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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16화 (216/231)

216화

그때였다. 벌컥,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어둡고 건조한 방 안으로 커다란 실루엣이 비틀거리며 미끄러져 들어왔다. 더블릿 위에 매달린 장검과 갖가지 쇠붙이들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절그렁 소리를 냈다.

그는 혼탁한 청색 빛 눈으로 촛불에 하늘거리는 여체를 훑었다. 테이먼에게서는 알싸한 포도주 향이 지독하게 풍겼다. 파니릴리는 제가 얇은 슈미즈 한 벌 차림이란 사실을 자각하고 냉큼 침대 시트를 끌어 제 몸에 감았다.

늘씬한 여체를 훑던 눈은 경계와 냉소로 가득한 여인의 시선과 마주한 뒤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이 지나자 제가 남긴 상흔이 더 처참한 까닭이었다. 이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파니릴리의 예쁜 얼굴을 이렇게 망가뜨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 수군거릴지 뻔했다. 테이먼 테르조가 감히 아마네스 여신의 아이를 때려 그녀의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혀를 차겠지. 아닌 척하면서도 뒤돌아서서 그를 경멸 어린 눈으로 힐긋대리라.

잔인하고 비정하고 난폭한 사내라 욕을 하겠지. 하지만 난 그런 사내가 아니야. 난 언제나 품위 있고 우아하며, 언제나 다정하고 사려 깊은 신사라고. 누군가, 파니릴리를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나라고.

“마음이 아프군.”

그는 제 가슴을 손으로 쓸며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파니릴리. 마음이 너무 아파.”

“…….”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

“우린 피로 이어진 가족이잖아. 그렇지? 넌 내 사촌 누이이지. 우린 사실 누구보다 다정하고 끈끈할 수 있어.”

파니릴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하는 말 따위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가 자신의 방에 예고도 없이 쳐들어온 것이 두려워 어서 빨리 사라져 주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테이먼은 그녀의 바람과 달리 좀 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릴리는 더더욱 뒤로 물러나며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네가 마음을 열고 날 받아들인다면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아주 많아.”

“…….”

“알잖아. 내가 바라는 건 오직 네 마음이란 것.”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게 줄 마음 같은 건 없어요.”

테이먼은 굳은 얼굴로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파니릴리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한때 당신에게 마음을 담아 호의와 친절을 베푼 적도 있죠. 하지만 그것이 내게 어떻게 돌아왔는지 나도 알고 당신도 알죠.”

“넌 나를 네 발치에 무릎 꿇리려 했어.”

“당신을 살리려 했어요.”

“그 벌레 놈을 내 위에 두려 했잖아.”

“당신은 왕이 아니니까요.”

“난 왕이야!”

테이먼이 소리를 꽥 질렀다. 내내 차분하던 얼굴이 다시 격앙되었다. 푸른 눈동자에 기이한 이채가 어렸고 단단한 손이 무쇠처럼 말렸다.

“모르겠어? 파니릴리? 그게 내 운명이야! 신이 점지해 준 내 운명이란 말이야! 또 그게 네 운명이야! 투로 놈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것! 그게 바로 네 운명이라고!”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뒷걸음치며 가까이 오지 말라 소리 지를 여유조차 없었다. 쏜살같이 다가온 테이먼이 파니릴리의 두 어깨를 꽉 붙들었다. 악력에 신음이 절로 났다. 그는 한동안 어둠 속 촛불처럼 드리운 파니릴리의 얼굴을 꿰뚫을 듯 내려다보았다.

두려웠다. 저를 붙든 악력이 너무 강했고, 시선은 타는 듯했다. 간신히 참고 있는 듯 부들부들 떨리는 그 눈동자가 취기를 빌어 곧 폭발할 것 같았다. 마치 그의 온몸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머지않아 더 거대해진 그가 곧 방 안을 꽉 채우고 저를 압사시킬 것 같아 겁이 났다.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공포에 질려 굳은 얼굴로 몸을 비틀자 마침내, 테이먼이 그녀를 들어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파니릴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입을 맞추기 위해 몸을 숙였다. 릴리는 도리질을 했다. 놔 달라고 연신 사지를 틀며 비명을 지르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하체를 비집었다. 얇은 슈미즈 아래 허벅지를 더듬어 올라오자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

릴리는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꼭 사라진 사람을 찾아 헤매듯 했다. 그러나 테이먼은 듣지 못했다. 눈앞의 여자를 어떻게든 차지하겠다는 욕망 이외에는 모든 것이 거세당한 채로 그는 파니릴리의 몸을 비집지 못해 안달이었다. 너를 차지해 내 아래에 두려면 이 방법뿐이라고. 지배욕에 물든 욕망은 결코 뜨겁지 않았다. 차고 시리고 잔인했다.

벌컥, 세일린이 예고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찢어지는 듯한 왕비의 비명과 그녀를 압살시킬 듯 깔고 앉아 우악스러운 손길로 여체를 매만지는 테이먼의 모습을 마주하자 피가 식었다. 결혼 첫날밤, 그가 저에게 했던 짓이 떠올랐다.

“안 돼!”

세일린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감히 그런 짐승 같은 짓을 하게 둘 순 없어. 맨손으로 달려들 순 없었다. 맨몸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니릴리가 쓰고 남은 물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망설일 것도 없이 세일린은 그것을 들어 테이먼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쏟아졌다. 테이먼이 억, 하는 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엎어졌다.

“왕비 전하!”

세일린은 그의 무거운 몸뚱이를 밀치고 그 아래에 깔린 파니릴리를 끄집어냈다. 겁에 질린 여체가 바르르 떨며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세일린은 두 손으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처럼 안긴 몸을 연신 두 손으로 쓸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괜찮으세요? 전하?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파니릴리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일린은 나무 의자 위에 걸린 숄을 끌어 덜덜 떠는 파니릴리의 몸에 둘러 주었다.

“나가요. 여기서….”

여기서 나가야 한다. 어쨌든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단 생각에 몸을 일으키고 파니릴리를 일으켜 세우려는데 머리채가 잡혔다. 예고 없이 목이 뒤로 꺾였고 그대로 붙들려 끌려갔다. 비명이 났는데 제 입에서 난 소리인지, 아니면 파니릴리가 내지른 소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파니릴리가 ‘세일린!’ 하고 외친 것을 보니 아마도 제 입에서 난 소리 같았다.

테이먼은 세일린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젖은 제 뒤통수를 매만졌다. 손바닥에 핏물이 묻어났다. 그의 눈이 뒤집혔다.

“…감히!”

감히, 남편에게! 주군에게! 감히 엘버그의 왕에게 이런 상흔을 남기다니! 손을 휘둘러 그녀를 바닥에 내던지고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안 돼요!”

파니릴리가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테이먼의 검은 망설임 없이 세일린의 몸을 갈랐다. 스르렁, 하는 소리가 나더니 세일린의 등이 뜯어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아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파니릴리가 그에게 뛰어들어 팔을 붙들었다.

“테이먼!”

걸리적거렸다. 몸을 비틀고 팔을 흔들어 그녀를 던지듯 밀쳤다. 파니릴리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안 돼!!”

릴리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테이먼이 검을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쿵, 소리를 내며 나무 바닥에 그 끝이 닿았다. 세일린의 목을 꿰뚫은 채였다.

“…….”

파니릴리는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엉덩방아를 찧으며 입을 벌린 채 넋을 놓았다. 세일린은 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애절하게 부릅뜬 눈은 깜빡이지도 않았다. 모든 순간이 거짓 같았다. 꼭 꿈 같았다.

“전… 하….”

숨이 멎기 직전, 세일린이 가쁜 숨을 내뱉으며 그녀를 불렀다. 억울함도, 두려움도. 서러움도, 안타까움도 없다는 듯. 마치 그 모든 게 다행이라는 듯 그녀는 한숨 쉬듯 저를 부르고, 그리고 그대로 정지했다. 그게 다였다. 그것이 끝이었다. 세일린도, 그녀의 길 잃은 연정도, 파니릴리를 향한 애달픈 충심과 그로 야기된 죄악감도 그렇게 종말을 맞이했다.

“…….”

꿈이야. 꿈이야. 꿈인 거야.

이베트의 방으로 부르지도 않은 병사 두 명이 들이닥쳤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머리를 빗어 내리는 도중, 난데없는 방문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이베트 님께서 저희를 찾으셨다고….”

“누가…?”

이베트는 그들이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저같이 귀한 사람이 널리고 널린 병사 따위를 눈에 담고 다닐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녀는 심지어 제 방 앞을 지키는 병사들의 얼굴도 알지 못했다.

“누가 너희를 불렀단 거야?”

“…바… 바르시 님께서….”

바르시? 이베트가 손을 들어 빗질을 멈추게 했다. 정성스레 금발 머리를 빗어 내리던 시녀는 조용히 주인에게서 물러났다.

“바르시가?”

“예…. 저희는 바르시 님께서 이베트 님이 저희를 찾으신다 하시기에….”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 모두를 내가 찾는다고 했다고?

“너희, 본래 어디를 지키던 자들이지?”

“…저희는 본래 왼쪽 성탑을 감시하던 자들이온데… 영주님의 명으로 왕비 저…. 아, 그러니까 파니릴리 발투만의….”

이베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바르시, 이 덜떨어진 어린애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설마, 감시병을 따돌리고 파니릴리의 도주를 도우려는 거야? 서둘러 가운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서자 얼떨떨한 얼굴로 병사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를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설마. 설마 파니릴리가 도주했을 리는 없다. 롬비 같은 천해의 요새를 여자 혼자, 맨몸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러니 설령 시도를 했다 해도 성공하진 못할 거다. 괜스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면서도 다만 불쾌했다. 사내들이란 나이와 지위를 막론하고 왜 그 계집이라면 어떻게든 돕지 못해 안달인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둘러 방을 빠져나와 성의 서편으로 향했다. 볕이 잘 듣지 않는 후미진 곳이라 아무리 사람의 손길이 닿아도 특유의 서늘하고 음침한 기운이 언제나 감돌아 경계해야 할 이를 가두고 감시하기에는 적격인 곳이었다.

“바르시.”

이베트는 파니릴리의 방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제 아들을 차가운 목소리로 불렀다. 아이는 제 모친을 보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경비병을 속여 보낼 때부터 진즉 예상한 일이었던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이베트는 그것이 저에게 들켜 두려움에 휩싸인 까닭이라 생각하여 참으로 덜떨어지고 한심한 아이라 여겼다. 이베트는 아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손을 치켜올렸다. 그러고선 무엇도 묻지 않은 채 내리쳤다. 퍽, 소리를 내며 아이가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제 아들에게 무참히 손찌검을 하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는 것을 그녀의 시종이 붙잡았다.

“이베트 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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