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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21화 (221/231)

221화

본성으로 들어오라는 브리다스의 명령에 크리벳은 양가감정을 느꼈다. 살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그러한 안도감을 느낀 자신에 대한 절망감. 그 외에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는 좌절감이었다.

만일 브리다스가 먼저 부르지 않았다면 그는 생명을 담보로 카르낙 발투만을 본성으로 들일 방법을 강구했어야만 했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데 크리벳에게 악의 무리를 인도한 오막이란 놈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고 무슨 핑계를 대고 본성을 찾을지 머리를 쥐어짜 내느라 진이 다 빠지던 차에 정말이지, 하늘이 도운 격이다.

“이쯤 되면 알기어스 여신이 널 사랑한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카르낙?”

자할이 허리춤의 장검을 매만지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곱씹어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캘던의 화제도 피해, 롬비로 어떻게 들어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운 좋게 오막도 만났지, 본성에선 알아서 불러들여, 어떻게 이렇게 쉽냔 말이야.”

크리벳은 그의 모든 말을 부정하고 싶어 목이 썼다. 저런 짐승 같은 투로 놈을 아마네스가 사랑할 리가 없잖아. 다만 운이 좋다는 것만은 인정한다.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벌레 놈이었다. 그 사실은 본인은 자각하고 있을까? 크리벳은 단단한 카르낙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곧고 시원하게 뻗은 콧날 아래 보기 좋은 입매는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덤덤하고 태연한 표정이었다. 감격하지도 의심하지도 그렇다고 당연하다고 여기지도 않는 듯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에는 다만 어떤 결기만이 느껴졌다.

카르낙은 잘 벼린 칼을 다시 검집에 넣고 시종들이 건네준 하얀 로브를 몸 위에 걸쳤다. 톱니 모양의 소매가 수행 중인 교구의 신학생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니 피부색만 잘 가린다면 별다른 의심 없이 입성할 수 있을 터였다.

“최대한 몸을 숙이시오.”

“…뭐?”

자할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크리벳은 더듬거리며 말을 정정했다.

“최… 최대한 몸을… 숙… 숙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할 테니….”

“뭐야. 그 정도는 알아. 우리가 무슨 병신인 줄 아나….”

크리벳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그자에게도 목숨이 달린 일이다. 자할. 잘못되면 그도 살아남기 힘드니까.”

카르낙이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괴상한 모양새였으나 크리벳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 맞습니다. 저,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지 않다니. 신을 모시는 사제 놈 주제에. 신의 뜻을 받들어 세상사를 주관하는 자라면 좀 더 삶과 죽음에 초연해야 할 것이 아닌가. 사막에 살 때에는 모든 투로들이 그러했다. 언제 어떻게 끝장이 날지 모르는 삶을 살며 모두가 인생사에 초연했었다.

대륙에 올라와 보니 그 잘나고 고매하신 엘버그인들의 정신력은 투로와는 비할 바 없이 나약했다. 늘 저들을 쫓고 죽이고 때리고 채찍질하던 놈들이 말이다. 자할은 거기에서 오는 허탈함을 잘 견디지 못했다.

이런 자들에게 짓이겨졌던 자신의 과거가, 혹은 짓밟혔던 동지들의 무수한 생명이 못 견디게 부끄러웠고 여전히 그랬다. 좀처럼 무뎌지지가 않는 감정이었다.

“걱정 마라. 멍청한 사제여. 당신의 여신이 카르낙 발투만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것 같으니 그의 옆에만 딱 붙어 있으라고. 그러면 아마 불어 닥치는 화마도 네놈을 피해 갈 테니.”

자할이 비아냥거리며 카르낙을 따라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 공관 앞에 대기 중인 황금빛 마차에 올라섰다. 크리벳의 맞은 편에 커다란 모자를 뒤집어쓴 카르낙이 자리를 잡았고 자할은 마차의 뒤편에, 자파는 마부와 함께 마차의 앞에 앉았다.

마부는 영문을 몰랐고 그 외에는 모두 투로였으니 크리벳은 지독한 외로움과 두려움에 휩싸여 바짝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멀리 창밖으로 노을처럼 붉은 하늘이 보였다. 그 거대한 색이 모두 불길이 반사된 빛이라니 좀처럼 믿기지 않아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신음했다.

그러고는 카르낙을 쳐다보았다. 독특한 보라색 눈동자에 붉은빛이 어려 있었다. 화마도 그를 피해 간다니, 정말일까. 본디 사막의 투로들은 불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들이 나타나며 엘버그는 타락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점점 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투로야 말로 불길을 몰고 다니는 존재이지 결코 불길을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저 불길은 카르낙 발투만을 따라 이곳에 도착했다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불길이 닿는다고 보아야 이치에 맞다.

그러니 착각일 게 분명해. 아마네스 님이 그를 아낀다는 그 오만한 생각도, 그 모든 것을 마치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여신의 존재 자체를 허구라고 여기는 듯한 이 사내의 태도도. 전부 다.

본성으로 향하는 내내 장대비가 쏟아졌다. 축축한 소나기가 불길을 잠재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마치 물줄기가 기름이라도 되는 듯 불길을 더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다.

그때쯤부터였다. 롬비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길목마다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고 모두 세간살이를 이고 진 채 불길의 반대편으로 제 가족의 손을 잡아 끌어댔다. 전쟁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차는 본성에 당도하기 전에 길을 잃었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인파로 오도 가도 못한 채 길가에 붙들려 있기를 한참, 보다 못한 카르낙이 크리벳을 마차에서 끌어내 발바닥에 얼얼할 때까지 걷고 또 걸어서야 도개교를 지나 본성에 다다를 수 있었다.

혼란스럽기는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내벽을 따라 병사들이 줄을 지어 도열해 있었고 군마와 짐차, 온갖 종류의 생필품을 가득 실은 궤짝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들이 탈출을 준비 중이라는 것을.

“브리다스 경은 어디에 계시오?”

크리벳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쓸모도 없는 질문에 경비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모릅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워낙 정신이 없는 때라….”

그러며 그는 타오르는 붉은 빛을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얼굴이 파리했다. 어떻게든 문을 지키고 서 있긴 하지만 그는 아주 작은 자극에도 곧 튀어 나갈 듯 위태로웠다. 금방이라도 창과 칼을 버리고 멀리 달아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끝낸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카르낙은 마음이 급해졌다. 우왕좌왕하며 설치는 꼴을 보아하니 이미 성은 통제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러다가 파니릴리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더는 지체할 수 없어 그는 크리벳을 남겨 두고 걸음을 옮겼다.

“아니, 저.”

멀어지는 기척을 느끼고 크리벳이 뒤를 돌아보았으나 몇 번 손을 휘적여 보였을 뿐,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다만 경비병이 이상한 낌새를 차리지 못하게 우아하게 목례를 한 후 태연하고 조급한 발걸음으로 그들을 따라갈 뿐이었다.

자할과 자파가 잰걸음을 하는 카르낙의 뒤에 바짝 붙었다.

“파니릴리를 찾아.”

그가 짧게 명령하자 둘은 민첩하게 양방향으로 갈라졌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은밀하고 조용했다.

크리벳은 바지런히 그의 뒤를 따랐으나 곧 놓쳤다. 너무 빠른 그의 걸음걸이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어 결국 아예 자리에 멈춰서서 헐떡이며 숨을 고르고는 예배당으로 향했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어차피 이미 본성은 아수라장이니 별일도 아닐 것 같았다.

카르낙은 은밀히 움직여 본성의 주탑에 올랐다. 가장 꼭대기 층에 브리다스의 침실과 그의 서재가 있을 테니 파니릴리도, 테이먼 테르조도 분명 그 가까이에 있을 터였다.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이 감돌았고 경비는 더욱 삼엄했다. 재고 따지며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카르낙은 로브를 벗어 던지고 곧바로 장검을 빼 들었다. 그러고는 닥치는 대로 베어냈다. 소란한 가운데 칼끼리 맞부딪히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경비병 하나가 쓰러지며 계단을 밝히던 횃불 하나를 놓쳤다. 투르르르, 바닥을 구르던 것이 끝내 화르륵 소리를 내며 건초에 옮겨 붙었다. 습하고 눅눅하던 것이 시꺼먼 연기를 뿜으며 타들어 갔고 매캐하고 구역질나는 냄새를 피워 댔다. 댕, 댕, 댕, 댕. 누군가 다급하게 종을 울렸다. 적의 침입을 알아차렸다는 신호였다. 망설일 것도 없이 카르낙은 굳게 닫힌 방문을 몸으로 밀고 들어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금속 자물쇠가 맥없이 뜯겨 나갔다.

“…….”

침실에 브리다스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텅 빈 것 역시 아니었다. 아비의 방에는 그의 딸이 있었다. 그악스러운 눈동자를 파리하게 흔들며 손에 든 금붙이를 바닥에 털썩 떨구었다.

“코르넬리오.”

카르낙이 기억을 되짚어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부르르, 이베트가 입술을 떨었다.

“…투로….”

환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 자신이 그의 환영을 불러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끔찍한 일을 앞두니 가장 끔찍한 기억의 주인공을 불러낸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저어도, 정신을 집중해도 카르낙의 환영은 사리지지 않았고 그제야 이베트는 눈앞의 사내가 실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멀쩡히 두 발을 딛고 서서 여전히 압도적인 강인함을 뽐내며. 피를 뒤집어쓴 채 일렁이는 생명력으로 다리 힘이 풀리고 숨이 막히게 만들었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죽었어야 하잖아. 진작 죽었어야. 캘던성에서 그 불길에 타 죽었어야 그래야 맞잖아. 신이 있다면, 세상에 정의가 있다면, 그렇다면 그는 그렇게 끔찍한 고통 속에 죽었어야 맞는 거다.

“내 아내. 어디 있어?”

“…….”

카르낙이 파니릴리를 들먹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로 살아서 지금 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어… 넌 진작에 뒈졌어야 하잖아.”

“내 아내.”

아내? 아내라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 버린 사내가, 여자 하나 찾겠다고 제집 앞마당까지 기어들어 왔다. 멀쩡히 서서, 끔찍이도 멀쩡한 몰골로 저와 마주해도 무엇 하나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저에게 한 끔찍한 짓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억울했다. 분노로 온몸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어떻게 이 벌레 놈 하나를 죽이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가.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어떻ᇂ게 이렇게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하게, 이토록 당당하게 위용을 뽐내며 나타날 수가 있는가.

“네 아내는 죽었어!”

이베트는 악다구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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