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설원에 늑대가 있었다. 새하얀 털이 눈과 구분되지 않았다. 다만 푸른 눈동자가 그 형체를 읽게 할 뿐이다. 자할과 자파가 뒤로 주춤 물러서며 칼을 빼 들기 위해 손을 허리춤에 댔다.
“쉬.”
하고, 카르낙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한 놈이 아니었다. 몸을 움직여 다가오는 놈들은 열댓 마리의 무리를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니 칼을 들어서 해결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오히려 적대감을 보일수록 위험해진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혈관의 피가 빠르게 맥동했다. 파니릴리의 피 때문일까. 아니면 놈에게 뜯겼던 기억에서 야기된 두려움 때문일까. 릴리가 걸음을 뗐다. 늑대에게 다가가는 아내를 보며 카르낙의 신체는 기이한 흥분으로 뒤덮였다.
늑대 한 마리가 경계심이 가득한 몸짓으로 릴리에게 다가왔다. 개 중 가장 날카로운 이와 커다란 덩치를 가진 것을 보아하니, 놈이 이 무리를 이끄는 것 같았다. 코를 땅에 끌다시피 하며 다가와 킁킁, 파니릴리의 발치에서부터 냄새를 맡았다. 분노한 것인지, 흥분한 것인지 종종 이를 드러내고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파니릴리는 놈이 자신을 탐색할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곧 놈이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들었다. 청아한 눈동자가 시선을 맞췄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다. 다만 빛을 따라 흘러넘치고 감각으로만 전해졌다.
모르겠어. 네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어. 파니릴리는 더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따금씩 늑대는 입술을 부르르 떨고 침을 삼켰다. 그러더니 몇 번이고 다시 머리를 아래로 낮췄다.
“…따라오라는 거야?”
놈이 다시 입맛을 다셨다. 아니. 아닌가?
“…타라고?”
“…….”
“널… 타라는 거야?”
그러자 놈이 목을 길게 뻗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래. 그거로구나.
“늑대가… 자신을 타래요.”
“말도 안 돼.”
자할은 혀를 내둘렀다. 하얀 늑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놈을 마주하면 살아 돌아올 수 없다고 했다.
“확실해?”
“아마도…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파니릴리도 확신할 수 없어 주춤거렸다. 정확한 언어가 아니다. 다만 교감일 뿐. 늑대가 하는 말을 뚜렷하게 알아들을 순 없다. 그저 느낄 뿐이었다. 카르낙이 아주 천천히 릴리의 곁으로 갔다. 늑대의 푸른 눈이 그의 걸음을 훑었다.
그래. 우린 안 좋은 추억만 있지. 네놈들은 날 죽이려 했고, 그 이유로 너는 네 형제를 잃었잖아. 맞아. 내가 파니릴리의 손을 더럽혔어. 그녀의 손을 피로 물들였어. 네놈들이 사랑하는 아이를 내가 진창에 구르게 했지. 그걸 너는 타락이라 말할 텐가. 아니면 구원이라 말할 텐가.
카르낙은 침을 삼키며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놈에게 손을 내밀었다. 으르릉, 하고 놈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울음소리를 냈다. 카르낙은 물러서지 않았다. 네놈이 파니릴리를 사랑한다면 나도 받아들여야 해. 네가 그녀를 지키고 싶다면, 마찬가지로 날 인정해야 해.
“카… 카르낙….”
자파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형제를 말리고 싶었다. 내민 손이 놈의 거대한 턱뼈에 짓씹혀 두 동강 날 것 같았다. 원초적인 공포에 사지가 떨려 왔다.
뻗은 그의 손끝이 놈의 콧등에 닿았다. 바늘처럼 새하얀 털이 손가락을 찔렀다. 문뜩 미친 짓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뒤로 무를 수도 없었다. 무르는 순간 손가락이 잘릴 것이다.
간헐적으로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주름지던 놈의 콧등이 곧게 펴졌다. 하악질하듯 그릉거리던 숨소리도 잦아들었다. 대신 늑대는 머리를 숙였다. 카르낙의 손바닥이 완전히 놈의 머리에 안착했다.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뒤에서 자파가 풀썩,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쿠르르릉, 하고 지축이 울렸다. 카르낙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늑대들이 목을 빼고 하울링을 시작했다. 릴리는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보았다. 새가 소란스레 날아가기 시작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지진. 지진이에요! 칼!”
“…….”
늑대가 카르낙의 곁을 빙빙 돌았다. 멀리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났다. 산사태다.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칼!”
릴 리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카르낙은 요란하게 제 주위를 도는 늑대의 갈퀴를 잡고 그의 등 위로 몸을 던졌다. 릴리는 바르시를 찾았다. 아이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는데 늑대가 주둥이를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집어넣고 번쩍 머리를 들었다. 릴리는 본능적으로 그의 갈기를 잡았다. 푸스스스, 얼음덩어리가 진눈깨비처럼 날렸다. 단단히 지탱하던 동굴의 벽들이 무너졌다. 으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자할과 자파가 설원으로 튀어나왔다.
늑대 한 놈이 바르시의 옷깃을 물어 잡아당겼다. 아이는 나풀거리며 설원으로 빠져나왔다. 그 모양새가 마치 어미가 새끼 늑대의 목덜미를 물어 옮기는 것과 똑같아 자할은 ‘허’ 하고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켰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제 등 쪽이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더니 몸이 앞으로 쏠렸고 이내 발이 허공으로 들렸다
“아아악!”
하고 그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늑대가 그의 옷깃을 문 것이다. 바르시와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고개를 쳐들어 옆을 바라보니 자파도 저와 똑같은 꼴이었다.
“야!”
그는 빽 비명을 질렀다. 늑대는 들은 체도 않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위가 눈보라로 희뿌옇게 변했다. 늑대가 달음박질할 때마다 몸이 위아래로 출렁였다. 아니! 이게 뭔데! 누구는 멋지게 등에 태우고 난 왜 이따위로 물어서 나르냐고! 모양 빠지게!
“야아아아악! 잠깐! 야! 기다려 봐! 아악!”
아아아악! 쪽팔려!
성전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밀려들어 왔다. 본디 성전을 지키던 에나의 사병들이 이번에는 성전을 함락시키러 온 것이다. 사제들은 비명을 지르며 곡을 했다. 몇몇은 도저히 이를 두고 볼 수 없다며 자결했다.
새하얀 대리석이 온통 피바다였다. 높다란 성전의 천장 위로 칼과 칼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날붙이의 충격 소리와 사내들의 고함 소리로 가득했다. 핀은 밀려드는 사병들을 칼로 베며 테르조의 행방을 찾았다.
“테이먼 테르조! 놈을 찾아! 그놈을 찾아라!”
놈은 생포해야 한다. 그놈은 온전히 생포해 카르낙 발투만의 앞에 데려다 놓아야 한다. 그는 칼을 휘두르며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정말 웃긴 일이지 않은가. 세상은 멸망해 가고 있는데, 곧 모두가 흔적도 없이 불에 타 사그라질 텐데, 그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살육 판을 벌인다.
모두 죽고 싶지 않으면서, 죽음을 각오한 척 팔다리를 휘두르며 싸우고 있다. 살아본 중 가장 강렬한 광기의 순간이었다. 핀은 결국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기분이었다. 엘버그의 고결하고 가치 있던 모든 것들을 제 손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더는 더 나은 사람도, 더 고결한 영혼도 없다. 모두가 더럽혀졌을 뿐이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가 이 미친 죽음이 춤사위에 놀아나고 있을 뿐이다.
“대장!”
루이스가 멀리서 그를 불렀다. 핀이 두 명의 장정을 칼로 베어 내고 눈에 튄 핏물을 닦으며 곁으로 갔다.
“저길 봐.”
그는 루이스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말은 아니었다. 그보다 크고 그보다 말도 안 되게 빠르고 그보다 말도 안 되게 하얬다. 늑대. 늑대다. 그리고 왕이었다.
“…이런 미친….”
루이스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달려드는 적의 가슴팍을 칼로 쑤셨다 빼면서도 루이스는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의 왕은 새하얀 설원 위에 떨군 한 방울의 잉크처럼 보였다. 새까만 점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새까만 머리가 맹렬한 기세로 흩날렸다.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그가 왔다. 이 개자식이, 돌아왔어. 핀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그의 얼굴에는 흥분과 희열로 가득했다.
“나팔을 불어! 폐하께서 돌아오셨다!”
뿌우우우, 하고 성탑 위에서 긴 뿔피리 소리가 났다.
기록소로 향하던 테이먼이 그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고프리가 헉헉대며 그를 따르다 자리에 멈춰 섰다. 고프리는 그 소리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나 테이먼은 알았다.
“…놈이 왔어.”
카르낙 발투만 그놈이 온 거다. 호각지세를 다투던 전투는 이제 한쪽으로 기울 것이다. 고프리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테… 테르조 님 이제…이제 어찌해야….”
“상관없어.”
누가 누구에게 죽어나가 건, 몇 명이 더 죽어나가 건, 아니 이 세상 모두가 그렇게 카르낙 발투만 손에 죽더라도 상관없었다. 테이먼은 검을 들고 제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모두 갈라 냈다.
그러고는 굳건히 닫힌 기록소의 문을 열고 지하로 향했다.
그 안에 캘던의 시민들이 있었다. 성이 난 남자의 발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겁에 질려 벌레처럼 구석으로 흩어졌다. 에이가는 뒤처진 어린아이 하나까지 챙긴 뒤 방문을 닫았다. 끝도 없이 이어진 원형의 계단을 타고 테이먼의 발소리가 울렸다. 내부는 어둡고 텅 빈 듯 고요했다.
“테르조 님.”
고프리가 횃불을 든 그의 뒤를 바짝 따르며 헉헉거렸다. 그는 테이먼의 행동을 읽어 낼 수 없었다. 성전 밖으로 탈출한 에나의 사병들을 한데 모아 이곳에 왔다면 마땅히 탈환을 위해 누구보다 앞서 발투만의 군대와 대적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테이먼은 그와 싸우기는커녕, 제 군사들은 나 몰라라 한 채 이 성전의 지하에 숨어들고 있었다. 그것도 허겁지겁 무언가에 쫓기듯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무리 애를 써도 헤아리기가 어려운 문제였다.
“어디를,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신이 나를 부르고 있어!”
“예?”
테이먼의 얼굴은 자만과 광기로 가득했다.
“너에게 내 존재를 증명해 주지! 나의 위대함을 목도하게 해 주겠어! 고프리! 네가 내 증인이 되는 거야! 내가 얼마나 고귀한 이인지, 네가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영광을 주겠다!”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였다. 그것을 증명하면?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신이 당신을 택했다면? 그럼 작금이 상황이 뒤바뀌기라도 한단 말인가? 대륙은 여전히 불타고 바로 이 문 앞에서는 전쟁이 벌어지는데, 내가 당신의 증인이 되면, 그러면 그 모든 일이 없던 것처럼 말끔히 사라져? 지금껏 벌어진 비극을 모두 갈무리해 다시 평온했던 엘버그의 과거로 되돌아가기라도 한단 말인가?
지금 같은 때에 그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지 판단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미쳐 버렸나. 그렇다면 대체 내가 왜 그를 따라야 하지? 왜 그를 따라 이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지? 날아오르기 위해 그를 따라왔건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추락뿐이다.
드디어, 테이먼은 바닥에 당도했다. 새까만 어둠이 심연처럼 그를 빨아들였다.
“여기야.”
그가 벅찬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내가 왔어.”
내가 왔다. 드디어 이곳에 왔어.
“보여 다오.”
내게 보여 다오. 그 여신의 섬광을 내게 다시 보여 다오.
“어서.”
어서 보여 줘. 여기 고프리에게 나를 증명해. 그가 감격에 겨워 무릎을 꿇고 신음하며 나를 찬양하게 해. 머리를 조아리고 내 위대함에 온몸을 떨게 만들어. 어서. 어서.
“…….”
그러나 어둠은 고요했다. 비정하리만치 무정했다. 환희에 찼던 테이먼의 얼굴에서는 점점 그 빛이 사라졌다. 씨근덕거리던 숨소리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고프리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에 분명 빛이 있다.”
분명 있어. 내가 보았어. 분명 그 푸른빛이 내게 말했다. 내가 이 땅의 주인이라고. 내가 신이 선택한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그녀가 날 택했다고 분명, 분명 그렇게 말했어.
“…파니릴리 알기어스도 보지 못했어. 그녀도 보지 못한 것을…나는, 나는 보았어. 나만이. 나만이 유일하게….”
“여기엔 아무것도 없소.”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런 미친 자의 말을 믿고 여기까지 온 제 처지가 개탄스러워 신음만 났다.
“여기엔… 여기엔 아무것도 없어. 테이먼 테르조.”
더는 그가 두렵지 않아 찌르듯 대꾸하니 그가 고프리를 돌아보았다.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혼란스럽고도 아둔한 표정으로. 참을 수 없어 고프리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절로 어금니가 물렸다. 더는, 더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