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늑대가 들어서니 사람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두 쪽으로 갈라졌다. 싸우는 것도 비명을 지르는 것도 분노하는 것도 잊었다. 몇몇은 손에 든 무기마저 떨구었다. 성전에 하얀 늑대가 들어섰다. 신의 사자라 불리는 성스러운 짐승이. 그것도 투로를 태우고. 그것은 전의를 상실하기에 충분한 그림이었다.
적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카르낙이 늑대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루이스는 턱이 빠진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 그를 맞이했다. 이게 당최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파니릴리 알기어스를 차지하고 이제 아마네스도 차지한 건가.
압도된 좌중이 호흡도 멈추고 그를 보는 동안 카르낙은 침착하게 제 아내를 도와 사뿐히 땅에 내려놓았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늑대가 입에 문 바르시와 자파, 자할을 차례로 퉤, 하고 뱉어 냈다.
“시발!”
바닥에 쿵, 떨어진 충격에 자파는 제 가슴팍을 움켜쥐고 욕을 뱉어 냈고 바르시는 저를 물어다 준 늑대의 머리를 겁도 없이 쓰다듬었다. 보드랍고 따듯한 털의 감촉이 좋아 아이는 배시시 웃었다. 어느 집 똥개도 아닌데 마치 그런 취급이었다. 오금이 저리는 광경이다.
“테이먼 테르조는 기록소에 있다.”
핀은 침착하게 다가가 말했다. 릴리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지하로 갔을 거예요.”
설마, 하며 카르낙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불빛인가 뭔가를 따라간 건가? 하루살이처럼?”
결국 돌고 돌아 이 지점인가. 파니릴리는 그 빛이 테이먼을 미치게 했다고 믿었다. 어쩌면 알기어스도 그 빛을 보고 미치광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빛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 곳곳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신전을 세우며 신에게 닿길 열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곳이 모든 것의 시작이겠지. 또 모든 것을 끝내기에도 알맞은 장소일 것이다. 카르낙이 물었다.
“에나는?”
“죽였어. 시체는 침대 위에 얌전히 눕혀 놓았다. 위대하신 발투만 폐하를 위해 전시해 두었지.”
핀이 약간의 비소를 섞어 답했다. 그때, 아우우우, 하고 늑대들이 하울링했다. 그 날카로운 소리에 사위가 징, 하고 울렸다. 곧 바닥이 흔들렸다. 삽시간에 늑대들이 좌우로 흩어졌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요란한 소리를 내다가 아래로 낙하했다. 콰지직, 유리들이 부서졌다.
멀리, 성전의 밖을 보았다. 빙산이 열을 지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하늘이 치솟은 화염으로 온통 붉었다.
“눈에 전부 녹아내리고 있어.”
성전은 빙산 위에 지어졌다.
“…무너질 거야. 카르낙.”
핀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곧, 이 성전도 무너질 거야. 달아나야 해.”
하지만 어디로? 화염이 성전까지 들이닥치면 더 도망갈 곳도 없다. 꼼짝없이 이 안에서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려 죽거나, 아니면 불에 산 채로 구워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카르낙이 사태를 파악하고 물었다.
“에이가와 로로는 어디에 있어?”
“지하에 있어. 전투를 피해 안전한 곳에….”
“모두 기록소로 이동할 거야. 전부. 따라와.”
지금은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 어둡고 비좁고 차가운 이 성전의 지하만이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피난처였다.
***
고프리는 씩씩거리며 테이먼을 노려보았다. 그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사람의 배를 뚫고 창자를 끊어 내기엔 충분한 길이였다. 검 끝에 핏물이 맺혀 있었다. 테이먼은 손으로 제 복부를 눌렀다 떼 보았다. 손바닥이 온통 붉었다. 이마에 핏줄이 섰다. 늑골의 바로 아래에서 타는 듯한 작열통이 느껴졌다.
“고프리….”
“당신은 거짓된 왕이야.”
“…….”
“당신이 모든 걸 망치게 둘 순 없어.”
그리고 당신을 죽여야만, 그래야만 내가 살아. 그래야 나는 투로 놈에게 붙을 수 있어. 당신의 목을 가져가면 그는 나를 살려 줄 거야. 내가 그의 적을 해치웠으니 차마 나를 죽이진 못할 거야. 고프리는 어금니를 사리물고 다시 한번 그의 배에 칼을 쑤셔 넣었다. 살과 근육을 끊고 찢는 소리가 끈질기게 이어졌다.
***
“끝까지 내려가야 해요.”
횃불을 들고 앞장서서 걷는 남편의 뒤를 따르며 릴리가 말했다. 카르낙은 그 뜻을 알아들었다. 그곳에 테이먼이 있을 거다. 더는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외면할 곳도 없으니 그곳에서 그를 조우할 것이다. 그곳에 가면 그를 눈멀게 한 그 불빛도 볼 수 있겠지.
움직일 때마다 경고라도 하듯 바닥이 간헐적으로 흔들렸다. 중심을 잡고 쓰러지기를 여러분, 그러나 모두 침착하게 왕을 따라 기록소로 들어갔다. 내딛는 걸음마다 테이먼이 도륙한 시체들이 차였다. 기록소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끝도 없이 펼쳐진 어둠은 아주 친절히 그들을 죽음으로 안내하는 듯했다.
“에이가!”
카르낙이 소리 높여 외쳤다. 광광거리며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쳤고 어디선가 육중한 문이 힘껏 열렸다.
“폐하!”
절규에 가까운 에이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뚜벅뚜벅, 서두르는 늙은이의 절뚝거리는 걸음소리, 그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비 전하!”
에이가는 주름이 가득한 손을 뻗었다. 릴리는 아이처럼 그녀의 품에 뛰어들었다. 에이가는 기꺼이 그녀를 껴안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에이가는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만은 눈부신 햇살처럼 밝았다. 뒤이어 로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르낙.”
그는 예전처럼 카르낙을 불렀다. 카르낙은 웃었다. 다시 사막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열여덟의 투로가 되어 다만 내일도 살아남길 열망하게 된 것 같았다. 겨울이면 밤하늘에 뜬 별을 보며 울던 때로, 로로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다만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를 바라며 그를 보살피던 때로. 이젠 너무 멀어진 옛 기억이 되어 버린 때로.
“로로.”
우린 함께 태어나진 않았고, 함께 죽을 날을 스스로 택한 것도 아니건만, 이곳에 있다. 그가 소중히 여긴 모든 것들이 이곳에 응축되어 있었다.
“걱정 마.”
그래서 힘주어 답했다. 걱정 마. 세상이 끝난다 해도, 그 순간까지도 내가 지킬게. 마지막까지 반드시 내가 지킬게. 단 1분 1초라도 더 숨쉴 수 있도록, 내 형제들의 영혼이 아주 잠시라도 더 이곳에 머물 수 있도록. 끝까지.
그래서 바닥까지 가야 한다. 이 성전의 가장 밑바닥까지 가 엘버그 대륙의 뼛속까지 파헤쳐 볼 것이다. 아마네스. 그 여자가 숨긴 마지막 비밀까지 모두 까발려 볼 것이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것이 죽음인지 아니면 또 다른 기회인지.
“우린 끝까지 가야 해요.”
파니릴리가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카르낙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녀의 느낌을 따라야 했다. 카르낙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그녀의 것이 아니고 그녀의 감각은 그녀의 것만이 아님을. 그녀가 가진 그 신비한 무언가는 아주 거대했다. 절박할수록 그것은 더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카르낙은 다시 횃불을 높여 들고 그녀를 심연으로 이끌었다. 다시 지축이 울렸다. 그러나 더는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히도 평화로웠다. 마치 고통을 망각한 듯, 차라리 행복하기까지 했다.
고프리는 카르낙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손에 든 단검을 툭, 떨어뜨렸다. 살고 싶은 욕망에 온몸이 떨려 왔다.
“폐, 폐하… 폐하!”
그는 절박하게 카르낙을 부르며 허겁지겁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횃불이 보이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테이먼이! 제가 테이먼을! 제가 놈을 잡았습니다!”
“…….”
조아린 바닥에 구두코가 보였다. 고프리는 더욱더 머리를 땅에 붙였다.
“놈을, 제가 놈을 해치웠습니다! 폐하! 당신께 충성을 증명하고자 제가….”
“카르낙….”
릴리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프리는 바닥에 엎드린 채 기다렸다. 그러나 기묘한 정적이 계속되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살풋 고개를 들고 카르낙과 파니릴리가 넋을 잃고 쳐다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곳에 섬광이 있었다. 테이먼이 말한 푸른빛이었다.
“빛… 아마네스 님의…. 빛…”
고프리는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빛이다. 정말로 빛이야. 눈이 아플 정도로 발광하는 선명한 푸른빛. 그는 바닥에 엎어진 테이먼에게서 아주 천천히 파니릴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르낙도 제 아내를 바라보았다.
릴리였어. 테이먼이 아니라.
“이건 빛이 아니야.”
카르낙이 그 반짝이는 빛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하며 말했다. 이건 섬광 따위가 아니야. 이건…
“이건 눈이야.”
눈? 이게 눈이라고? 릴리도 미간을 좁히며 푸른빛을 살폈다. 섬광은 가늘어졌다가 곧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그래 이건 마치. 눈을 깜빡이듯. 그 눈동자는 분명 파니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이 올곧게 똑바로.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릴리는 손을 뻗어 빙벽을 짚었다. 닿는 것만으로도 얼어 버릴 정도로 차가웠다. 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거지? 저 거대한 눈동자는 누구의 것이지? 저걸 어떻게 꺼낼 수 있지? 카르낙은 아내를 따라 빙벽을 매만졌다.
이걸 깨야 해. 하지만 이걸 어떻게 깰 수 있을까. 성전의 빙벽은 깰 수 없어. 태초부터 만들어진 얼음이었다. 사람의 힘으로도 깰 수 없고 횃불의 미약한 열기만으로도 절대로 녹일 수 없다.
카르낙은 제 검을 바라보았다.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바위에 부딪히니 불꽃이 튀었어. 푸른 불꽃이었어. 한 번 불을 붙이면 사방의 모든 것을 태웠어. 이 안에 담긴 건 꺼지지 않는 불꽃이지. 내 피를 먹고 살을 갈라야만 꺼지는… 태초의 불꽃이었지.
카르낙은 검을 빼내 높이 치켜들었다. 붕, 소리를 내며 상아질 바닥을 내리치자 고프리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불꽃이 일고 곧 화르륵, 검에 불이 붙었다.
“물러서, 릴리.”
카르낙이 제 아내를 뒤로 물렸다. 전부 다 깨부술 필요는 없어. 다만 균열을 일으키면 돼. 그러면 스스로 깨질 거야. 카르낙은 힘껏 칼날을 빙벽에 박아 넣었다. 푸스스, 소리를 내며 칼끝이 얼음에 박혔다. 펑, 소리를 내며 불길은 더욱 맹렬히 기세를 키웠다. 거대한 불길이 그의 손끝을 녹여 댔다. 피부가 녹아내리고 일그러지고 곧 살을 녹이고 뼈가 드러났다. 카르낙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의 피부가 조금씩 벗겨져 날아갔다.
“칼!”
릴리가 혼비백산하여 그를 불렀다. 그래도 카르낙은 물러서지 않았다. 고프리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불길이 너무 뜨거워 그 곁에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기듯 계단을 오르는데, 기다란 블리오의 끝자락에 불이 붙었다. 화르륵, 삽시간에 제 옷가지를 태웠다.
안 돼! 안 돼! 고프리는 바둥거리며 불길을 털어 내려 애썼다. 안 돼 죽기 싫어! 안 돼! 아파! 너무 아파! 불길은 그의 등을 타고 어깨를 타고 머리까지 치솟았다. 고프리는 계속 버둥댔다. 도망가려고 계속 계단을 올랐다.
“으악! 으아아악!”
피를 토하듯 비명을 지르는데 목구멍이 뻥 뚫렸다. 벙긋 벌린 입술까지 일순 타들어 갔다. 불꽃은 그를 좀먹은 채 연기를 피우며 사라졌다. 고프리는 흔적조차 남지 않고 발화했다.
쩍쩍, 빙벽이 갈라졌다. 조각조각, 얼음덩어리가 떨어졌다. 땅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굉음이 났다. 카르낙은 제 검을 회수하지도 못한 채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