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주인공(2)
-멈칫.
하린의 말과 동시에 현성이 미간을 좁혔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방금 전 하린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잠깐. 만약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평생 고마워하라고 했을 거라고?’
그리고 이 말은 곧 현재 그녀의 오빠가 죽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이에 현성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하린을 향해 되물었다.
“…오빠가 있었어?”
하린 그녀에게 오빠가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현성에게 중요한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하린의 오빠이자, <이스페리아>의 주인공, 유진의 생사.
그런 현성의 말에 하린이 자신의 펜던트를 매만지며 말했다.
“네, 2년 전에 사고로…이젠 더 이상 볼 수 없지만요.”
그러면서 하린이 펜던트를 꾹 눌러 현성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달칵! 하고 펜던트가 열리며 밝게 웃고 있는 하린과 그녀를 쓰다듬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하린과 같은 눈부신 금발에 푸른 눈동자.
그 얼굴은 현성이 기억하고 있는 유진의 얼굴과 일치했다.
그대로 하린이 현성과 자신의 오빠 사진을 번갈아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오빠의 마지막 사진이에요. 만약 저희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딱 비슷한 나이일 텐데.”
그런 하린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슬픔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참…주책이네요. 원래 이러지 않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이런 말이 다 나오네요.”
실제로 하린은 아무한테나 가족사를 말하고 다니는 헤픈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성 그의 앞에서 서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선천강에서 그가 말했던 오빠의 말버릇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자신을 구해줬기 때문일까.
그녀 스스로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자꾸만, 자꾸만 현성에게서 오빠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마치 선천강에서 자신을 구했을 때와 같이 말이다.
동시에 그럴수록 현성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거 설마.’
현성이 하린을 바라보며 턱을 매만졌다.
뭔가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꼭 데일런트와 성준을 상대했을 때와 같은 느낌.’
그리고 그 위화감은 전에도 말했듯이 보통 <이스페리아>에서는 극적인 연출위해 인위적으로 집어넣은 요소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플레이어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
지금 눈앞의 하린에게서 그 위화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에 현성의 머릿속이 전에 없던 것처럼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왜? 하린에게서 그 위화감이?’
지금껏 위화감이 발동한 상황은 주로 데일런트나 성준과 같이 상대방의 일격이 담긴 필살기를 쓸 경우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하린과는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경우의 수는 하나였다.
‘무언가 극적인 연출 혹은 이벤트가 벌어질 경우.’
그것 말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게 왜 하필 지금 발동했을까.
별안간 하린이 아무리 자기를 구해줬다고한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족사를 푼다?
거기다 그녀 스스로도 이에 의문을 품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은 꼭 내가 주인공이라도 된 거 같잖아.’
그 순간이었다.
현성의 눈앞에 불투명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업적달성 : 새로운 주인공]
[계속되는 위화감을 감지하여 새로운 감각이 깨어납니다.]
[고유스킬 : 게이머의 본능을 습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시겠습니까?]
[Y/N]
동시에 현성이 눈매를 좁혔다.
고유스킬 : 게이머의 본능이라니.
지금껏 <이스페리아>를 플레이하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스킬이었다.
혹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모르는 스킬이 있다고 넘어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성은 단언할 수 있었다.
‘…<이스페리아>에 저런 스킬은 없다.’
그렇다면 눈앞의 스킬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에 현성이 빨간색으로 반짝이는 [Y/N]창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Y를 선택했다.
그때였다.
-촤르륵!
푸른빛이 터져 나오며 그의 눈앞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고유스킬 : 게이머의 본능]
설명 : 주인공, 플레이어를 포함한 통칭 ‘게이머’에게만 주어지는 고유스킬. 특정상황에서 위화감을 감지하여 위기를 미리 알 수 있거나, 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다.
*본 스킬은 오직 ‘유현성’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렇게 된 거군.’
그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갑작스런 하린의 대화.
그리고 고유스킬 : 게이머의 본능.
무엇보다 방금 전의 스킬설명에 따르면 본 스킬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주인공, 플레이어를 포함한 통칭 ‘게이머’에게만 주어지는 고유스킬이라고.
그렇다면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내가 주인공이 되었다.’
보통 게임은 주인공 위주로 전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 그러니까 플레이어에게만 발생하는 이벤트들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학교를 등교하던 중, 골목길에서 히로인과 부딪힌다거나.
꼭 주인공이 있는 반에 히로인이 전학 온다거나.
즉 클리셰.
그리고 방금 현성이 겪은 위화감의 정체가 바로 이 클리셰였다.
‘…어째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다 했더니만 그게 그 신호일 줄이야.’
<이스페리아>는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아카데미물.
그만큼 게임 속에는 하시연을 비롯한 여러 히로인이 존재하고, 주인공은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결점을 만들고 히로인들을 공략하게 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방금 유하린 그녀 스스로조차 자각하지 못한 ‘가족사 이야기’는 주인공과 유하린 사이에 연결점을 만들어내려는 이벤트였던 것이다.
동시에 현성이 찬찬히 그동안 하린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생명을 구한 은인, 오빠와 같은 말버릇, 운명처럼 아카데미에서 만난 둘.’
현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야말로 완벽한 주인공과 히로인 사이의 정석 중에서도 정석이었다.
이쯤 되면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자 하린이 그런 현성을 보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응? 아냐, 아무것도. 별거 아니야.”
하린의 물음에 현성이 애써 웃음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었다.
왜 주인공이 안 나오나 했더니 그게 알고 보니 본인이었을 뿐이다.
‘X발, 이럴 거면 초반 스텟도 주인공이랑 똑같이 주던가. 쓰레기 같은 게임 같으니라고.’
현성이 스쳐지나가는 과거의 기억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할 일은 크게 안 바뀐다.’
어차피 최악의 엔딩을 막기 위해서는 유하린을 구해야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다.
물론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의외였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달라진 건 크게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성이 해야 할 일 역시 정해져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든 모든 걸 활용해 해피엔딩에 다다르는 것.’
그리고 그가 누군가.
이미 수백, 수천 번 <이스페리아>를 플레이한 고인물 중의 고인물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현성은 주인공이라는 기회를 허투루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그 사실이 현성의 의지를 좀 더 강하게 만들었다.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만든다.’
그가 가진 모든 지식, 능력, 피지컬이라면 가능했다.
그대로 현성이 하린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소개가 늦었네. 우선 내 이름은 유현성. 아카데미 3학년생이야.”
그리고 우선 그 첫 시작은 유하린과 관계를 쌓는 것.
해피엔딩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주연급 등장인물들을 육성시켜야했다.
이에 하린 역시 현성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아. 전 유하린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아카데미에 입학한 신입생입니다.”
그러면서 하린이 현성을 바라보았다.
유현성.
사실 하린이 현성을 다시 만난 것을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몰랐겠지만 하린은 그전에 현성을 알아봤다.
‘…역시 대련에서 잘못 본 게 아니었어.’
그건 바로 공개 대련.
비록 관중석에서 본 게 전부였지만, 처음 그를 다시 봤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설마 선천강에서 자신을 구해준 그 사람이 아카데미 생이었다니.
게다가 그 전투는 어땠고.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역시 선천강에서 자신 대신 나선 이유가 있었다.
하린이 그때의 대련을 떠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대련. 잘 봤어요.”
그러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아뇨. 제가 더 고맙죠. 만약 선천강 때 선배님이 아니라 제가 남았다면 피해가 더 컸을걸요.”
그런 하린의 말에 현성이 멋쩍게 웃어넘겼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현성 역시 그 나름대로 정말이지 죽을 뻔 했었다.
만약 하시연이 없었다면 데일런트 공략을 불가능했을 터.
선천강 때는 하린을 살리는 게 급선무라 그녀를 먼저 보냈던 거지.
단순 스텟만 본다면 하린이 당시 현성보다 훨씬 강했다.
그런데 그랬던 현성이 지금은 하린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평균 3따리 시절에서 이젠 평균 스텟 10의 힘법사라니.’
정말이지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그렇게 현성이 감회에 젖어있을 때였다.
“유하린!!”
저 멀리서 여학생들이 하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그녀가 보이지 않아 찾으러 온 친구들 같았다.
“아니 얘는 갑자기 어딜 간 거야….”
그런 외침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제 가봐야 될 거 같네.”
“네? 하지만 아직 못한 이야기들이….”
하린이 그녀의 친구들과 현성을 번갈아봤다.
기껏 생명의 은인을 다시 만났는데 이대로 헤어지다니.
하린은 이때만큼은 그녀의 친구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현성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괜찮아.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있을 거야. 같은 아카데미잖아?”
“흐음….”
그래도 하린은 뭔가 아쉬운지 잠깐 고민하다가 뭔가 생각난 듯 싱긋 웃으며 현성을 향해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그럼 저 번호라도 알려주세요.”
아직 못 다 한 말이 너무 많았다.
오늘은 이상하게 말하지 못했지만 나중에라도 꼭 물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자꾸만 그에게서 자신의 오빠가 겹쳐 보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번호?”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번호라니. 마침 잘됐다.
해피엔딩을 위해서 유하린은 필수적인 존재.
안 그래도 조만간 다시 만나러 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다가온다면 현성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좋았다.
곧바로 현성이 자신의 번호를 찍고, 하린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줬다.
“자, 여기.”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린의 친구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어? 찾았다!”
“야! 유하린 계속 너 찾았잖아!”
이에 현성이 한발 먼저 물러나며 하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가볼게.”
“아, 네!”
그대로 하린이 스마트폰을 꾹 쥐고는 배시시 웃었다.
“그럼 나중에 먼저 연락할게요. 선배님.”
그리고 선배님이라는 말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에 보자.”
유하린과의 짧은 재회는 이정도면 충분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성이 가고.
머지않아 그녀의 친구들이 현성이 사라진 방향과 하린을 번갈아보았다.
“…누구야? 아는 사람?”
“아. 전에 잠깐 봤던 사람이야.”
“근데 너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
그런 친구의 말에 하린 역시 현성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있어. 그런 게.”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