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칼!”
경고하듯 그를 불렀으나 카르낙은 칼을 바꿔 잡고 제 옆구리에 그대로 쑤셔 넣었다.
“카르낙!”
자파가 히스테릭하게 소리 질렀다. 이미 상처 난 곳을 다시 쑤셔 대는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달달 떨리는 어금니를 사리물자 입가를 타고 피가 흘렀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만한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카르낙은 끝까지 했다.
불이 붙은 칼끝을 제 몸속에 욱여넣고 견디며 다시 빼냈다. 뱃속이 붉었다. 불씨를 감싼 숯덩이처럼 복부가 팽창했다가 이내 꺼멓게 변했다. 검불은 핏물이 잔뜩 묻은 칼날이 그의 몸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카르낙은 곧 앞으로 고꾸라졌다. 릴리가 비명을 질렀다. 남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댔다. 릴리는 그에게로 뛰어갔다.
“칼!”
카르낙은 제 옆구리를 매만졌다. 알아. 알고 있어. 난 불에 재생해. 난 불에 죽지 않아. 사지를 찢어 내는 듯한 격통이 지난 후 옆구리는 매끈했다. 타들어 가는 듯했던 뱃속도 고요했다. 다만 아직 그 감각을 기억하는 육체가 여운을 떨치지 못해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제 곁에 붙어 앉은 릴리의 숨소리가 충격에 토막토막 끊겼다. 제 남편이 죽지 않은 것이, 말짱한 몸으로 서서히 안정을 찾아 가는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신…”
모르겠어 릴리. 날 살린 것이 내 태생인지, 아니면 네가 나를 구했을 때 나누어진 네 피 때문인지.
“괜찮아요?”
카르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저보다 더 파리하게 질린 아내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몸을 일으켜 릴리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 자파와 자할의 곁으로 가자 넋이 나간 채 자할이 말했다.
“…이럴 거면 카르낙, 차라리 캘던의 그 불꽃을 다 네가 삼켜 버리지 그랬냐. 터지기 전에. 이 괴물 같은 새끼야.”
네가 이상한 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 같은 피부와 같은 머리를 가졌어도 넌 이상하게 투로 같지가 않았단 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 이따위 생명체일 줄이야.
“…넌 씨발 대체 뭐야, 정체가?”
자파가 진저리를 치며 물었다. 너 정말 소름 끼치게 무서워. 카르낙. 예전에도 그랬는데 지금은 더 그래.
“동굴.”
사내가 넋을 놓은 일행에게 본래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카르낙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이놈의 정체 역시 마찬가지로 궁금했다. 넌 뭔데? 또? 넌 뭐 하는 놈이야? 뭐 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나 아주 기가 막힌 도움을 준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 이유로 자할은 그의 뒤를 따르며 조만간 저놈의 정체도 캐 보기로 마음먹었다.
“동굴, 설원까지 이어져. 쭉.”
어두운 동굴 속에서 그가 반대편의 빛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행은 그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아주 먼 곳에서 빛이 발광했다. 아득히 멀었다. 그러나 닿지 않을 만큼 멀지는 않았다.
“…설원으로 이어진다고?”
자파가 되물었다.
“그럼 북쪽 땅이란 말이야? 저곳이?”
그럴 리가. 북쪽 땅은 아무리 달려도 반나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야. 전속력으로 쉬지 않고 달려도 닷새는 걸리는데.
“설원이다.”
“…….”
믿을 수 없는 일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들뿐이라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아니 믿지 못해도 사실이었던 일이 얼마나 많던가.
사내는 멈춰 선 곳에서 손에 들린 횃불을 카르낙에게 들려 주었다. 더는 동행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같이 가지 않을 건가?”
카르낙이 확인차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넌 불꽃이고 난 어둠이야. 난 머물러야 해.”
“…그게 뭐야? 누가 그래?”
“늑대가.”
늑대라고? 파니릴리가 물었다.
“하얀 늑대인가요?”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늑대? 그런 게 존재해?”
자파가 심드렁히 물었다.
“존재해.”
카르낙이 그를 대신해 답했다.
“놈이 말도 할 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릴리는 안다. 늑대는 말을 할 줄은 몰라도 소통할 줄은 안다. 그 기묘했던 감각을 그 역시 경험한 것이리라.
“날 살렸다.”
사내는 카르낙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다음엔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켰다.
“나도 널 살렸다.”
그러니 비긴 것이라 그 말인가. 더는 갚을 빚이 없으니 이제 모른 체하겠다? 이름 없이 태어나 이름 없이 자라며 결국 이름 없는 자이길 택했군. 잘 생각했어. 잘 어울린다.
“은혜를 입었다, 어둠.”
카르낙이 고개를 얕게 숙여 그에게 인사를 전했다.
“고마웠다.”
사내는 카르낙의 인사를 받고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카르낙은 부디 그가 그 안에서 자유롭길 진심으로 빌었다.
“…저주가 아니었어.”
릴리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곱씹어 생각했다. 저주가 아니야. 투로는 아마네스 여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가 아니다. 저주를 받았다면 불길에 재생하지 않아. 그것을 다루고, 제련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하얀 늑대와 교감할 리가 없어. 만일 그가 정말로 저주받은 존재라면, 신이 증오하는 이라면 알기어스 왕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게 내버려 두었을 리도 없어. 이젠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당신은 내 대척점이야.
“투로는… 추예요.”
“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추요.”
타락의 존재가 아니다. 타락을 막는 존재다. 신을 대신해 아마네스는 그에게 칼을 들려 준 것이다. 그는 여신의 채찍이다.
“칼. 당신은… 신의 사자예요.”
그녀가 몸소 보내 나를 단죄하는 자다. 정화의 불꽃임에 틀림없다.
***
일반인은 출입을 금지한다는 기록실의 정 가운데에 핀이 떡하니 들어서 있었다. 그는 그곳에 서서 벽면마다 꽉꽉 들어차 있는 책 하나하나를 꺼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구었다. 성전의 사제들로써는 치욕스러운 광경일 것이다. 하나 상관없었다. 이런 식으로 가뿐히 지르밟는 것이 오히려 더 재미있으니.
“대장.”
루이스가 발을 동동거리는 사제들 사이를 가르고 저벅저벅 기록실의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며 의미 없이 책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핀의 행동을 잠시 아연한 기색으로 살피다가 조용히 말했다.
“테이먼 테르조가 오고 있어요.”
“…….”
“그가 성전을 향해 오고 있어. 뒈진 에나의 사병들을 데리고.”
“아하.”
그는 콧바람을 뿜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놈이 아직 안 뒈졌다니 말이야.
“혼자던가?”
“왕비 전하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알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여전히 그의 곁에 있는지. 그리고 그의 곁에 없다면 파니릴리는 카르낙의 곁으로 돌아갔을 확률이 높았다. 핀은 조용히 웃었다. 지독한 놈.
루이스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그가 나타나면 사제들이 동요할 텐데요.”
특히나 대장. 당신이 이렇게 신성한 구역을 더럽혔으니 그 원망은 하늘을 찌를 테고 이때를 틈타 나타난 테이먼은 이들의 구세주가 되겠지. 그러면 알아서 성문을 활짝 열어 줄 확률이 높았다.
어쩔까 궁리하는 동안 한 사람이 더 기록소로 들어왔다. 에이가였다. 사제들이 신음을 흘렸다. 무장을 한 이방의 군인도 모자라, 이젠 치마를 두른 여인까지.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길이 치솟고 있어요. 코 앞입니다.”
한나절이면 북쪽 땅에 당도하고도 남을 만큼 가까웠다. 그녀는 곧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돌아올 겁니다, 에이가.”
핀은 그녀를 위로했다.
“우린 놈을 잘 알잖아요. 보란 듯이 살아서 멀쩡히 돌아올 테니 걱정 말아요.”
에이가는 결국 소맷단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흐느꼈다.
“이 늙은이는 여기서 이렇게 죽어도 미련 없어요. 하지만 폐하와 왕비 전하는…. 이 성전에 도망쳐 온 수많은 사람들은….”
그 죄 없는 이들은 어찌해야 하나. 신이 우리를 버렸을까 두렵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망과 탐욕으로 거짓과 살육만을 일삼은 우리들에게 넌덜머리가 나 모든 것을 쓸어 내고 다시 태초의 엘버그 대륙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은 아닐까. 더는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 생각하시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걸까요?”
이곳까지 온 마당에. 우린 아직도 싸우고 있다. 우린 아직도 서로를 미워하고 여전히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다. 죽고 싶지 않아 죽인다. 죽을 수 없어 먼저 죽인다. 이 짓을 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이 망한다면. 모두가 신의 불길 아래 잿더미로 변한다면 전부 무용한 짓일 뿐인데도 우린 왜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평생 옳기 때문에 행한 일은 없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었다면 애초에 칼을 잡지도 않았을 테니까.
“우린 다만 선택할 뿐입니다, 에이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택하고 그를 위해 행동할 뿐이다. 운이 좋으면 옳다 여겨질 테고, 운이 나쁘면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무언가를 알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살기를 원할 뿐이다. 그 외에는 사치다.
테이먼 테르조도, 사막에서 불어온 화염도 모두 이곳, 아마네스의 성전을 집어삼키기 위해 몰려오고 있다. 어쩌면 모든 것은 여기서 끝날 수도 있다. 성스러워 모두가 우러러본다는 이 새하얀 상아질 건물 안에서 모두 살기 위해 치열히 몸부림치다가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그것을 원하는가. 이 신의 재단에서 모든 이를 재물로 태우고 다시 세상을 무(無)로 돌리려는가. 그것이 여신이 택한 신의 정의인가. 그렇다면 기꺼이 맞이해 줘야지. 두 팔 벌려 열렬히. 핀은 비리게 웃었다.
“이재민들을 모두 이곳 지하로 대피시켜. 부상자들과 성의 일꾼들도. 전부 다.”
이 성전의 기록소는 신성하여 감히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다지. 그렇다면 사람을 온전히 보호하기에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장소는 없다.
“무장한 군인과 사제들만이 그들을 맞이해야 할 거야. 루이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버틸 거다. 카르낙 발투만이 무사히 이곳에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서 버티는 거야.”
그러니 한바탕 칼춤을 추자고. 놈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환영식은 없을 테니.
***
놈의 말대로였다. 설원이었다. 어떻게 대륙을 관통하면 반나절 만에 북쪽 땅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인지 자파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눈으로 보고 있는 지금에서도 그것은 똑같았다.
“마법 같은 건… 옛날이야기에서나 나오는 허구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러나 이것을 마법이라 하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을 마법이라 할 수 있는가. 다만 핍박하고 억압하기 위해 지어냈을 거라 여겼던 엘버그의 건국 신화가 이제는 허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말로 신이 존재하고 정말로, 저 성전의 주춧돌 아래에 용이 잠들어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알기어스는 신의 아이이고, 정말로 세상은 타락했으며, 정말로 자신들은 불의 장벽 너머에서 나타난 괴물들이라 여겨졌다.
파니릴리는 카르낙을 균형을 위한 추라 하였다. 신이 보낸 사자라고. 그렇다면 뜨거운 사막도, 그 사막에서 불어와 세상을 집어삼키는 이 불길도 모두 신의 창조물일까. 그녀를 대적하는 순수한 악마저도 그녀가 의도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죽어 없어져야 하는 벌레가 아니라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신에게 의미를 부여받은 그녀의 아이일까. 다른 엘버그인과 다름없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고귀한.
“저… 저길 봐요…”
릴리의 뒤에서 바르시가 멍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늑대… 늑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