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주인공(1)
그렇게 청화길드의 화연이 급히 떠난 뒤.
현성과 수연은 아카데미 내 카페에서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주로 수연이 현성의 아카데미 생활을 걱정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잠자리는 괜찮죠? 밥은 매끼 먹고 다니고.”
“글쎄. 그렇다니까.”
계속되는 수연의 걱정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시설만 두고 보면 집보다 훨씬 나을 지경이었다.
수연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걱정스런 마음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현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카데미는 걱정할거 없어. 이번 대련도 그랬잖아.”
실제로 현성은 이번 대련으로 인해 아카데미에서 직면하게 될 가장 급한 문제들은 해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선 가장 걱정되었던 퇴학.
그리고 아카데미 내 괴롭힘과 더불어 성준의 고백차단까지.
이로써 당분간은 현성의 아카데미 생활에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걱정 안 해도 돼.”
현성이 커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수연의 대답에 현성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현성은 그저 맘 편하게 웃을 수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확실히 지금 당장은 문제없겠지만….’
문제는 이 평화가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당장 2막 보스는 물론 <이스페리아>에서 완벽한 해피엔딩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치워야할 지뢰들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는 현성이 마족에게 몸을 빼앗겨 보스로 전락하는 미래 역시 배제할 수 없었다.
아무리 현성이 퇴학을 막아내고, 주인공과 척을 지지 않는다고 해도 마족이 그의 몸을 빼앗는 것은 별개였다.
이에 현성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수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원래 <이스페리아>의 미래대로라면 현성은 마족에게 몸을 빼앗긴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수연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현성의 머릿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이스페리아>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을 모두 알고 있음은 물론 그들의 배경과 설정까지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수연은 예외였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수연은 게임을 플레이 할 동안 단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캐릭터니까.’
그나마 현성 같은 경우는 비중이 적긴 해도 등장하기라도 했을지언정 수연은 그야말로 완벽한 엑스트라.
지금까지 유일하게 현성 그가 모르는 캐릭터.
그게 바로 눈앞의 수연이었다.
그리고 만약 현성이 알고 있는 수연이라면 자신이 아끼는 도련님이 마족에게 몸을 빼앗기는 와중에 이를 가만히 두고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현성이 천천히 턱을 매만졌다.
‘…그게 아니면 나를 구하려다 역으로 수연 역시 마족에게 당했다거나.’
그래서 원작에 수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을 수도 있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동시에 현성이 작게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주연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대로 수연이 죽는 미래는 보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그때였다.
수연이 현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련님? 왜 그러세요?”
그러면서 수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현성의 얼굴을 살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혹시나 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죠?”
수연이 그대로 자신의 오른손을 현성의 이마에 갖다 댔다.
이에 그녀의 소매안쪽이 드러나며 팔에 난 흉터가 잠깐 보였다.
손목부터 팔목까지 이어진 긴 흉터.
보통 흉터는 아닌 듯 했다.
곧 현성이 수연의 팔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그 흉터는?”
그런 현성의 말에 수연이 순간 흠칫거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수연이 소매를 내려 자신의 팔에 난 흉터를 가렸다.
“…과거 불의의 사고로 인해 난 상처입니다. 부끄럽네요.”
그리고 수연이 현성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기쁘네요.”
“…기쁘다니?”
“도련님이 절 걱정해주셨잖아요.”
그런 그녀의 말에 현성이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수연.
<이스페리아> 원작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은 엑스트라.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 관한 건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현성이 수연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을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대로 죽게 내버려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는 거.’
이는 빙의하기 전 현성이라는 캐릭터의 영향일지.
그게 아니면 단순히 그의 마음인지는 몰라도 수연이 죽는 건 싫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고 치기에는 그동안 현성은 이미 알게 모르게 수연과 가까워져 있었다.
‘하긴 빙의하고 나서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까지 쭉 같이 지냈는데 당연한 건가.’
그리고 어차피 마족이 찾아올 미래라면 현성 그 역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두 눈 버젓이 뜨고 있는데 순순히 마족에게 몸을 빼앗겨?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곧 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수연 너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해줘.”
“후훗, 도련님도 다 컸네요.”
그런 수연의 말에 현성이 헛웃음을 지었다.
마족이든 뭐든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야 했다.
‘…갈 길이 멀구만.’
현성이 마저 남은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이제 슬슬 가야될 시간이지?”
“어머. 벌써 시간이….”
곧 수연 역시 시계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쉽지만 이제 들어가 봐야 할 시간이네요.”
수연은 어디까지나 현성을 위해 잠시 시간을 낸 것 뿐.
언제까지 아카데미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현성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가볼까?”
“그래야죠. 아, 도련님은 이대로 기숙사로 돌아가시나요?”
그런 수연의 말에 현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남은 대련이나 좀 보고 들어가려고.”
“그런가요? 하긴 명색의 아카데미 대련인데 축제는 즐길 수 있을 때 많이 즐겨두는 게 좋긴 하죠.”
그러면서 수연이 현성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제 몫까지 많이 즐겨주세요.”
“물론이지.”
현성이 피식 웃으며 수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문까지 배웅 해줄게.”
“어머. 영광이네요.”
현성의 말에 수연이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대로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히 아카데미 카페를 벗어났다.
* * * * *
그렇게 수연을 마중하고 나서 다시 돌아온 아카데미 대련장.
대련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위쪽에 마련된 관중석에는 어느새 교장을 포함한 다른 교수들이 앉아있었다.
아마 이틀 전, 그가 던지고 온 학교폭력에 대한 토론은 끝난 모양이었다.
이에 대한 결과는 대련이 끝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터.
당장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 신경 쓸 일은 따로 있지.’
그러면서 현성이 전광판에 떠오른 대련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주인공의 대련.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제 곧 <이스페리아>의 주인공, 유진의 대련이 시작될 때였다.
그리고 현성 그가 유진의 대련을 보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주인공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한다.’
앞으로 <이스페리아>를 진행하면서 주인공은 수많은 보스를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현성 그가 개입함으로써 데일런트와 주인공의 여동생 유하린을 구해냈지만, 그렇다고 모든 미래가 평화롭기 풀릴 리가 없었다.
그가 알고 있던 이스페리아라면 무조건 그랬다.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망테크 한 번 타면 그대로 나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주인공의 실력을 확인해둬야 그에 대한 육성법이라거나 여러 가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전광판에는 유진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보군.’
그대로 현성이 관중석 안쪽으로 들어온 순간이었다.
저 멀리 누군가가 현성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당신은…!”
이에 현성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상대방을 확인한 현성 역시 눈을 좁혔다.
“너는….”
익숙한 금발.
그리고 작중 주인공 유진과 똑 닮은 푸른색 눈동자.
그녀는 다름 아닌.
‘…유하린?’
주인공의 여동생. 유하린이었다.
동시에 누가 말리기도 전에 그녀가 현성을 향해 달려갔다.
그대로 곧장 하린이 현성의 손을 잡고 외쳤다.
“당신…그때 그 사람 맞죠!”
그런 하린의 외침에 주변의 시선이 온통 이쪽으로 쏠렸다.
“잠깐 저거…유현성 아니야?”
“어? 진짜네?”
그리고 주변의 관중들이 하나 둘씩 현성의 얼굴을 알아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에 현성이 본능적으로 피곤한 상황이 일어날 것을 직감하고 곧바로 하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잠시 나가서 이야기할까?”
“네?”
그런 현성의 말에 하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주변상황을 알아차린 그녀가 움찔거리며 주변의 사람들과 현성을 번갈아보았다.
“…저, 저때문인가요?”
“아니. 굳이 말하자면 나 때문일걸.”
그대로 현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동시에 현성이 하린을 끌고 재빠르게 관중석을 벗어났다.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인적이 드문 대련장 뒤쪽.
현성이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하린의 손을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설마 대련 한 번 했다고 그렇게 이목이 집중될 줄이야.
그리고 그런 현성이 숨을 돌리는 사이.
하린이 그를 바라보며 머뭇거리다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그…죄송해요!”
하린의 사과에 현성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라고 이럴 줄 알았을까.
“아냐. 괜찮아.”
하지만 현성의 말에도 불구하고 하린은 여전히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낼 듯 말 듯 망설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선천강에서 이후로는 처음이지?”
“아. 그럼 역시 그때 그 분이 맞군요!”
하린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대로 그녀가 현성을 향해 다시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요. 만약 그때 당신이 아니었다면….”
하린이 말끝을 흐리며 주먹을 꾹 쥐었다.
만약 그때 현성이 아니었으면 하린은 가차 없이 데일런트에게 살해당했을 터.
그야말로 하린에게 있어 현성은 말 그대로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만큼 지금 그녀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곧 현성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대답했다.
“너도 무사하니 다행이네.”
그런 현성의 말에 하린이 약간 긴장이 풀린 듯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그대로 그녀가 고개를 올려 현성을 바라보고는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다시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진짜 많았는데 막상 만나니까 고맙다는 말 말고는 아무 것도 안 떠오르네요….”
하린이 그렇게 말하며 현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선천강에서의 일이 있던 날
뒤늦게 그녀는 뉴스를 통해 그 후의 일을 접했다.
선천강에 나타난 데일런트.
그리고 이를 격파한 하시연과 정체불명의 남성.
하린 역시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그의 신상에 관한 건 단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그저 당시 그의 모습에서 오빠의 모습이 겹쳐보였다는 것 뿐.
‘후회는 항상 늦잖아.’
그때 그가 했던 말이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하린의 귓가에 맴돌았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동시에 너무나도 그리웠던 말이었다.
왜냐하면.
“…만약 저희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평생 고마워하라고 했을걸요.”
유하린, 그녀의 오빠는 이미 2년 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