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테이먼이 제 할 말을 마치고 방 밖으로 나간 후 세일린은 릴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도통 제 주인의 생각을 알지 못하겠다. 까닭을 알지 못하니 자신을 보내 달라는 계속되는 그녀의 간청 역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하. 그냥….”
세일린은 침을 한 번 꼴딱 삼키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캘던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냥 이곳에 머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하고 싶었다. 진정 카르낙 발투만이 죽었다면…. 그렇다면 더는 그녀를 돌봐 줄 이도 남지 않았으니 차라리 이곳에 머물며 테이먼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카르낙 발투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내뱉으면 어쩐지, 어쩐지 그것을 인정하고야 말 것 같아서. 제 마음이 이런데 파니릴리의 마음은 어떨지, 그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나 파니릴리는 단호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많은 사람들을 잃었어요.”
“…….”
“남은 이들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전하.”
세일린은 롬비로 오는 내내 그녀가 반복해서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가야 해. 내가 가야 해. 내가 가지 않으면 전부 불타고 말 거야. 날 보내 줘. 내가 사막으로 갈 수 있게 해 줘. 내가 가지 않으면 전부 불탈 거야.”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파니릴리는 초조한 낯빛으로 그 말만을 반복했다. 다시금 떠올려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전하께선 사막으로 가시면 안 돼요.”
“가야 해요.”
아주 잠시 그녀가 제정신인가 생각했다. 누구보다 영민하고 선명한 눈을 하고 있는데 내뱉는 말은 터무니없어서 아주 잠시 그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잖아요, 전하. 전하께서 사막으로 가시면, 그럼… 전하께선 살아남지 못하세요.”
혼자 그곳에 가 무엇을 어쩌겠단 이야기인가. 불길이 하게너의 영지를 집어삼켰다는 이야기를 진작에 들었다. 캘던을 불태우던 화마만 떠올려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 가겠다는 건 죽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더 살 이유도 없어요.”
“…….”
그렇게 말하는 파니릴리의 얼굴이 너무나 분명하고 단호하여 세일린은 잠시 말을 잃었다. 눈물을 떨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슬픈 빛도 아니었다. 그저 아주 단단했다. 수백 수천 번 두들긴 강철처럼 단단하고 육중하여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낯빛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사람은 도리어 눈물이 났다. 강해지기 위해 그녀가 견뎌야 했던 고통에 공명한 마음이 푸스스 부서져 내렸다.
“제 삶의 이유이시잖아요.”
“세일린.”
“저는… 전하 때문에 삽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가엽다 여기시고… 살아 주세요.”
비겁하고 부덕하고, 구질구질해져도 좋으니, 그렇다 해도 당신을 우러러볼 테니 부디 살아만 달라고. 살아서 내가 살아갈 이유가 되어 달라고. 세일린은 그렇게 이기적인 바람으로 그녀를 옭아맸다. 그렇게라도 파니릴리가 살았으면 좋겠다. 모두가 절명한다 해도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는 그녀가 되었으면 좋겠다.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세일린은 어깨를 흠칫 떨며 긴장했다. 그러나 잠시 후 문이 열린 뒤 등장한 것은 아주 작은 실루엣이었다.
“구스.”
파니릴리가 멍하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제 어미를 닮은 밝은 금발을 빛내며 아이는 두 손에 들린 쟁반을 파니릴리에게 내밀었다.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파이, 몇 종류의 과일, 따듯한 스튜와 작은 쿠키 몇 조각. 세일린은 아이에게서 그것을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파니릴리는 웃으며 아이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고마워, 구스.”
바르시는 헤헤 웃으며 제 코끝을 문질렀고 파니릴리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쿠션을 대고 앉으며 말했다.
“네가 무사히 모친의 품에 도착했단 이야기는 들었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사실 그렇지 않아요. 구스는 제 발끝을 바닥에 비비며 억지스레 제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고프리가… 길을 잘 찾아 주어서요.”
처음 어머니를 뵈었을 땐 모든 것이 잘될 것만 같았다. 이베트 코르넬리오는 저를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울었고 바르시는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더는 과거 따위, 거기에서 야기되는 고통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아이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이베트는 여전히 과거에 집착했다. 과거의 영광과 상처에 집착했다. 코르넬리오의 장자가 살아서 돌아왔을 때를 빼고는 단 한 번도 애정을 담아 그를 안아 주거나 머리를 매만져 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그를 엄하게 대했다. 모친을 대신해 정을 듬뿍 줄 유모 따위도 붙여 주지 않았다. 그 대신 그를 더 엄하게 대해 줄 선생들만 잔뜩 붙이고서는 언제부턴가 그에게 제왕으로서의 위엄과 냉철함을 가지라고 했다. 그것이 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럴 때마다 바르시는 발투만 왕가를 생각했다. 덩치 크고 무뚝뚝하고 때론 무서웠지만 언제나 따듯했던 거윈을 생각했다. 왁자지껄한 막사와 시시껄렁한 농담들. 거칠고 난폭한 근위대 병사들의 짓궂은 장난들.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고되고 힘든 일들만 해 댔었지만 그래도 잠자리는 늘 달았다. 그래도 모두가 따듯했다. 언제나 진심으로 대했었다. 왕비는 어머니보다 자상하고 친절했다. 늘 웃어 주었고 언제나 부드러운 손길로 제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맛있는 것을 숨겼다가 제 손에 쥐여 주고 언제나, 언제나 좋은 말만 해 주었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그리웠다. 차라리 포로였던 때가, 차라리 부모로부터 떨어져 남과 지냈던 때가, 차라리 그때가 더 행복했다. 그래서 파니릴리를 그렇게 찾았다. 그녀가 오면 정말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바르시에게 있어서 파니릴리는 그 모든 따듯함과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다만 곁에 가는 것만으로도 볕을 쬐는 듯 몸과 마음이 녹았다. 그렇게 빙벽 안에 갇혀 있던 것들이 그녀를 보자마자 쏟아져 나왔다. 바르시는 흐느꼈다. 훌쩍이며 눈물을 터트렸다.
“어머니가 절 용서하지 않으세요.”
아이는 끝내 참아 왔던 것을 쏟아 냈다. 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작은 몸을 안았다. 바르시는 더 많이 울었다.
“절 사랑하지 않으세요. 절 미워하세요. 저를, 저를 쳐다보지 않아요.”
“구스.”
릴리는 아이를 안고 쉬쉬 소리를 내며 얼렀다. 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미가 있을까. 예전엔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어미는 없다고. 그러나 이베트를 보았다. 그 차갑고 냉랭한 얼굴을 보았다. 혼탁한 안광은 잔인하고 맹렬한 빛을 띠고 있었고, 타는 듯한 분노만 가득했다. 그토록 눈부신 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그 빛을 꺼트리고 있었다.
“전 왕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전, 전 영주도 되고 싶지 않아요. 전 그냥, 그냥… 행복해지고 싶어요.”
왕비님과 있었던 때처럼, 차라리 거윈의 아래에서 구스로 있었을 때처럼. 맛있는 것을 먹고 재미있는 것을 하고 누군가에게 담뿍 사랑받으며 그저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
그런데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참아야 할 것도 견뎌야 할 것도 너무 많았다. 춥고 외롭고 힘들고 울고 싶은 날들뿐인데 사람들은 모두 참아야 한다고 했다. 다 참아야 한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강인한 영주가 되려면, 왕이 되려면.
“구스.”
세일린이 릴리가 부르던 그의 이름을 기억해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눈물을 훔치고 맑은 눈으로 세일린을 올려다보았다. 서럽고 가여워 잠시 목이 메었다.
“네가… 네가 왕이니?”
아이는 훌쩍거렸다.
“이젠, 이젠 아니에요. 이젠 테이먼 님이 오셨으니까…. 에나님이… 에나님이 돈을 줬댔어요. 테이먼 님 앞으로 엄청나게 많은 돈을요. 할아버지가 그게 필요하대요. 그 돈이 있어야 한다고… 어머니와 자주 싸우셨어요. 전 원하지 않는데…. 저를 두고 싸우셨어요.”
에나. 이 능구렁이 같은 작자. 세일린은 이맛살을 구겼다. 어째서 모두 이토록 쉽게 발투만 왕을 배신하는가. 그분은, 그분은 내가 본 중 가장 훌륭한 분이신데. 난폭하고 강압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분은 누구보다 따듯하고 순수하고… 누구보다 상냥하신 분이었다.
분노가 솟구쳤다. 에나를 향한 분노가 끝도 없이 솟구쳤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왕을 배신한 탓이야. 그 탓에 이 사달이 났어. 그 탓에 테이먼이 탈출하고 나도, 나도 여기로 끌려왔어. 페하의 죽음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분 곁에서 같이 죽지도 못했어. 아무것도 못 했어. 아무것도.
“…모두가 폐하를 버렸어요.”
세일린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모두가 버렸다. 모두가 그를 버렸다. 그 가여운 사내를. 그 눈부신 남자를. 단지 태생이 비천하다는 이유로. 다만 그것만으로 그를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모두가 버렸다.
“구스.”
릴리가 아이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눈을 맞췄다.
“난 이곳을 나가야 해.”
나가야 해? 어디를? 이 성을? 롬비를?
“…왜요?”
어째서요?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곳을 나가야 해요?”
“내가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질 거야.”
큰일? 바르시는 눈을 굴리며 과연 그것이 무슨 일일까 상상해 보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이제야 만났는데 저를 여기 두고 떠날 생각부터 하는 릴리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구스.”
릴리가 어르듯 다시 그를 불렀다.
“싫어요.”
아이는 발작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공포에 질린 듯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여기 머물러야 했다. 여기 있으면서 지금처럼 저를 달래고 얼러 주고, 따듯하게 어루만져 주고 웃어 주어야 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곁에 있으면서 늘 저를 챙겨 주어야 했다. 맛있는 것을 나누어 주고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제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주며 늘 친절하고 상냥한 말을 해야 했다. 안 돼요, 파니릴리 님. 파니릴리 님이 없으면 난 또 울 거예요. 난 또 힘들 테고, 또 외로울 테고, 또 숨도 못 쉴 만큼 괴로울 거예요.
“구스, 날 도울 사람은 너뿐이야. 미안해.”
미안해, 구스. 넌 아직 어린데. 하지만 내가 기댈 사람은 오로지 너뿐이야.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이도 오직 너뿐이야. 내가 나가야 네가 살아. 내가 죽어야 너도, 네 모친도, 네 혈육과 네 사람들도 모두.
“왕비님은 여기 머물러야 해요. 평생, 평생 나와 있어야 해요! 싫어요!”
아이는 고집스레 외치고 도망치듯 방을 뛰쳐나갔다. 릴리는 아이를 잡지도 못했다. 난처하고 절망적인 빛으로 다시 털썩 자리에 주저앉을 뿐이었다. 모두가 저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 닥쳐올 위험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몰라 이러는 건지 모두가 외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