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그가 뭔가에 홀린 듯 다가왔다. 손을 붙잡는 것도 모자라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붙이고 급기야 입이라도 맞추려는 듯 얼굴을 맞대려 했다. 파니릴리는 그를 밀치려 안간힘을 썼다.
“테이먼!”
그러나 테이먼은 오히려 신음하듯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더 몸을 붙여 왔다. 그런 그를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외면하려 몸을 돌릴 뿐이었다. 간신히 그를 밀쳐 냈다. 약간의 틈이 벌어졌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냅다 뺨을 후려쳤다. 짝!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테이먼의 고개가 한쪽으로 처참히 돌아갔다. 내려친 손이 정에 맞은 듯 욱신거려 릴리는 신음하며 제 손목을 쥐었다. 고통에 절로 신음이 났다.
테이먼은 따끔한 제 입가를 매만졌다. 손끝에 약간의 피가 묻어 나왔다. 입술이 터진 것이다.
“너….”
테이먼의 낯빛에서 여유가 걷혔다. 눈동자는 싸늘하게 얼어붙었고, 그의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손을 올려 파니릴리가 저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러나 그 완력은 완전히 달라 파니릴리는 몸을 휘청이며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자코 있던 병사들조차 크게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파니릴리가 바닥으로 고꾸라지자 테이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비로소 깨달은 듯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파… 파니릴리.”
“…….”
충격이 컸다. 누군가에게 맞아 본 기억이 없었다. 사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그 잔인하고 비정하다는 카르낙 발투만조차, 저를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 그녀에게 손을 올린 일이 없었다.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언성을 높이고 폭언을 퍼부었을지언정, 진실로 화가 나 그녀를 죽일 듯이 위협했을 때조차 그는 한 번도 저에게 신체적인 폭력은 행사한 일이 없었다.
처음엔 얼이 빠졌고 그다음엔 몸이 떨렸다. 숨이 턱 막히고 그의 작은 몸짓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치게 되었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두려움에 질려 바르르 떨 뿐이었다.
테이먼은 움찔 떠는 파니릴리를 보며 미안하단 말 한마디 내뱉지 못했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이후엔 이미 일이 벌어진 후였고, 행위는 너무도 순간적이었다. 내가 왜? 내가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 그는 초조하게 제 뒷머리를 긁으며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네가, 파니릴리, 네가 나를, 네가 먼저….”
네가 먼저 때렸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기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구질구질한 변명이 아닌가. 네가 날 때려서. 입술이 터져서, 피를 봐서. 그래서 똑같이 네 뺨을 때렸단 건 치졸하기 그지없는 변명이었다. 그야말로 사내답지도, 귀족답지도 못한. 명예도 모르는 천것이 내뱉을 만한 말이었다.
테이먼은 그녀를 향해 무심코 뻗었던 손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듯 침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녀를 데려가.”
“아, 예, 예.”
병사들은 주춤주춤 다가와 파니릴리를 조심스레 부축해 일으켰다. 연약한 몸은 아주 가볍게 들렸다.
“괘… 괜찮으십니까?”
병사 중 하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입가가 터졌음은 물론이요, 뺨조차 혈관이 터진 듯 선명한 붉은색을 띠었다. 파니릴리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먼은 비틀거리며 성안으로 향하는 파니릴리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짜증과 후회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
세일린은 종일 방 안을 이리저리 돌기만 했다. 넋을 놓고 앉아 있기도 해 보고, 종일 창밖만 바라보기도 해 보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도 해 보았지만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창밖으로 환한 달빛이 비쳤다. 뜨겁고 건조했던 한낮의 태양과 엇비슷하게 느껴져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세일린은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고 테이블 위에 놓인 미지근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밤이 깊어질수록 이상하게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너무 오랫동안 코르셋을 조이고 있는 탓일까 싶어 제 배를 움켜쥐고 느슨하게 숨을 골라 보았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테이먼이 저를 파니릴리와 강제로 떨어뜨려 놓은 지 벌써 나흘째였다. 그동안 왕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전혀 없다. 세일린은 파니릴리를 향한 테이먼의 집요한 관심과 집착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곁에 없는 사이 그가 왕비에게 해코지를 했을까 봐 내내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나날이었다.
왕비 전하는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그분의 시중은 누가 들어 주지? 식사는 거르지 않고 잘하고 계실까. 이 불볕더위에 혹 쓰러지시는 것은 아닐까. 그분의 심기를 살필 줄 아는 자가 과연 곁에 붙어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테이먼이 저를 떨어뜨려 놓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파니릴리가 고립되길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치고 나약해지도록, 그렇게 무너뜨려 제 뜻대로 주무르려 하는 것이다.
카르낙이 생각났다. 뜨거운 불길에 으스러졌을 그를 떠올리니 또다시 눈물이 나 세일린은 침대에 엎드렸다. 그는 혼자였다. 사랑하는 여인도 없이 고통스럽게 홀로. 저라도 그의 곁을 지켰어야 옳았다. 파니릴리가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면 그녀를 대신해 저라도.
카르낙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렸다. 그의 곁을 떠난 파니릴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아내가 그곳에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 안도하며 기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늑대처럼 일평생에 단 한 여자만 바라보는 사내. 그런 남자를 왜 떠났나요, 왕비 전하. 왜. 왜 그를 홀로 죽게 했나요. 나라면 함께 죽었을 거예요. 나라면 죽는 순간까지 그를 놓지 않았을 거예요. 달아나라 해도 달아나지 않았을 거예요. 혼자 살아 고통 속에 허덕이느니 차라리 그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을 거예요.
어두운 방 안에 갇혀, 달빛에 침식된 채 세일린은 끝없는 번민으로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고통스러운 상념의 끝은 결국 자책뿐이었다.
끼익. 날카로운 경첩 소리가 그녀를 침묵에서 깨웠다. 빼꼼히 열린 문 사이, 환한 빛이 방 안으로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세일린은 손가락 새에 파묻었던 머리를 들어 문간을 바라보았다. 아주 작은 실루엣이 보였다.
“…구스.”
세일린은 파니릴리가 부르던 아이의 이름을 기억했다. 늘 가엽다고 말하곤 했던.
“쉿.”
아이는 곧장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에 댔다. 세일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제 뒤를 살피며 방 안으로 몇 걸음 더 들어왔다.
“오전에… 테이먼 님을 봤어요.”
바르시는 침을 꿀떡 삼키고 조급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분이… 왕비님을 때렸어요.”
“…뭐?”
“왕비님을….”
그때를 떠올리며 바르시는 울먹였다. 창밖으로 분명 보았다. 테이먼이 파니릴리 왕비님의 얼굴을 힘껏 후려치는 것을. 그 둔탁한 소리와 왕비님이 잘린 가지처럼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도도 보았다. 바르시는 그 장면에 큰 충격을 받았다. 테이먼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저처럼 그녀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본 장면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무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어요. 아무도.”
분명 병사들이 있었는데. 지나가던 시종들도 보았는데.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돕지 않았어. 아주 오래전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어쩌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울기만 하던 자신도.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 마치 그때처럼 바르시는 벌벌 떨었다. 작은 아이의 몸과 마음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왕비님이… 왕비님이 제 곁에 있어 주길 바라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이걸 원한 건 아니에요.”
왕비님이 우는 것은 싫다. 늘 햇살처럼 웃길 바란다. 울면서 제 곁에 남길 바란 것은 아니다. 늘 웃으며 제 옆에 있어 주길 원할 뿐. 사내에게 맞는 여인은 언제나 운다. 늘 울고 언제나 화가 나 있다. 그런 여자는 자기 자식도 사랑해 주지 않는다. 어머니처럼. 마모되고 고갈되고 소진되어 누구도, 누구도 제 품에 담아 주질 않는다.
“테이먼 님이… 왕비님의 방으로 향하는 걸 봤어요.”
세일린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 테이먼 님이 또다시….”
“데려다줄 수 있어?”
“…….”
“왕비 전하가 계시는 곳으로 날, 날 데려다줄 수 있니?”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파니릴리는 잠자리에 들기 전 시종이 떠다 준 물로 손과 얼굴을 씻었다. 뺨에 물을 적실 때마다 욱신거려 그녀는 한껏 인상을 찡그리고 고개를 들어 제 얼굴을 살폈다. 턱 언저리부터 광대뼈까지 붉은 울혈이 져 있었을 뿐 아니라 오른쪽 눈의 핏줄도 터져 있었다.
새하얀 피부 덕분에 끔찍한 몰골은 더욱 선명했다. 정말이지 볼품없단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끔찍한 성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고, 누구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려 하지 않으니 그저 진이 빠질 뿐이었다.
“…이렇게 살려는 게 아니야.”
파니릴리는 거울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런 식으로 무기력하게 생명을 부지하려는 게 아니었다. 일찍이 죽을 각오를 했다. 알기어스 왕가가 뿌렸던 수많은 죄악을 목숨으로 속죄할 생각이었다.
그 세상에서 카르낙이 살았으면 했다. 발투만 왕가가 뿌리내리고 거친 곳을 깎아 다듬어 가며 새로운 세상을 열기를 바랐다. 아직 카르낙이 세상이 없다 믿고 싶지 않다. 아직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모든 정황이 그의 죽음을 가리키더라도 그래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집일 뿐이라는 생각과 그 희망마저 제거하면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절박함이 머릿속에 혼재되었다.
혹, 만에 하나라도 그가 세상에서 사라졌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세상이 멸망하길 바라지 않는다. 살아야만 하는 이들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기를. 그들은 꿈을 꾸고 성장하고 번성할 수 있기를. 아마네스 여신이 카르낙의 목숨을 거두어 갔다면 저 역시 더는 세상에 살 이유가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