력과 마나 역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2페이즈가 시작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현성 그의 대비와 피지컬로 승기를 잡고 있지만 2페이즈가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상황이 달라질 게 분명했다.

2페이즈에 들어가면 달라지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첫 번째.

벤시 퀸의 얼음속성치가 크게 상승하며 그에 따라 얼음공격을 난사한다.

그 중에서도 벤시 퀸의 필살기 얼음폭풍은 접근조차 힘들며 데미지 역시 상당했다.

‘아무리 내가 화염마법을 쓴다고 해도 지금 위력으로는 얼음폭풍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

기존의 포식패턴이 빙의패턴으로 바뀐다.

이게 가장 짜증나는 점이었다.

그러면서 현성이 과거 얼음무덤에서 벤시 퀸을 잡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진짜 모니터 박살낼 뻔했지.’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랬다.

오죽하면 이 빙의패턴이 유저 투표 <이스페리아>에서 가장 짜증나는 기술 1위를 차지했겠는가.

이 기술은 말 그대로 벤시 퀸이 플레이어를 포함한 다른 등장인물에게 빙의하는 형태였다.

즉 여기서 빙의패턴에 걸릴 경우.

캐릭터는 자유의지를 잃고 아군을 공격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히로인을 죽일 수도 있고, 반대로 히로인이 나를 죽일 수도 있다.’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음무덤이 개방되는 시점을 고려했을 때.

만약 공격하나 잘못 걸리는 날에는 그대로 요단강을 건너게 된다.

동시에 이게 바로 현성이 하린을 두고 혼자 보스룸에 들어온 이유였다.

‘자칫 잘못해서 하린이 죽을 경우 최악의 사태가 따로 없다.’

아무리 50퍼센트의 확률이라고 해도 너무 위험했다.

한마디로 지옥의 눈치게임.

실제로 과거의 현성 역시 빙의패턴에 걸리는 바람에 하린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한 하시연의 검에 사망한 경우가 있었다.

몰아치는 검격 속,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피통.

‘…아군일 때는 한없이 든든했던 하시연이 적군일 때는 그렇게 무섭더라고.’

현성이 그때를 회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이런 이유 때문에 현성은 승기를 잡은 이 순간마저도 방심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그가 벤시 퀸에게 입힌 데미지를 계산해 봤을 때.

곧 2페이즈가 시작될 터였다.

‘아무리 못해도 3번의 공방 안에 2페이즈에 돌입한다.’

물론 이게 게임이었다면 지금쯤 맨 위에 벤시 퀸의 피통이 보였을 터.

하지만 게임 속에 빙의한 그에게 그런 사치는 허락되지 않았다.

즉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성 그의 감.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그의 감은 거의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현성이 한창 <이스페리아>에서 미친 짓을 벌이고 다닐 당시.

그가 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시스템 UI를 전부 끄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자신은 물론 몬스터의 체력 역시 확인할 수 없으며, 정확한 데미지 수치조차 확인할 수 없다.

허나 현성은 그걸 또 해냈다.

심지어 나중에는 눈감고 사운드 플레이만으로도 보스를 잡은 적 있었다.

그야말로 고이다 못해 썩은 물이라고 불릴만한 실력.

그리고 잠시 뒤.

현성이 다시 벤시 퀸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앗!

그대로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다가 현성의 첫 번째 공격이 들어갔다.

그 다음은 두 번째, 이어서 마지막 세 번째 공격을 내질렀을 때.

벤시 퀸이 크게 휘청거리며 머리에 쓰고 있던 티아라가 갈라졌다.

-쩌저적!

동시에 현성이 미간을 좁히며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금이 간 티아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2페이즈의 시작!’

곧 벤시 퀸의 티아라가 완전히 박살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함께 벤시 퀸이 돌연 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그녀의 비명은 얼음궁전 전체를 울릴 정도였다.

[꺄아아아악!!]

그리고 벤시 퀸의 주변으로 생성되는 날카로운 얼음파편.

그대로 그녀가 손을 한 번 휙 휘젓자, 날카로운 얼음파편들이 단숨에 현성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 모습은 마치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암기가 쏟아지는 듯 했다

-촤자자작!!

비처럼 내리는 얼음파편.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맞으면 위험하다!’

이에 현성이 황급히 뒤로 도약하며 쓰러진 기둥 아래로 몸을 숨겼다.

곧 현성이 기둥 아래로 몸을 숨기기 무섭게 수백 개의 암기가 몰아쳤다.

방금 전만 해도 현성이 서있던 자리에는 길쭉한 얼음송곳이 빽빽하게 박혀있었다.

이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얼음송곳과 벤시 퀸을 번갈아보았다.

‘…살벌하다. 살벌해.’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얼음궁전 내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안 그래도 폐허를 연상케 하는 곳에 사방에서 거대한 고드름이 떨어지고, 얼음폭풍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런 난장판 속.

현성은 그야말로 재난영화의 한 장면을 4D로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동시에 그의 바로 옆에 있던 얼음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어째 예전보다 더욱 더 과격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왜! 어째서 네놈의 몸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냐!!]

벤시 퀸이 울분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바로 도저히 현성 그에게 빙의패턴이 먹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실 좀 더 정확히는 걸림과 동시에 현성이 이를 풀어낸다는 게 맞았지만 분노에 가득 찬 벤시 퀸에게는 그런 사실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거 꼬우면 좀 더 잘해보던가.”

현성이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이, 이런 건방진!!]

2페이즈로 들어오면서 그녀의 포식 패턴이 빙의로 진화하였다.

하지만 빙의패턴은 같은 정신계 공격인 만큼 어디까지나 포식의 일장선상에 있었다.

그리고 이미 포식패턴에 익숙해진 현성에게 있어 빙의패턴을 푸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즉 그의 의지 스텟이 내려가지 않는 이상.

빙의패턴은 막힌 것이나 마찬가지.

물론 그렇다고 그저 안심할 수는 없었다.

[죽어! 죽어…!]

빙의가 먹히지 않는 만큼.

화가 난 벤시 퀸은 그만큼 얼음공격을 무자비하게 난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지금 현성은 공격을 제대로 날릴 틈도 없이 그녀의 공격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때였다.

-고오오오!

벤시 퀸의 양손을 타고 심상치 않은 한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괴성과 함께 현성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

거센 얼음폭풍이 그에게 쏘아졌다.

-콰아아아!!

이에 현성이 재빨리 반대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덕분에 공격은 직접적으로 맞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얼음폭풍의 충격에 기둥과 벽을 포함한 주변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와르르!

동시에 그 파편이 쏟아져 내리며 자욱한 먼지와 한기가 뒤섞였다.

그대로 잠시 뒤.

먼지가 걷혔을 때. 현성은 문을 뒤에 두고 꼼짝없이 갇힌 모양새가 되었다.

“….”

양옆은 이미 파편으로 꽉 막혀있었다.

무엇보다 눈앞에는 벤시 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이에 벤시 퀸이 입 꼬리가 쭈욱 찢어졌다.

[이제…도망갈 구석은 없다.]

그러자 현성이 벤시 퀸과 문을 번갈아보았다.

점점 다가오는 벤시 퀸.

그 모습에 현성이 뒤에 있던 문을 발로 찼다.

-콰앙!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문이 열릴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보스 룸에 들어온 이상.

보스를 죽이기 전까지는 안쪽에서 문을 열수가 없었다.

그런 현성을 보고 벤시 퀸의 입을 타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삐져나왔다.

[끼히히히…도망갈 생각이었나? 허나 어림도 없다!]

그대로 벤시 퀸이 현성을 향해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돌연 현성의 뒤에 있던 문이 열리면서 하린이 뛰쳐나왔다.

안에서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

그러나 그 반대는 예외였다.

“오빠!”

그와 동시에 순간 벤시 퀸의 눈이 번뜩였다.

갑작스레 난입한 소녀.

이에 벤시 퀸이 히죽 웃으며 달려들었다.

[네놈대신 이 계집에게 빙의해주마!!]

지금까지의 경험상.

현성에게는 빙의가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들어온 소녀는 달랐다.

그리고 소녀에게만 빙의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모든 게 벤시 퀸 그녀의 계획대로였다.

실제로 이는 벤시 퀸의 시스템 알고리즘이기도 했다.

빙의가 통하지 않는 현성과 방금 난입한 하린.

이런 경우에는 현성대신 하린이 공격대상 0순위로 바뀌게 된다.

그대로 벤시 퀸이 입을 쩌억 벌려 하린을 집어삼켰다.

-콰직!

그 순간이었다.

벤시 퀸의 형태가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하린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하린의 몸이 덜컥! 정지했다.

그리고 잠시 뒤.

[낄낄….]

하린, 그러니까 벤시 퀸이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그런 하린의 입을 타고 불길한 웃음소리가 삐져나왔다.

드디어!

마침내 빙의에 성공했다.

[아아,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살아있는 육체인가. 게다가 이 젊고 아름다운 외모.]

하린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황홀한 듯 중얼거렸다.

그래, 이게 진즉에 이렇게 됐어야했다.

빙의가 먹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게 정상이었다.

그대로 하린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네놈이 있었지.]

그러면서 하린이 손을 펼치자, 그녀의 손을 타고 얼음결정이 모여들며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하린이 그 검을 매만지며 히죽 웃었다.

[어떠냐? 과연 네놈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얼음의 창을 휘두르던 용맹한 기사마저도 생사를 같이한 동료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껏 그녀에게 도전한 모든 인간들이 그랬다.

제 아무리 잘난 기사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응? 대답해 보거라.]

그들은 차마 자신들의 동료, 연인들의 몸에 빙의한 벤시 퀸을 쉽사리 공격할 수 없었다.

인간이라는 것들은 쓸데없이 정이 깊은 게 문제였다.

이건 눈앞의 현성이라 할지라도 똑같을 터.

-덜덜.

실제로 현성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역시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대로 현성이 입을 열었다.

“살려….”

[하하! 그래, 좀 더 목숨을 구걸해 보거라!]

“살려….”

그때였다.

현성이 히죽 웃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살려달라고 빌어봐.”

그렇다,

덜덜 떨리는 현성의 손은 공포 때문이 아닌 그의 계획이 먹혔다는 쾌감 때문이었다.

[…?]

전혀 예상치 못한 말.

이에 벤시 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그런 벤시 퀸을 향해 현성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제 슬슬 효과가 올 거야.”

그 순간이었다.

-찌릿!

온 몸을 타고 지금껏 그녀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이 느껴졌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무엇보다 눈앞의 현성의 미소.

동시에 벤시 퀸이 심장을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커헉! 이, 이건….]

머지않아 그녀는 고통의 근원지를 알 수 있었다.

그 근원지는 다름 아닌 빙의한 소녀의 몸 그 자체.

그리고 온 몸이 불타오르는 것 같은 이 느낌.

유령인 그녀와는 상극인 그것이 분명했다.

[신성력…!]

이를 보고 현성이 작게 미소 지었다.

하린은 다름 아닌 성녀의 운명을 타고난 캐릭터.

그만큼 그녀의 몸 안에는 방대한 신성력이 가득했으며, 이건 아무리 벤시 퀸이라도 버틸 수 없었다.

‘즉 지금 하린의 몸에 빙의한 벤시 퀸은 극독을 마신 것이나 마찬가지.’

바로 이게 현성 그가 벤시 퀸의 공략을 위해 노린 마지막 수였다.

일부러 뒤에 있는 문을 보란 듯이 발로 찬 것도.

뒤이어 하린이 달려온 것도.

모든 게 그의 계획대로였다.

[아파…아프다고…!!]

벤시 퀸이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몸속의 신성력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서서히 새어나오는 밝은 빛이 그 증거.

[아, 안 돼…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벤시 퀸이 현성을 향해 기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현성에게 닿기 직전이었다.

하린의 몸을 타고 밝은 빛기둥이 솟구치며 방대한 신성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파아아앗!!

그와 동시에 하린의 몸을 타고 벤시 퀸의 형상이 일렁였다.

벤시 퀸이 하린의 몸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도보다 신성력이 그녀를 태우는 속도가 더 빨랐다.

-화르륵!

신성의 불꽃이 한 치의 자비도 없이 벤시 퀸을 심판했다.

이에 벤시 퀸이 찢어진 입을 쩌억 벌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악!!]

그러나 이미 그녀의 몸의 절반은 불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성의 불꽃이 그녀의 비명소리마저 집어삼켰을 때.

벤시 퀸이 형상이 완전히 사라지며 주변의 한기가 깔끔하게 사라졌다.

주변에는 오직 신성의 불씨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 사이. 하린의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스르륵.

곧 현성이 재빨리 그런 그녀의 몸을 안았다.

그때였다.

띠링! 하는 알림음과 함께 그의 앞으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얼음 궁전의 벤시 퀸을 쓰러트렸습니다.]

[던전 최초 클리어의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안긴 하린을 바라보았다.

누가 뭐래도 이번 클리어의 핵심은 다름 아닌 하린 그녀였다.

“…수고했어.”

그렇게 클리어를 끝낸 얼음무덤.

그곳에는 곤히 잠든 하린의 숨소리가 작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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