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고인물의 육성법(8)
현성의 말에 시연이 턱을 괸 채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잠시 뒤.
시연이 뭔가 생각난 듯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그거라면 옛날에 쓰던 건물에 남아있는 걸로 기억해요.”
과거 아카데미 초창기에 쓰던 낡은 건물.
시연은 그곳에서 분명 구식 훈련장을 봤던 걸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옛날의 이야기.
지금 그 건물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도 그럴게 노후화된 시설에다 배틀 시뮬레이션 같은 기술도 전혀 없었다.
즉 지금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굳이 좋은 시설을 두고 그런 구식을 쓸 이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그곳으로 안내해줄래?”
그런데 눈앞의 현성은 오히려 그런 훈련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시연이 머뭇거리며 재차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혹시 부담스러워서 그러는 거라면 상관없어요. 여긴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모두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현성은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었다.
“아냐. 정말 필요해서 그래. 난 그게 훨씬 낫거든.”
그게 훨씬 낫다니.
간혹 자신의 가문의 어르신들이 허수아비를 고집하는 걸 종종 보기는 했다.
손맛이 다르다나 뭐라나.
하지만 자신 또래인 학생이 이런 말을 하다니.
이건 그야말로 처음 보는 경우였다.
거기다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정말 부담스러워서 이러는 거 같지는 않았다.
일관된 현성의 말에 결국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따라와요. 안내해줄게요.”
“고마워.”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트레이닝 룸이 있던 신관에서 꽤나 동떨어져있는 건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구식 훈련장.
그곳에는 현성이 말한 허수아비들이 여기저기 서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탓일까.
훈련장의 내부는 물론 허수아비 위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있었다.
이에 시연이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그냥 신관에서 하는 게 어때요?”
그러나 시연의 말과는 달리 현성의 얼굴에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가 보였다.
“그래. 이거지.”
심지어는 좋아한다.
그것도 상당히.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시연은 순간 어릴 적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최신 훈련장보다 구식 훈련장이 더 좋다고 하던 어르신들.
요새 나오는 보급형 검보다는 손에 익은 옛날 검이 낫다던 어르신들.
도심보다는 본가가 있는 한옥이 더 편하다는 어르신들.
배틀 시뮬레이션 룸보다 먼지 쌓인 허수아비를 보고 좋아하는 현성에게서 왠지 모르게 가문의 어르신들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래도 시연은 만족스러워하는 현성의 모습을 보고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사용하려면 우선 청소부터 해야 할 거 같은데 어때요?”
“응. 그래야겠지.”
“좋아요. 그럼….”
그의 말에 시연이 먼저 교복 외투를 벗으려 들었다.
이에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청소 도와주게?”
“네. 아무래도 한 명 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시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우우웅!
그녀의 외투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이 울렸다.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이에 시연이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네, 하시연입니다.”
그대로 그녀는 통화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통화가 길어질수록 시연의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네. 그렇군요. 지금 당장 말입니까? 네.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났을 때.
시연의 얼굴에서 방금 전 옅은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차가운 무표정.
시연은 다시 항상 짓던 그 표정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 있어?”
현성이 시연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외투를 입었다.
“네. 가문에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시연의 시선은 여전히 구식 훈련장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는 미처 같이 하지 못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시연이 현성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청소라도 같이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겠군요.”
진심이 섞인 사과.
이에 현성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청소는 혼자 해도 충분해.”
그러면서 현성이 시연을 향해 말했다.
“급한 일이라고 했지? 먼저 가봐.”
그 말에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쥐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구식 훈련장에 있는 물품들은 편하게 사용하셔도 됩니다. 그럼…전 가보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연이 등을 돌렸다.
그렇게 시연이 떠나고 혼자 남은 구식 훈련장.
현성이 훈련장에 있는 허수아비들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차라리 좋았다.
어차피 오늘은 하루 종일 이곳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가 외투를 벗으며 팔을 풀기 시작했다.
“자, 그럼 우선 청소부터 해볼까.”
* * * * *
그대로 1시간 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구식 훈련장의 모든 청소를 끝낸 현성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후우….”
현성이 이마에 땀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1시간 전 먼지가 잔뜩 쌓여있던 훈련장은 말끔하게 변해있었다.
다만 오랫동안 보낸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듯.
훈련장 이곳저곳과 훈련용 허수아비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겨져있었다.
하지만 현성은 오히려 더욱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허수아비 앞으로 걸어갔다.
무엇보다 그가 멀쩡한 신식 훈련장을 두고 허수아비가 있는 구식 훈련장을 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것만큼 스텟을 올리기 좋은 게 없거든.’
그 이유는 바로 빠른 시간 내에 스텟을 올리기 위해서.
당장 그는 아카데미의 생존과 더불어, 퇴학도 피해야한다.
‘거기다 무엇보다도 오늘 이성준과 엮이면서 잡힌 공개대련.’
성준이 공개대련에서 현성을 지목한다면 결과는 뻔했다.
그의 스텟은 평균 3따리.
아무리 현성 그가 힘법사로 전직했다고 해도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공개대련에서 지게 된다면 앞으로 펼쳐질 아카데미 생활은 그야말로 지옥.’
그렇기 때문에 현성은 지금 어떻게든 단시간 내에 스텟을 끌어올려 성준을 꺾어야 했다.
그렇다면 스텟은 어떻게 올리는가.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이스페리아>의 시스템을 알아야한다.
보통 <이스페리아>에서 스텟을 올리는 법은 총 2가지가 있다.
첫 번째. 각 스텟에 맞는 반복행동을 통해 스텟을 올리는 법.
그리고 두 번째. 기연이나 아이템을 통해 스텟 상승을 노리는 법.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 방법으로 스텟을 올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당장 체력 스텟 1을 올리기 위해서는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야했다.
거기다 체력 스텟만이라면 모를까.
현성은 모든 스텟을 못해도 10까지는 올려야했다.
왜?
‘…못해도 그 정도는 돼야 승산이 있으니까.’
아무리 성준이 쓰레기 같은 인성의 보유자라 하더라도 그는 아카데미의 엘리트.
그만큼 그의 전투실력 역시 아카데미에서 상위권이었다.
그런 그를 현성이 이기기 위해서는 평균 스텟 10정도는 찍어야 싸워볼 만 했다.
그런 면에서 첫 번째 방법으로 모든 스텟을 10까지 올리기는 건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공교롭게도 두 번째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현성 그는 <이스페리아>의 고인물인만큼 게임 내 기연의 위치쯤은 알고 있다.
허나 지금 그의 스텟으로는 기연을 꿈꾸는 건 말도 안됐다.
아마 기연 근처에도 가기 전에 몬스터에게 사지가 찢기든, 절벽에 떨어져 죽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이템 역시 마찬가지’.
보통 강한 몬스터를 잡아야 좋은 아이템이 드랍되는데 겨우 파이어 펀치 두 대 때리고 몸져눕는 쓰레기 같은 스텟으로는 몬스터를 잡을 수도 없다.
거기다 지금 시점에서 공략 가능한 몬스터는 제로.
데일런트도 별별 생고생을 해서 잡은 마당에 다른 몬스터는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았다.
‘그럼 스텟을 올릴 방법이 없느냐.’
물론 보통의 경우라면 그랬다.
허나 현성 그가 누군가.
보통이라는 수식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친놈.
<이스페리아>의 고이다 못해 썩은 물.
<이스페리아>의 망령.
그렇기에 현성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훈련용 허수아비.
<이스페리아>에는 허수아비라는 구조물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효과는 타격이 가능하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무슨 짓을 해도 데미지는 1밖에 박히지 않으며, 그 외 효과는 전무(全無).’
정말 말 그대로 훈련용 허수아비 그 자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유저들은 허수아비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왜?
허수아비를 때릴 시간에 다른 몬스터를 때려잡는 게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성은 달랐다.
‘<이스페리아>의 npc 허풍쟁이 크로엘.’
그는 게임 속 흔한 npc들 중 하나로, 그 이름만큼 말을 걸때마다 왕년에 자기가 드래곤을 잡았다는 둥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떨고 다니는 개그성 캐릭터였다.
심지어 말을 걸 때마다 그 래퍼토리가 달라진다.
그러나 한창 <이스페리아>의 새로운 컨텐츠를 찾아다니던 현성은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크로엘의 허풍 중 진짜는 없을까?’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이에 현성은 크로엘이 말한 모든 허풍을 적어두고, 그 이야기를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밤 12시가 되면 서쪽에 있는 기사 동상이 움직인다는 것부터 별별 소문들까지.
거기다 그 소문들 중에는 특정 스토리가 지난 후에는 확인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아예 캐릭터를 튜토리얼부터 새로 키운 적도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현성은 크로엘의 허풍 속 ‘진짜’를 찾아낼 수 있었다.
‘훈련용 허수아비를 계속해서 치면 몸에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에는 단순히 거짓말인줄 알았다.
그야 100번을 쳐도, 200번을 쳐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가 허수아비를 1000번 가격했을 때.
현성의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힘 스텟이 1오릅니다.]
엄청난 발견이었다.
이에 현성은 계속해서 허수아비를 가격했고 그는 머지않아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바로 같은 허수아비를 1000번 가격하면 5개의 스텟 중 하나를 랜덤하게 1 올려준다는 사실.
‘크로엘이 말한 몸의 변화는 바로 스텟의 성장.’
그리고 그 효과는 딱 스텟 10까지.
이 말은 즉 모든 스텟을 10까지 가장 빨리 올릴 수 있는 방법이 ‘허수아비 1000번 때리기’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현성 그가 신식 훈련장을 놔두고 굳이 구식 훈련장을 찾은 이유.
“후우….”
그대로 현성이 심호흡을 하며 자세를 잡았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스텟을 올릴 시간이었다.
동시에 그가 허수아비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퍼억!!
현성의 주먹에 허수아비가 흔들렸다.
이제 1번.
그리고 스텟이 오를 때까지 남은 횟수는 이제 999번.
그렇게 그의 끝나지 않는 수련이 시작되었다.
* * * * *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아카데미 정문 앞.
리무진의 문이 열리고 거기서 시연이 내렸다.
곧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 대여섯이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시연님.”
이에 시연 역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짧게 인사했다.
“네. 다들 수고하셨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연이 아카데미 정문을 지나쳤다.
벌써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
가문에서의 일을 끝내고 온 아카데미에는 깊은 밤이 찾아왔다.
이에 그녀가 지친 몸을 끌고 자신의 기숙사로 향했다.
“하아….”
시연은 당장에라도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만큼 가문의 일은 힘들었다.
특히 오늘은 더더욱 힘든 느낌이었다.
그리고 시연이 자신의 기숙사 건물로 향하던 중.
-멈칫.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름 아닌 시연의 발이 멈춘 곳은 구식 훈련장이 있는 건물.
문득 그녀는 현성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을 떠올렸다.
훈련용 허수아비를 바라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그의 표정.
“흐음.”
동시에 시연은 궁금해졌다.
과연 구식 훈련장의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족스럽게 했던 것일까.
그러면서 그녀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기숙사가 아닌 구식 훈련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지금 이 시간이면 현성 그도 자러 갔을 터.
시연은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도착한 구식 훈련장.
-퍼억…퍼억! 퍼억! 퍼억!
그곳에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에 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소리는?”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자리를 비운지 못해도 8시간은 훌쩍 넘었다.
현성이 지금 시간까지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잠시 뒤.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한 시연이 눈을 좁혔다.
“설마 했는데….”
그곳에는 현성이 맨손으로 연신 허수아비를 가격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며, 계속해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허나 그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퍼억! 퍼억! 퍼억!
마치 기계 같은 타격음.
시연이 그런 현성을 아무 말 없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못해도 8시간.
그가 허수아비를 친 시간이었다.
물론 시연 역시 그만큼 검을 잡아본 적 있었다.
그렇지만 현성은 겉보기에도 병약해 보이는 사람.
게다가 지금 그의 몸은 이미 체력적 한계가 찾아온 것 같았다.
당장 흘린 땀과 후들거리는 팔만 봐도 그랬다.
허나 현성은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시연은 그런 현성을 말리려다 그대로 손을 멈췄다.
-멈칫.
과연 지금 그를 멈추는 게 맞을까.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렸다.
현성의 눈은 아직 살아있었다.
지금 그를 멈추는 건 오히려 현성을 욕보이는 일이었다.
결국 시연은 그런 그를 뒤로하고 조용히, 방해되지 않게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혹시나 싶어 다시 훈련장을 찾아간 시연은 그야말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