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얼음무덤(5)
그런 하린의 말에 현성이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나?”
주먹에 십자가를 쥐고 때리냐니.
듣고 보니 그것 참 신기한 발상이었다.
동시에 <이스페리아>의 고인물인 현성을 자극하는 뭔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진짜 가능할지도?’
다른 건 몰라도 하린이라면 뭔가 가능성이 보이는 느낌이도 했다.
무려 성녀가 될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성녀를 신성계열 인파이터로 키운다면?
예상외로 신선한(?) 조합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현성이 하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중에 한 번 시도해볼까?’
하지만 그도 잠시.
우선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건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현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뭉크도 아니고.”
“….”
그대로 현성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했다.
“난 보다시피 마법사야.”
그런 현성의 답변에 하린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마법사가 저렇게 싸웠던가?
하린 그녀의 상식으로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마법사치고 운동도 엄청 열심히 하던 거 같던데.’
그런데 뭐 본인 입으로 저렇게 당당하게 마법사라고 하니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잠시 뒤.
하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러다 나중에는 스태프로 때리면서 싸우는 거 아니야?”
이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응? 무슨 말 했어?”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린이 손 사레를 치며 얼버무렸다.
그래. 뭐 마법사가 근력운동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럼 아무튼 몬스터도 전부 다 잡았으니 계속 가보죠.”
“아. 그래. 잠시만….”
그러자 현성이 주변을 확인하고는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가자.”
* * * * *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얼음이 가득한 얼음무덤 안.
그곳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한두 번씩 나오던 갈림길이 이제는 3갈래, 4갈래로 늘어나고 있었다.
마치 개미굴을 연상케 하는 구조.
그리고 현성은 그런 얼음무덤을 훤히 꿰고 있는 듯 망설임 없이 앞장섰다.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었다.
몬스터가 나올 때는 귀신같이 미리 경고를 하지 않나.
위험한 지형은 전부 파훼하며 가지 않나.
물론 그중에서 제일 신기한 건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탐사속도.’
던전에서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탐사 중간 중간에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이는 하린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배운 기초중의 기초지식이었다.
하지만 현성은 얼음무덤에 들어오고 나서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
그런 현성의 모습에 하린은 약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쉬지 않고 탐사를 진행할 경우.
그만큼 클리어속도는 빠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위험해질 요소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탐사가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우려하던 문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정한 전투주기.’
얼음무덤에서 전투는 신기하게도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었다.
한 번 전투가 끝나면 충분히 체력이 회복될 때까지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체력이 회복되면 두 번째 전투가 시작되었다.
처음 한 두 번은 그저 우연인 줄 알았지만 반복될수록 확실해졌다.
마치 원활한 전투를 위해 짠 것만 같은 주기.
하지만 그렇다고 몬스터들이 침입자를 배려하여 그렇게 등장할 리가 없었다.
그럼 나오는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오빠가 전투주기를 조절하고 있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던전에서 전투주기를 조절한다니.
그건 전문 던전 탐사자도 어려운 일이었으며, 심지어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눈앞의 현성은 거의 예측을 넘어선 그야말로 예지를 하는 수준.
당장 지금도 그랬다.
“이번에는 여기 3번째 길로 가자.”
현성이 오른쪽으로 난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에 궁금증을 참다못한 하린이 앞서가던 현성을 향해 말했다.
“오빠. 정말 여기 처음 와본 거 맞아요?”
“…뭐?”
그러자 현성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길을 다 알고 있어요? 너무 신기해요.”
“아. 그거? 별거 아닌데…궁금해?”
그런 현성의 질문에 하린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반짝였다.
“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하린의 활기찬 대답.
그대로 현성이 하린을 바라보았다.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금발의 소녀.
그런 하린의 모습은 그야말로 병아리 그 자체였다.
그 모습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 이거 보이지?”
그러면서 현성이 주변에 나있는 빙결초를 가리켰다.
빙결초.
얼음지형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식물로 푸른 잎사귀가 특징이었다.
이에 하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이건…빙결초잖아요.”
하린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빙결초는 앞의 특징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쓰임새도, 효과도 없는 식물이었다.
그런 만큼 하린은 현성이 갑자기 왜 빙결초를 가리키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리고 이걸로 얼음무덤의 구조랑 몬스터의 출몰구역을 예측할 수 있거든.”
그런 현성의 말에 하린이 멍하니 그와 빙결초를 번갈아보았다.
“…네? 이걸로요?”
빙결초로 던전의 구조와 몬스터의 출몰구역을 예측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심지어는 식물학 강의에서도, 책에서도 본 적 없었다.
“응. 빙결초는 얼음지형에 자라는 만큼 태양, 그러니까 빛에 엄청 민감하거든. 그래서 주로 빙결초는 태양이 들지 않고 냉기가 심한 곳일수록 잘 자라.
그 후 이어진 현성의 말은 이러했다.
”그리고 언데드는 주로 빛을 피해 들어가는 습성이 있으니까 빙결초가 없거나 적게 자란 방향은 몬스터가 없을 확률이 커. 거기다 얼음 던전의 보스는 그중에서도 냉기가 가장 강한 중심에 있으니까 그만큼 빙결초가 집중되어 있겠지.”
그대로 현성이 빙결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빙결초의 포화도. 위치만 알고 있다면 대략적인 던전의 구조는 알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게…가능해요?”
그런 현성의 말에 하린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물었다.
그러자 현성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보다시피?”
“세상에….”
설명을 들어도 믿기 힘든 말이었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식물의 생태를 알고 있음은 물론.
빙결초의 포화도와 위치를 전부 기억하고 계산해야 했다.
그런데 그걸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계산을 끝내고 길을 찾다니.
방법을 알아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대로 하린이 현성을 바라보았다.
‘…대단해.’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린 그녀가 현성을 처음 만났을 때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지금껏 현성의 말과 행동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했다.
그리고 그런 하린의 속마음을 모르는 현성은 빙결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거 몰랐을 때는 꽤나 헤맸었지.’
얼음무덤은 찾는 조건도 조건이었지만, 그보다 극악인 게 바로 길 찾기였다.
구조는 무슨 개미굴처럼 드럽게 복잡하지.
거기다 등장하는 몬스터는 좀비와 스펙터가 주를 이룬다.
백번 양보해서 좀비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스펙터는 예외였다.
‘괜히 검 하나 믿고 들어갔다가는 정신계 공격에 당하고 리타이어.’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얼음무덤을 원활하게 클리어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3가지였다.
1. 레플리카의 호감도를 최대로 올려 정보 얻기.
2. 언데드는 물론 정신계 공격에 대비하기.
3. 빙결초를 통해 길 찾기.
그리고 이걸 몰랐을 때는 정말이지 지옥이 따로 없었다.
방법을 모르니 어쩌겠나.
몸으로 부딪혀보는 수밖에.
그러다가 보스 몬스터의 털끝하나 못보고 죽은 게 몇 번이던가.
‘…아. 추억 돋네.’
하지만 현성은 <이스페리아>의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별명이 붙은 만큼.
온갖 사소한 정보까지 다 외우며 끊임없이 부딪친 결과.
최초로 얼음무덤을 클리어 하는데 성공했다.
그야말로 인간승리.
그리고 지금.
그런 현성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어때? 막상 듣고 보니 쉽지?”
현성이 하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는 그렇게 어려웠는데, 지금은 이렇게 별거 아닌 난이도였다.
이런 걸 보면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이 이해가되었다.
그러자 그녀가 멋쩍은 미소와 함께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대로 하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건 방법을 알아도 오빠 밖에 못할 걸요.”
막상 듣고 보니 쉽다니.
그건 어디까지나 현성 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만약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포기했을 터.
현성의 행동은 그야말로 고인물만이 할 수 있는 기행이었다.
하지만 그걸 도무지 알 리 없는 현성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현성이 아쉬운 듯 하린과 빙결초를 번갈아보았다.
‘꽤 쉬운데….’
그렇다.
그의 뇌는 이미 지옥불 난이도에 절여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썩은 물.
그게 바로 현성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얼음무덤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간단한 팁(?)을 알려준 현성이 앞을 흘깃 바라봤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앞으로 두 세 번의 전투만 더하면 곧 보스 몬스터를 만날 수 있다.
이에 현성이 하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끝까지 가보자.”
* * * *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현성 그의 예상대로 2번째 전투를 끝냈을 때.
그가 눈앞의 갈림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갈림길의 오른쪽에는 무성하게 피어있는 빙결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포화도.
그 모습에 하린이 입을 열었다.
“오빠. 이건….”
동시에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빙결초가 많이 있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한가지였다.
보스 몬스터가 코앞에 있다.
“맞아. 보스 룸이야.”
그대로 현성과 하린이 오른쪽 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한기가 강해졌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 걸었을까.
-멈칫.
앞서가던 현성이 발을 멈추었다.
그런 현성의 앞에는 커다란 얼음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얼음 문 겉에 조각된 저 문양과 어지럽게 나있는 흉터.
그것은 분명 병장기로 인해 난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그런 문의 흔적은 과거 현성이 얼음무덤에서 봤던 모습과 똑같았다.
이에 하린이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오빠. 전 준비됐어요.”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문 앞에 선 현성이 하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린아. 지금부터는 나 혼자 들어갈게.”
“네?”
그런 현성의 말에 하린이 움찔거렸다.
그도 잠시.
하린이 현성을 바라보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시, 싫어요!”
여기까지 와서 혼자 들어가겠다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다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하린이 주먹을 꾹 쥐었다.
어떻게 만난 사이인데 만나자마자 헤어질 수는 없었다.
이에 현성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게 아니라. 나한테 계획이 있거든.”
그대로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어때. 들어볼래?”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