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릴리가 몸을 숙여 제 남편의 얼굴을 덮었다. 성전의 주위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게 솟아 있던 성전의 첨탑이 흔들리며 모로 기울었다. 밖으로 달아난 사람들은 그렇게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첨탑이 무너지고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새하얀 성전의 벽면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이야기 속에, 여신의 성전은 그녀의 첫 번째 아이의 위에 세워졌다 하였다. 그 역사와 기원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원형의 형태. 얼음도 아니요. 대리석도 아니요. 철근도 아닌 기이한 상아질의 기둥들이 송곳처럼 일어섰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것이 어떤 형상을 갖추어 가고 있음은 알아차렸다. 그것은, 맹수의 갈비뼈. 곧은 척추뼈, 지축을 흔들며 눈더미 속에 파묻혔다가 하얀 눈보라를 흩날리며 좌우로 펼쳐진 것은 분명 맹금류의 날개였다.
“용이야….”
누군가 넋을 잃은 채 말했다.
“용이야…. 아마네스 여신의… 첫 번째 아이야….”
잠이 든 그의 몸 위에 성전을 지었다는 그 이야기는 진실이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 뼈대만 남은 백룡의 갈비뼈를 지지대 삼아, 그 위로 회벽을 올렸다.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기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건축물은 그렇게 지어졌다.
성전은 그 자체로 생명체였다. 인간은 용의 갈비뼈 안에서 방을 짓고 그 안에서 여신을 찬양했다. 그 안에서 피를 뿌리고 욕망을 하고 이기를 심으며 그녀의 소중한 아들을 밟으며 살아온 것이다.
그가 날개를 펴고 허공으로 떠오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백룡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뻥 뚫린 그의 동공이 푸른빛으로 발광했다.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 말고는 행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날개를 움직일 때마다 눈보라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렇게 얼어붙어 눈 속에 파묻혔다. 빙벽이 생겼고 그가 날아오르는 자리마다 불길이 꺼졌다. 피처럼 붉은 하늘이 그의 눈동자를 닮은 푸른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에이가는 똑똑히 목격하였다. 로로도, 매짐, 리쿠스도, 로리아나도, 세바스탠도 그리고 자할도, 자파도, 파니릴리와 카르낙도 모두.
성전은 부서졌다. 북쪽에는 맹렬한 추위가 찾아왔다. 남은 이들은 부서진 잔해 위에서 살아남아 불을 켜고 횃불을 들고 남아 있는 것들을 주워 파괴된 도시를 벗어났다.
“…사막에 꽃이 필 거예요.”
북쪽을 막 벗어날 때쯤, 파니릴리가 오코의 등위에서 말했다. 카르낙은 에나의 사치스러운 털가죽을 그녀의 어깨 위에 꼼꼼히 감싸 주며 되물었다.
“뭐라고 했어, 릴리?”
“사막에 녹음이 돋아날 거예요. 그곳은 엘버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이 될 거예요.”
풀이 돋아난 자리에 꽃이 피고, 꽃이 핀 자리에 나무가 자라날 거다. 비가 고여 웅덩이가 생기고, 물이 흐르고 으스러졌던 성은 재건될 것이다.
용은 그 날갯짓으로 세상의 불길을 잠재우고 떠났다. 믿음의 상징은 부서졌고 신화 속의 존재는 사라졌다. 그러나 꽃이 필 것이다. 뜨거운 열기가 고요히 잠든 곳에 간지러운 미풍이 불 것이다. 그 모습이 눈앞에 보이듯 그려졌다. 더는 그 누구도 투로를 경멸하지 못할 것이다. 더는 누구도 그를 차별할 수 없다. 새로운 세상이다. 틀림없었다.
밤은 놀랄 정도로 일찍 찾아왔다. 화마가 지나간 잿더미 위에 로리아나는 왕을 위한 막사를 세웠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
에이가가 맨바닥에 천 하나를 털썩 깔고 앉아 저에게 맑은 수프를 건네주는 로리아나에게 말했다.
“무엇이 말인가요? 에이가.”
“지금 내 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궁핍한데.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풍족한 것만 같아.”
그러자 로리아나는 웃었다.
“살아남았으니까요. 우린 죽음에서 살아났으니 더 무엇이 필요하겠어요.”
“…….”
에이가는 저와 똑같이 바닥에 주저앉아 무심한 얼굴로 빵을 뜯는 카르낙을 바라보았다. 어린 바르시에게 수저를 쥐여 주는 파니릴리도 보였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겠어.”
이 잿더미 위에 다시 왕국을 재건하려면 분명 그러하겠지. 하지만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다. 분명 다시 번성할 수 있을 것이다. 비옥해진 대지 위에 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왕국을 건설하게 될 것이다.
식사를 마친 뒤 카르낙은 멍하게 모닥불을 바라보다 결심한 듯 모두에게 말했다.
“…왕위에서 물러나겠어.”
뭐? 하고 핀이 되물었다. 웬 미친 소리인가. 죽다 살아났더니 갑자기 왕위에서 내려오겠다고? 그 개고생을 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살려 놓고? 하얀 늑대에도 올라 타본 놈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성전을 무너뜨리고 용을 본 광경은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을 제 손으로 해 대 놓고, 물러나? 대대손손 사람들의 입에 전설처럼 여겨질 일을 벌여 놓고?
“갑자기 돌았어?”
“난 왕좌엔 어울리지 않아. 내겐 과한 자리야. 그러니 더 나은 이에게 양보하는 것이 이치에 맞아.”
“네가 왕위에서 물러나면 그럼 누가 왕이 되는데! 나한테라도 양보할 거냐!”
“아니….”
하고, 그는 여전히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파니릴리는 침착하려 애쓰며 남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칼… 이런 일은, 먼저 나와 상의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러자 카르낙이 제 아내를 바라보았다. 문뜩 뭔가를 깨달은 것 같지도 않았고 갑자기 생각해 결정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아주 단단하게 다져서 더는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게 되자 비로소 밖으로 꺼내 놓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에이가는 아… 하고 신음을 흘렸다. 알아. 그가 생각하는 것을 안다. 그거로구나. 로레인 마님이 원했던 것은. 그녀가 죽음으로 이루어낸 새로운 세상이란. 카르낙이 말을 이어갔다.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왕이 되어야 해.”
그 말에 모두 숨을 멈췄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그보다 더 타당하게 여겨질 순 없었다. 에이가의 곁에 선 로리아나가 떨리는 손으로 늙은이의 옷자락을 잡았다. 무슨 의미인지 안다.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도 거대하며 또한 벅찬 일인지.
“합당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굽은 등을 펴며 로로가 카르낙의 의견에 동의했다.
“비 전하께서는 자비로운 왕이 될 겁니다.”
“난… 아직….”
그러나 모두가 동의한다 해도 파니릴리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했다. 릴리는 두려움에 질려 고개를 저었다.
“난… 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왕이라니.
“싫어요.”
나보고 왕좌에 앉으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떠올려 본 일이 없다. 그런 자리는 마땅히 앉아야 할 자가 앉는 거다. 강하고 지혜롭고, 카르낙처럼. 발투만 왕처럼 때론 무자비하고 또 뛰어난 전사만이 앉아야 할 자리다.
“릴리”
카르낙이 발작하듯 고개를 흔드는 그녀를 진정시키려 말을 걸었다.
“싫어요.”
“내 말을 들어 봐.”
“싫다니까요.”
릴 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자 카르낙도 몸을 일으켜 자리를 벗어나려는 릴리의 팔뚝을 단단히 쥐었다.
“난 이 세상 따윈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 놈이야. 알잖아. 엘버그란 대륙에 미련이나 애정이라곤 한 톨도 없어. 지금껏 그런 마음으로 왕좌를 지켰어. 세상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조롱하듯 그 자리를 깔고 앉았을 뿐이야.”
“…그렇지 않아요. 난 알아요, 칼. 당신은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삶을 꿈꿨잖아요. 당신이 지켜낸 걸 봐요. 당신이 지켜 낸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요.”
당신은 당신의 고통을 감수하며 이렇게 많은 생명을 살렸어. 당신은 제 몸을 내어 주며 불꽃을 일으켰어. 당신이 아니었으면 우린 이 거대한 불길을 꺼뜨릴 수 없었어. 당신이 빙벽을 가르지 않았다면 우린 모두 죽었어. 당신에겐 자격이 있어.
“모르겠어요, 칼? 그 자리가 당신의 운명이에요. 당신이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에요.”
“내게 새로운 세상은 너야, 파니릴리.”
“…….”
“언제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엘버그를 지키고 싶었던 적 없어. 하지만 릴리 너라면. 너라면 목숨을 걸고 지킬 거야. 그러니 넌 왕이 되어야 해.”
네가 왕이 되어 이 세상을 가져야 해. 그러면 나는 너를 위해 이 세상을 지킬 거야. 네 것이라면 나는 목숨을 걸고 지킬 거야. 기꺼이 이 모든 것을 지킬 거야.
“그러니 너여야 해. 너의 세상이어야 해. 네가 만드는 세상이어야 해. 그래야 나는 이 땅을 사랑할 수 있어.”
그럼 나는 기꺼이 검을 휘두를 거야. 너를 위해 무엇이라도 가져다 바칠 거야. 네 발아래 무릎을 꿇고 네 발등에 입을 맞추는 헌신적인 기사가 될 거야. 너를 지키는 것이 곧 세상을 지키는 것이 된다면 릴리. 내게 그보다 더 행복한 삶은 없어.
“나를 위해 왕이 되어 줘, 릴리. 부디 나의 여왕이 되어 줘.”
“난….”
파니릴리는 답을 찾지 못해 더듬댔다. 너무 일러. 마음의 준비를 하기엔 너무나 급작스럽다.
“여왕 폐하.”
그러나 로리아나가 말했다. 뭔가에 홀린 듯, 그러나 분명하게 소리 내어 그녀를 불렀다. 무언가를 상상하듯 허공을 맴돌던 로리아나의 눈동자가 분명하게 파니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며 음미하듯, 찬양하듯 다시 한번 소리 내어 말했다.
“발투만 여왕 폐하.”
다만 소리 냈을 뿐인데 사람들이 전염된 듯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중얼거렸다. 여기저기서 여왕 폐하, 여왕 폐하, 그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핀은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굳세게 다물며 자포자기하듯 무릎을 꿇었다. 아아 그래. 파니릴리 알기어스. 언젠가 당신이 카르낙을 제 발 앞에 무릎 꿇게 할 줄 알았어.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말이야. 그러니 별수 있나. 그가 무릎을 꿇는다면, 나 역시 당신의 기사가 될 수밖에.
핀은 제 가슴에 손을 얹고 그녀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장난스러운 듯 진지했다.
“여왕 폐하.”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파니릴리는 황망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절박하게 도움을 구하는 그녀에게 그러나 카르낙은 환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는 속삭였다.
“파니릴리 발투만. 나의 여왕이시여.”
***
엘버그의 새로운 수도는 하게너의 영지에 세워졌다. 대지 위에 비가 뿌려지고, 새싹이 돋고 꽃잎이 만개할 무렵, 땅 위에는 다시 짐승과 새들이 날아들었다. 비옥한 땅 위에 사람들은 씨를 뿌렸고 허물어진 북쪽의 성전 위에 하얀 늑대가 무리 지어 돌아다닌다 하였다. 세바스탠은 새로운 왕가의 숙련공으로 임명되어 하게너성의 재건을 도왔고 스러진 로레인 하게너의 무덤을 새롭게 지었다.
매짐은 정식으로 기사가 되었으며 길란은 세바스탠을 도와 왕실의 대장간 일을 도왔다. 자미에는 여인을 돌보며 치료사인 리쿠스를 도왔고 로리아나는 더는 창녀가 아닌 자신의 성씨와 집을 가진 상인이 되었다.
로로는 여전히 발투만 왕가의 원로였으며, 핀과 루이스는 여전히 그를 지키는 근위대였다. 바르시는 발투만 왕가의 양자로 입적하여 코르넬리오라는 성을 버렸다.
무너진 성의 재건이 완성될 때쯤 새로운 왕을 맞이하는 대관식이 치러졌다. 파니릴리는 복중에 태아를 품고 왕좌에 올랐다.
이는, 발투만 왕가 4년, 여왕 파니릴리 발투만 치하 1년의 일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