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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1화 (1/240)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001화 낯선 천장

낯선 천장이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낯선 천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침착하게 몸을 일으켰다.

“….”

침대에서 일어난 소년은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을 정리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방.

-끼익.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난 소년은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안에는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흑발의 소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

거울 속의 소년은 얼핏 보면 수척해보였지만, 기본적으로 미형인 얼굴 때문일까.

단순히 아파보인다기 보다는 병약한 미소년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소년은 그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볼 때마다 적응 안 되네.”

소년이 머리를 긁적이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이름 : 유현성]

성별 : 남성

나이 : 17

종족 : 인간

클래스 : 없음

업적 : 없음

체력 3

지력 4

민첩 3

행운 2

의지 3

*스킬상세

마치 게임 속 상태창을 연상케 하는 능력치.

거기다 5를 넘어가는 능력치가 없는 처참한 스텟.

이제는 슬슬 받아들일 때가 왔다.

그가 미친 건지, 세상이 미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

그것도 그가 제일 잘 알고 있는 게임 <이스페리아> 안으로 말이다.

그때였다.

“도련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소년은 후우-심호흡을 하고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응, 들어와.”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하얀 머리의 메이드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메이드의 머리위로는 npc임을 알려주는 표시와 함께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름 : 이수연]

성별 : 여성

나이 : 29

종족 : 인간

직업 : ??

업적 : [마스터 메이드], [중급 마법사], [메이드의 품격], [유 가문의 메이드 장]

*현재 대상과의 능력치 차이가 너무 심해 상세내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메이드의 이름은 이수연, 현재 유씨 집안을 모시는 유일한 메이드였다.

그리고 그녀의 한 손에는 하얀 김을 폴폴 피어내는 따뜻한 스프가 들려있었다.

“도련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만약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면 지금이라도….”

“아냐, 괜찮아.”

수연의 말에 소년은 재빨리 대답했다.

이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허나 그렇게 말하는 수연의 눈은 말과는 다르게 근심이 가득했다.

물론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눈앞의 도련님은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어나자마자 괴성을 내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지 않나, 지금껏 그를 돌봐왔던 자신의 멱살을 부여잡고 여긴 어디냐고 소리치지 않나.

그야말로 하루아침사이에 정신이 나가버린 것처럼 난리를 쳤다.

이에 그녀는 우선 팔을 꺾어 미친 도련님을 제압하고, 곧바로 병원으로 보냈다.

그 와중에도 도련님은 발광을 하며 본인은 정상임을 어필했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정신이상자 그 자체였다.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진짜 괜찮아.”

곧 그런 수연의 눈빛을 알아챈 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병원에서도 일시적인 일이라고 잠시 안정만 취한다면 아무런 문제없다고 했잖아.”

소년은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을 걱정하는 그녀를 능숙하게 안심시켰다.

이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아침밥은 여기 놓고 갈 테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응. 고마워.”

그런 그의 대답에 수연은 한결 마음이 놓인 듯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그대로 수연이 방문을 닫고, 그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완전히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도련님이라 불린 그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공허한 눈빛으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X됐네.”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

침대 위의 소년이 허망하게 읊조렸다.

그의 이름은 이진성. 아니 이제는 ‘유현성’이라는 이름으로, 게임 속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되어가는 표류자였다.

* * * * *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이 현실에서 그토록 즐겨하던, 아니 인생을 갈아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임 <이스페리아> 안의 등장인물로 빙의했다는 것을.

그리고 빙의한 인물의 이름은 바로 ‘유현성.’

“하필 빙의한 게 왜 이딴….”

침대 위의 소년, 현성은 자신이 왜 하필 많고 많은 등장인물 중 ‘유현성’으로 빙의했는지 중얼거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는 작 중 유현성을 안다면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없었다.

‘유현성. 게임 <이스페리아> 초반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흔히 주인공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참교육 당하는 삼류 악역.’

거기다 집안이라도 좋으면 모르겠으나, 현실은 이름만 있을 뿐인 몰락가문출신.

운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하다못해 조연이라면 모를까 삼류 악역이라니.

“게임할 때도 운이 안 좋더니, 여기서까지도 이러기냐….”

이진성, 아니 이제는 유현성으로 살아가야할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스페리아>는 겉으로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아카데미물이지만, 그 안은 게이트와 던전 따위를 더불어 온갖 몬스터가 출몰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능력자들이 있는 현대 판타지 세계관.

이를 바꿔 말하면 일반인의 경우, 끽하면 머리가 콩나물대가리처럼 똑 따일 수 있는 세계관이라는 뜻이었다.

무엇보다도 불친절하다 못해 악의가 느껴질 정도의 진행방식.

이런 세계관에서 극 초반 주인공에게 털리는 삼류 악역의 말로가 좋을 리 없었다.

‘실제로 작 중 유현성은 초반에 광탈하고, 중후반부에 보스로 재등장.’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물론 중후반부 보스로 등장한다는 면에서 본다면 유현성의 운명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유현성이 중후반부 보스로 등장하는 건 사실이나, 이 과정에서 크나큰 하자가 존재하기 때문.’

그것은 바로 마족에게 몸을 빼앗긴 채 등장한다는 사실이었다.

즉 정리하자면 인간 ‘유현성’은 이 시점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며, 그마저도 주인공의 검에 머리가 잘리는 처참한 말로를 맞이한다.

“…젠장.”

현성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시 생각해도 욕이 나오지 않을래야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허나 그도 잠시.

“물론 그렇다고….”

그가 주먹을 꾹 쥐며 중얼거렸다.

“곱게 죽어줄 생각은 없지만.”

아무리 죽을 운명의 캐릭터라고 한들, 순순히 죽음을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주일간 줄곧 고민하고, 또 생각해왔다.

어떻게 해야 죽지 않을 수 있을지,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이스페리아>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세계가 그가 알고 있는 <이스페리아>가 맞는지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진성, 아니 유현성 그는 확신했다.

‘이곳은 내가 알고 있는 <이스페리아>와 똑같다.’

그동안 뉴스와 책은 물론 수연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알게 된 결론이었다.

세계관, 설정, 거기다 나머지 등장인물까지.

모든 게 그가 알고 있는 <이스페리아>와 동일했다.

그리고 이 점은 그에게 있어 훌륭한 메리트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이진성 그는.

이스페리아의 살아있는 화석, 주인공 그 자체가 되어버린 망령.

즉, 고인물 중의 고인물. 그야말로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석유였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 최초로 게임 클리어,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엔딩을 공략한 유일한 플레이어.

나중에 가서는 보통 유저들은 상상도 못할 기행으로 온갖 업적을 따낸 상또라이.

대깨이(대가리가 깨져도 이스페리아), 이친놈(이스페리아에 미친 놈), 현생을 저버린 자.

당장 그를 대변하는 수식어만 해도 수 십 가지였다.

그리고 이를 바꿔 말하자면 적어도 이스페리아에 한해서는 이진성 그를 따라올 자는 없었다.

‘물론 그동안은 전부 주인공으로 플레이 해왔지만….’

적어도 지금 이 곳이 그가 알고 있는 <이스페리아>라면 문제없었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당장 주연들이 내일 점심으로 뭘 먹는지조차 예측할 수 있는 경지.

그렇다면 이 지식을 이용해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스페리아> 작중의 주인공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앞으로 그가 밟게 될 지뢰를 차근차근 제거.

그 끝에는 해피엔딩까지 도달하는 것.

이것이 유일한 그의 목표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현성은 주인공의 손에 죽거나, 멸망이 다가올 세상에서 죽는다.

아니 운이 나쁘면 그전에 죽을 수도 있겠지.

허나 앞서 말했듯 현성은 그리 쉽게 죽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살아남는다. 무조건.”

그렇게 다시금 의지를 다진 현성이 메이드 장이 놓고 간 스프를 바라봤다.

[수연의 특제 스프]

설명 : 유 가문의 메이드 장 수연이 직접 만든 수제 스프로 먹으면 몸이 따뜻해지고 기운이 날 것 같다.

그대로 스프를 한입 퍼먹자, 적절한 간과 부드러운 크림이 입 안을 감돌았다.

그리고 잠시 뒤.

스프를 깔끔하게 비운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그럼 가볼까.”

기운도 차렸겠다.

이제부터는 그가 <이스페리아>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망의 첫 번째 계획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 * * * *

“도련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으리으리한 고층 빌딩.

이 아니라 그 건너편 옆옆 동네에 자리한 조그마한 단독주택 앞.

수연이 현성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외출이라뇨. 그러다가 또 저번처럼….”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그래. 그동안 충분히 쉬었고, 가벼운 산책 정도는 괜찮잖아.”

그런 현성의 말에 수연이 말끝을 흐렸다.

“그건 그렇지만….”

허나 현성은 알고 있었다.

지금껏 봐왔던 그녀라면 마지못해 허락해 줄 것임을.

그리고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너무 늦지 않게만 돌아오세요.”

메이드 장의 허락이 떨어졌다.

여기까지는 역시 그가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대답에 현성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애도 아니고 걱정하지 마.”

“…아니 그게 아니라 저 내일 일 나가잖습니까. 도련님이 늦게 돌아오시면 덩달아 저도 자다 깨니까 조심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갑작스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현재 현성이 있는 유 가문은 이름뿐인 몰락가문.

수입을 충당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역시 현실이나 게임이나 돈이 없으면 여러 애로사항이 뒤 따라오는 건 똑같았다.

아무튼 그대로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큼큼, 됐고 이거나 받으십쇼.”

수연이 정적을 깨고 현성에게 바구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바구니 안에는 그녀가 만든 수제 샌드위치가 담겨있었다.

동시에 수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이 좋아하시는 참치 샌드위치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굶고 다니지는 말아야죠. 어엿한 유 가문의 가주 아니겠습니까.”

“수연….”

따뜻한 수연의 말에 현성이 살짝 감동받은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리 빙의했다지만 누군가에게 이런 호의 가득한 음식을 받아본 적이 언제던가.

사실 현성 그는 참치보다는 햄을 더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고마워.”

현성은 그대로 수연의 샌드위치 바구니를 챙기고 미소 지었다.

이에 그녀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도련님. 조심히 다녀오십쇼.”

“응.”

그렇게 현성은 수연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그런 그의 목적지는 바로 선천강 둔치.

그곳이 바로 그의 생존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자, 엔딩이 어떻게 갈릴지 결정하는 첫 번째 분기점이었다.

게임 속 삼류 악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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