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11화 (11/240)

011화 고인물의 육성법(5)

아카데미 대강당.

마치 올림픽 홀을 연상케 하는 그곳에는 아카데미의 교수진을 포함한 전 학년의 학생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거기다 아카데미 입구에 있던 기자들부터 유명 인사들까지.

온 좌석을 꽉 채운 그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그런 장관 아래.

대강당에서는 한창 교장을 필두로 한 형식적인 개학식과 연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현성은 수많은 학생 가운데에서 턱을 괸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시계를 슬쩍 바라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끝나려면 못해도 1시간은 더 남았군.’

그런 그의 눈은 흡사 죽어있는 물고기의 눈동자와도 같았다.

그도 그럴만한 게 벌써 아카데미 입학식이 진행된 지 무려 4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교장의 연설만 무려 3시간이 넘었음에도 지친기색 하나 없이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체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탄스러운 체력과는 별개로 학생들은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리에 않아 교장의 연설을 듣는 게 전부.

“으어어어….”

현성의 주변에서 좀비와도 같은 울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 근원지는 다름 아닌 그와 같은 아카데미의 학생들.

그들 역시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교장의 연설에 적지 않은 피로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나 둘씩 인간성을 잃어가는 학생들을 보자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허허….”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강당은 시간이 멈춘 곳이오, 교장의 연설은 고위 정신계 저주마법의 뺨을 칠 정도였다.

이건 현성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게임에서는 컷신으로 넘어갔으니까.’

그가 <이스페리아>를 플레이 할 당시.

본 장면은 경쾌한 브금과 함께 컷신 몇 개를 주르륵 보여주고 끝났다.

덕분에 클릭 몇 번이면 넘어갈 수 있었으나, 그가 빙의한 이곳은 현실.

‘편하게 클릭 몇 번으로 넘어갈 리가 없지.’

아무리 그가 <이스페리아>의 고인물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그야말로 현성 그가 지금껏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한 변수.

그것이 바로 지금 교장의 정신공격에 가까운 연설이었다.

“죽…여줘….”

현성 옆에 있던 학생이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교장이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연설을 끝냈다.

“자, 그럼 연설은 이정도로 마치고….”

이에 반쯤 죽어있던 몇몇 학생들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드, 드디어 끝…!”

하지만 현성은 그런 그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교장의 연설이 끝난 건 맞았지만, 공교롭게도 현성을 포함한 학생들은 그 후로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순서는.

“오늘의 주인공들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신입생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교장의 외침과 동시에 대강당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와아아아아!!”

신입생들의 입장을 축하하는 사람들과.

“으어어어어….”

끝나지 않는 입학식을 저주하는 학생들.

허나 어쩔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번 입학식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신입생.

이미 중고가 되어버린 위의 학년들에게 입학식을 즐길 자유 따위는 보장되지 않았다.

그 참극에 이미 반쯤 포기한 현성이 혀를 차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저 애는?”

대강당으로 들어오는 신입생 사이.

익숙한 금발을 발견한 현성이 눈을 좁혔다.

현성의 자리와 아래까지는 꽤나 거리가 되었지만, 그에게 그녀를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다름 아닌 유하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스페리아>의 주인공인 유진의 여동생이자, 현성이 튜토리얼에서 구해낸 등장인물.

그런 그녀를 여기서 다 보다니.

하린이 무사히 아카데미 입학식에서 모습을 보였다면 우선 최악의 엔딩은 막았다는 뜻.

현성이 감회가 새로운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감회에 빠져있는 사이, 이번 년도 신입생들이 모두 대강당에 들어왔다.

이에 교장이 다시 마이크를 잡고, 현성이 줄곧 닫혀있는 커튼을 바라봤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다음 순서는 분명.

“그럼 신입생들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현성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작게 웃었다.

‘학생회장의 인사.’

곧 교장이 손을 펼치며 입을 열었다.

“학생회장의 인사가 있겠습니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동시에 교장의 뒤에 있던 커튼이 열리며, 그 사이에서 한 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까지 오는 긴 흑발과 특유의 차가운 인상.

바로 하시연이었다.

정말이지 컷신에서만 봤던 장면을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보다니.

현성이 자신도 모르게 옅게 미소 지었다.

“반갑습니다. 아카데미의 학생회장. 하시연이라고 합니다.”

하시연, 검술가문 하 가문의 자식이자 아카데미의 학생회장.

거기다 얼마 전 발생한 ‘선천강 사건’에서 데일런트를 격파한 주인공.

그녀의 등장에 박수와 쉴 틈 없는 카메라 셔터세례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축 처져있던 학생들마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학생들도 흔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아. 언제 봐도 아름다우셔….”

“정말이지 모든 걸 다 가지셨지.”

“하지만 나 선천 이씨 32대 손, 나 이제학은 못 가졌…!”

“아, 닥치고 비켜봐!! 안보이잖아!”

그야말로 아카데미 내 최고의 인기.

하긴 가문이면 가문, 외모면 외모, 실력이면 실력, 어느 하나 빠질 곳 없는 그녀를 미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실제로 작 중 하시연을 연모하는 학생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등장 덕분에 지루했던 입학식의 분위기는 단숨에 달아올랐다.

* * *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달아오른 분위기 속, 아카데미의 입학식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신입생을 제외한 나머지 학년들은 각자 안내에 따라 앞으로 자신들이 생활한 건물로 이동했다.

그 중 현성은 현재 3학년인 만큼.

3학년 건물에 도착해 사전에 배정받은 기숙사에 모든 짐을 풀고 이제야 숨을 돌렸다.

“후우.”

짐을 모두 정리한 현성이 방을 둘러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급 호텔을 연상케 하는 방과 침구.

그리고 그 외 여러 생활가구까지.

오히려 현성 그의 집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작 중 아카데미는 온갖 유명가문출신의 자식은 물론 장차 미래를 이끌어나갈 인재들을 양성하는 곳.

그만큼 아카데미는 규모도 규모지만, 그 시설들 역시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 기숙사만 해도 그랬다.

고급 호텔 뺨칠 정도의 방에다 심지어 1인 1기숙사.

물론 현성 그가 게임을 즐길 때만해도 이런 설정은 별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지만 이렇게 직접 몸으로 느껴보니 그 느낌이 남달랐다.

‘…앞으로 이런 시설을 전부 쓸 수 있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또 막상 좋아할 수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아카데미는 그만큼 비싼 등록금을 자랑한다는 뜻.

그리고 현재 화려한 F를 자랑하며 퇴학위기에 처한 현성입장에서는 비싼 돈 내고 아카데미에서 쫒아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살아남기는커녕 당장 수연 앞에서 얼굴 들기도 쪽팔렸다.

이에 현성이 주먹을 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는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그대로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숙사를 나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아카데미 일정을 사전에 알아보는 게 중요했다.

혹시 만에 하나라도 그가 알고 있는 정보와는 다르지 않은지.

앞으로 계획을 어떻게 설계해나가야 할지.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잠시 뒤.

현성이 3학년 건물을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자판기 앞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저마다 음료수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성과 같은 교복에 같은 명찰의 색깔.

아마 아카데미의 3학년생, 그러니까 그와 동급생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현성이 그런 그들을 지나쳐 가려는 찰나였다.

“어? 야야, 저거 걔 아니냐?”

그 중 하나가 옆에 있던 친구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에 무리의 가장 가운데 있던 녀석이 현성을 향해 흘깃 고개를 돌렸고.

동시에 그가 현성을 알아보자마자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성아!!”

그가 반갑게 현성의 이름을 외쳤다.

그 소리에 현성이 발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렸다.

현성이 그가 누군지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갈색머리에 보기 좋은 가르마 펌.

거기다 안경까지.

그야말로 누가 봐도 스타일 좋고, 사람 좋아 보이는 화사한 미소까지.

이름이 분명.

“…이성준?”

그대로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성준.

<이스페리아>에 등장하는 메인캐릭터 중 하나로 주인공 유진이 아카데미 입학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주인공의 경우.

현성이 그를 마주치는 건 예외였다.

‘…저놈이 왜 여기에?’

물론 현성이 기억하기로는 이성준 그 역시 자신과 같은 3학년생.

지금 그와 마주치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조합은 적어도 현성의 계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 사람 좋은 미소.

저게 의미하는 바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우선 첫 번째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천사의 미소.

‘그리고 두 번째는….’

동시에 뭔가 현성을 향해 날아왔다.

-쉬이익!

그건 다름 아닌 성준의 손에 들려있던 먹다 남긴 음료수 캔.

이에 현성이 재빨리 고개를 틀어 날아오는 캔을 피했다.

그러자 캔이 애꿎은 바닥을 구르며 그 아래로 남은 음료수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순간이었다.

“오, 피했어?”

짧은 한마디와 함께 성준의 몸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사라졌다고 착각할 정도로 빨리 움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현성의 바로 코앞이었다.

그대로 성준이 그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럼 이것도 피해봐!”

그렇게 성준의 주먹이 현성의 얼굴에 꽂히기 직전.

현성이 황급히 팔을 들어 가드를 올렸다.

그야말로 게이머의 반사적인 감각이었다.

-콰아아앙!

아카데미의 복도.

성준과 현성 사이에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갑작스런 상황.

그러나 현성은 미간을 구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성준.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오는 두 번째 경우는 오직 상대방을 괴롭힐 때 뿐.

덕분에 현성은 그의 행동을 보란 듯이 예측하고 막아낼 수 있었다.

“…호오?”

그 모습에 성준이 작은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성이 자신의 주먹을 막은 게 놀라웠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게 현성의 현재 스텟은 평균 3.

상식적으로 현성이 그의 주먹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성준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바로 현재 현성이 무려 신화급 아이템 ‘기사왕 티리카의 건틀렛’을 착용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

즉 눈앞에 있는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해도 겨우 아카데미 생이 대충 날린 주먹에 타격을 입을 리가 없었다.

이에 현성은 뒤로 밀려난 게 전부.

별다른 데미지는 전혀 없었다.

“우리 현성이 많이 컸네?”

성준이 현성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런 그의 미소는 더 이상 화사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괴롭힐 때 드러나는 악마의 미소.

거기다 목 아래 드문드문 보이는 문신.

그의 말에 현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런 현성의 말투에서는 극도의 피곤함과 귀찮음이 뒤섞여 있었다.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성준과 엮이다니.

차라리 그냥 양아치면 몰랐을까.

지금 그와 엮인 건 절대 좋지 않았다.

“유현성. 그동안 잘 지냈냐?”

그대로 성준이 현성을 향해 고개를 까딱 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답해야지? 뭣도 없는 거지새끼야.”

왜냐하면.

이성준. 그가 바로.

<이스페리아>의 1부 메인 악역이기 때문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