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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17화 (217/231)

217화

아둔하고 미련하기로서니, 그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어떻게 제 어미의 기분은 살피지도 않고 투로의 계집을 위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할 수 있어. 감히 어떻게. 열 달을 품고 내 배 아파 세상에 낸 내 자식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나를 배신할 수가 있어, 끓어오르는 심정을 한꺼번에 입에 담아 내뱉을 수 없어 제 어금니를 사리무는데 방 안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세일린! 세일린!!!”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며 울부짖는 소리가 낯설어 이베트의 분노가 일순 소강되었다. 흐느끼며 떠는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베트는 바닥에 엎어진 제 아이를 스쳐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핏물이 제 발 앞까지 번져 있었다. 그녀는 핏물을 따라 칼에 꿰뚫린 채 늘어져 있는 세일린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는 파니릴리를 보았고, 혼란스러운 듯 제 머리를 손으로 짚고 있는 테이먼도 보았다.

그는 여전히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분노에 휩싸인 채, 그는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스스로에게 당위성을 부여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일은 벌어졌는데 수습할 수 없을 때, 으레 모든 사내들이 지어 왔던 그런 얼굴을 지은 채 번지는 핏물로부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테르조 님.”

그러다가 이베트가 탄식하듯 저를 부르자 그제야 흠칫, 몸을 떨고는 부정하듯 도리질을 하다가 애써 침착하려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날 죽이려 했어.”

“…….”

“감히 나를 죽이려 했다.”

바닥에 떨어진 도자기의 파편들. 테이먼의 목덜미와 목깃을 적시는 핏물에 이베트는 이 사달의 전말을 쉽게 파악했다. 테이먼은 제 검을 거두어 갔다. 살갗을 찢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들어갔듯, 살갗을 찢으며 그녀의 몸에서 물러났다.

울컥, 다시 피가 솟구쳤다. 흘러나오는 것을 틀어막을 도리가 없어서 릴리는 그저 울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는지, 어떻게 해야 그 피를 멈출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손을 놓고 바라만 보았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의 핏물을 닦아 줄 수도, 거두어 낼 수도, 그렇다고 그 늘어진 몸을 따듯하게 끌어안아 줄 수도 없었다. 뜨겁고 선득한 핏물이 두려웠다. 그것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생명이 제 피부에 흐르는 것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도와….”

파니릴리는 꺽꺽 소리를 내며 더듬거렸다.

“…누가… 누가 도와… 도와줘요…. 제발….”

보다 못한 경비병 중 하나가 나섰다.

“괜찮으십니까?”

“세일린…. 세일린을….”

살아 있는지, 맥이 뛰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죽었다.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정도였다. 다만 새하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더듬거리는 파니릴리가 안쓰러워 속이 쓰렸다. 그는 부릅뜬 세일린의 눈을 조용히 감겨 주고 바닥에 떨어져 절반가량 젖어 버린 침대 시트를 끌어다 시체 위에 덮었다. 그러자 경비병 하나가 더 나섰다. 검을 허리에 찬 검집에 넣고 번쩍, 시체를 안아 들었다. 온기가 빠져나간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

파니릴리는 무기력하게 앉아 있다가 그 하얗고 고운 손을 저도 모르게 붙잡았다. 그 손만 보자면 세일린은 죽은 것 같지가 않았다. 꼭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치워.”

이베트가 짧고 날카롭게 명령했다. 경비병은 파니릴리에게서 냉큼 물러섰다. 붙잡고 있던 손이 허무하게 멀어졌다. 시신이 되어 낯선 사내의 손에 짐짝처럼 들린 세일린은 그렇게 방을 빠져나갔다. 남은 것이라고는 아직 온기를 품은 핏물들뿐이었다.

카르낙이 있었다면. 그가 있었다면. 내가 아니라 그가, 그가 살아 세일린의 곁에 있었다면 결코 그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파니릴리….”

테이먼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흠칫 떨며 뒷걸음질 쳤다. 짐승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아니 악귀, 아니. 꼭 벌레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테이먼은 더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지 못했다.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여 조각조각 갈라진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호흡이 버거웠다. 그것을 온전히 받아 내고 참기가 힘들어 그는 몸을 휙 돌려 외면했다. 고집스러운 걸음으로 밖으로 나서는데 바르시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질린 얼굴로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파니릴리와 다를 것 없는 눈이었다. 혐오와 두려움이 가득한.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내가 한 짓은 그런 게 아니야. 어금니를 사리물고 아이를 외면했다. 되짚어 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외면해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테르조 님.”

이베트가 뒤따라 나와 그를 불렀다. 기이한 일이다. 언제나 혐오하던 여자였는데. 비열하고 믿을 수 없는 여자라 여겼는데 어쩐지 그녀를 보는 순간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안심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그랬다. 저를 한번 쳐다보고 휙 몸을 돌려 갈 길을 가는 그를 이베트는 바지런히 따라잡으며 물었다.

“어찌 수습할 생각이세요?”

“무슨 수습?”

무슨 수습? 그걸 몰라서 물어?

“방금, 경은 자신의 아내를 죽였습니다. 알고 계세요?”

“날 먼저 공격한 건 그 여자야!”

치부를 들추자 그가 발끈했다.

“누구도, 날 위협하는 자는 살려 두지 않을 거야! 그 누구도! 감히 내게 도전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어!!”

위태로운 낯빛이었다. 이베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테이먼은 오만하였어도 늘 엘버그의 도덕과 정의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롬비에서 다시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인은 죽일 수 있다. 노예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엘버그의 관습을 따른다면 아무리 제 아내가 저를 위협했어도 죽여서는 안 되었다. 재판에 회부되어 원로와 사제들의 처벌을 따라야만 했다. 그 결과가 설령 처형일지라도.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일 테다. 저것 봐.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잖아.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어 올리고 숨을 씨근덕거리잖아. 이 나라에서 자신의 아내를 처참하게 죽인 이는 딱 한 명이었어. 알기어스 왕. 테이먼, 당신은 늘 그가 되고 싶어 했지. 늘 그의 뒤를 이어 그 자리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믿었잖아. 그리고 이제는 그 광증까지 물려받으려는 거야?

“내일.”

그가 힘주어 말했다.

“내일 성전으로 간다.”

그리고는 씨근덕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늘 빛으로 나아가겠다 하였다. 언제나 달빛을 따라 걷겠다고.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어둠으로 향하고 있었다. 새까맣고 숨 막히는 어둠 속으로 말이다.

***

멀리, 깊고 끝없는 광맥을 품은 산등성이의 가파른 낭떠러지 아래로 롬비가 보였다. 견고하고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건물의 지붕은 전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푸르르, 말이 투레질을 했고, 자할은 말고삐를 당기며 카르낙의 옆에 나란히 섰다.

“쥐 새끼 하나 들어갈 구멍도 없겠는데.”

자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할의 말을 인정했다.

“왜 이곳이 테이먼 일당의 마지막 요새가 되었는지 알겠군.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도 승산을 점치기 힘든 구조야.”

그래서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지. 이 땅을 브리다스에게 넘긴 빌어먹을 알기어스 왕을 저주하면서 말이야.

“저곳에 릴리가 있어.”

그러니까 돌아갈 수 없다. 성벽을 기어올라서라도 반드시 저 안에 들어가야 했다.

“좋아. 외벽은 어떻게든 통과한다고 치자고. 내성엔 어떻게 들어갈 건데? 롬비는 여전히 엘버그의 노예 관습을 따르는 지역이고, 우린 누가 봐도 투로 나부랭이들인데.”

“어이.”

자파가 말하는 자할의 옆구리를 쿡쿡 눌렀다. 그들은 자파가 쳐다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제 하나가 장정 네댓을 이끌고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지친 몰골이나 추레한 행색을 보아하니 순례자나 여행객은 아닌 듯 보였다.

카르낙이 말 머리를 돌려 그에게 다가갔다. 사제는 크게 숨을 고르다가 저에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보고 흠칫, 말고삐를 죄었다. 조랑말이 불안스레 제자리걸음을 했다. 봇짐을 진 장정들이 곁눈질로 그들을 살폈다. 분명 셋 모두 투로였는데, 야만인 같은 사내 둘과 달리 선두에 선 자는 차려입은 복장이나 모양새에서 제법 귀티가 났다.

무엇보다 훤칠한 외형과 날카로운 눈매가 예사롭지 않아 바라보고 있자니 모골이 송연하여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것은 사제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카르낙을 보며 더듬거렸다.

“누… 누구….”

그러다가 기억해 냈다. 아돌리아 광장에 걸려 있던 왕의 초상화를.

“국… 국왕, 폐….”

“롬비로 가나?”

사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오는 길이야?”

“저, 저희는 아돌리아 사람들입니다.”

아돌리아. 멀루아와 사막의 중간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정치적으로 쓸모가 없을 만큼 땅덩어리가 작았고, 그 때문에 영주가 없었으며 에나가 파견한 그의 직속 사제가 관리한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런데 사제가 남루한 행색으로 이곳 롬비까지 왔다는 건….

“화제로… 마을 전체가 소실되었습니다.”

아아, 하고 카르낙이 신음했다. 지금쯤 그 산불이 멀루아까지 번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에이가와 로로는 화마를 피해 북쪽으로 씩씩하게 향하고 있을까. 핀과 루이스가 있으니 어떻게든, 어떻게든 그 땅에 당도하겠지. 투로의 형제들도. 그들 역시 분명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아 북쪽으로 향할 것이다. 모두 이 치열한 재난 앞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책임지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부디 모두 무사하길. 단 하루, 한시라도 부디 조금 더 오래 살아남길.

사제가 말을 이어 갔다.

“화마를 피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보시다시피 전 식솔을 챙겨 롬비로 향하고 있지요. 캘던 역시 화재로 도시가 전멸했다 들었습니다.”

“…….”

“그나마 안전한 땅은 역시… 롬비뿐인가 봅니다.”

“이곳을 거쳐 성전으로 향할 생각인가?”

“…예, 폐….”

“그렇다면 나를 좀 도와야겠다.”

“…예?”

자할이 씩 웃으며 말에서 휙 뛰어내렸다.

“버거워 보이는데? 네 장정들 말이야.”

버거워? 사제는 제 식솔들이 짊어진 짐들을 눈으로 훑었다. 글쎄… 그렇게 짐이 버거워 보이지는….

“이름이 뭐지?”

카르낙이 물었다. 왕의 성정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가 있다.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어떤 불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두려웠다.

“저는… 저는 오막이라고….”

“오막.”

카르낙이 힘주어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마치 살생부에 적히는 것 같았다.

“네가 우리를 성안으로 데려다줘야겠다.”

“…….”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영문을 모르는 오막은 눈을 끔뻑거렸다.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소중한 목숨은 지키고 싶은데 어째서인지 이래도 저래도 위태로울 것 같아 그의 낯빛이 파리하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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