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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11화 (211/231)

211화

테이먼의 포로로서 파니릴리와 세일린은 성의 낡고 오래된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들은 볕이 잘 들지 않는 방 안, 딱딱하고 볼품없는 침대 위에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세일린은 붉은 열상이 선명한 파니릴리의 손목을 안쓰럽게 매만졌다.

“연고를 발라야겠어요.”

“…….”

“이제… 이제 어쩌죠?”

이제 우린 어쩌냐고 묻는 목소리가 요원하였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이 묻어나는 어투에 릴리는 동요하지 않으려 세일린의 손을 꽉 쥐었다.

“전하, 어째서… 어째서 성을 빠져나오신 거예요. 어째서….”

어째서 발투만 폐하 곁을 지키지 않으셨나요. 어째서 홀로… 이 먼 곳까지 오셨어요. 왜 늘 이렇게 위험을 자처하세요. 어째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그저 평안하게, 안전하게 계시지 않으시나요. 당신처럼 고귀한 분이 어째서 이렇게 험한 일을 당하고 상처받고 매번 그 귀한 목숨을 위태롭게 하시나요.

릴리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알기어스라서. 그래서 빠져나왔다. 엘버그에 더는 알기어스가 존재해선 안 되니까. 마지막 한 톨의 생명까지 여신은 거두어 가려고 하니까. 그게 그녀의 뜻이니까.

그러니 성에도, 그의 곁에도 남아 있어선 안 된다. 그의 왕국은 그렇게 선왕의 흔적이 없는 곳에서 번성할 터였다.

“아니에요, 전하. 아닙니다. 이렇게 전하라도 사셨으니….”

그래. 그렇게 빠져나온 덕에 파니릴리가 살았으니, 살아서 그녀를 만났으니. 그러니 감사한 일이다. 그녀가 살아있음에, 왕의 곁에 없었음에. 그럼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왕을 생각하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죽었겠지. 분명 그는 죽었겠지. 그 불길 아래 여전히, 여전히 끔찍하게 불타고 있겠지. 그 꼴을 보며 의기양양할 테이먼을 떠올리니 분통이 터져 더 눈물이 났다.

“…그는 어쩔 계획일까요?”

세일린이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여전히 제 주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아마도 왕이 되려하겠죠.”

정적은 이미 죽어 없어졌다 여길 테니 어쩌면 이곳에서 당장 즉위식을 올리려 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다. 카르낙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면 그렇다면 어쩌면 테이먼이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찌되어도 상관없어. 다만 해야 할 일이 있어. 꼭 해야 할 일이.

곧 침실의 문이 열렸다. 화려한 색상의 의복을 차려입은 남자 하나가 들어와 자못 공손히 말했다.

“부인, 파니릴리 전하. 테르조 님께서 함께 식사하기를 청하셨습니다.”

경비병들의 감시 하에 끌려가듯 도착한 곳은 작은 홀이었다. 그곳엔 테이먼뿐 아니라 이베트와 브리다스 그리고 어린 바르시도 함께 했다.

“전하!”

아이가 환힌 얼굴로 반갑게 소리쳤다가 이내 모친의 표정을 보고 잦아들었다. 분명 그새 이베트로부터 한 소리를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베트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두 여인을 맞이했다. 내내 제 아들이 차지하고 있던 상석을 테이먼에게 빼앗긴 것이 영 불만인 듯 했다.

시종은 파니릴리를 테이먼의 옆자리로 안내했다. 응당 그의 아내가 앉아야 할 자리였기에 릴리는 그것을 거부했다.

“앉지 않겠어요.”

“…….”

테이먼이 무감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연한 척 했으나 행동이 거슬렸다. 그깟 자리가 뭐가 대수라고. 사람들 앞에서 꼭 저를 거부하는 듯 굴어야겠는가. 그러나 파니릴리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해 테이먼은 시종에게 신호를 주어 세일린과 파니릴리의 자리를 바꾸도록 했다.

안 그래도 불편했던 분위기가 숨이 막힐 만큼 갑갑해진 탓에 누구 하나 식기도 집어들지 못했다. 또 누구하나 그 분위기를 타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테이먼이 나섰다.

“악사를 하나 들이지.”

“아, 예!”

그의 명령에 시종 하나가 부랴부랴 홀 밖으로 나갔고 테이먼은 먼저 포크를 집어 들었다.

“이제….”

이베트가 먼저 말을 꺼넸다.

“발투만가의 여자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요? 왕이 죽은 마당에 아직도 ‘전하’라 칭해야 하나요?”

“…….”

구스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파니릴리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저를 얕보는 듯한 이베트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분명 구스를 닮아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여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오만한 자세와 표독스러운 눈동자는 구스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었다.

“테르조 님께서 왕이 되셨으니, 마땅히 왕비의 자리는….”

“…….”

이베트의 눈길이 움츠려있는 세일린에게로 떨어졌다. 세일린은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이베트는 미간을 구겼다.

“당신은 어느 가문의 여식인가요, 테르조 부인?”

“저는 딱히….”

세일린은 대답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딱히? 이베트는 그 단어의 뜻을 유추해보다가 곧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왕좌에 오르실 때 과연, 문제가 좀 되겠군요. 아무 여인을 비 자리에 앉힐 순 없지요.”

그리고, 자리 배치도 물론 문제가 될 것이다. 테이먼의 부인은 몰라도 왕좌의 바로 옆이라니.

“적법한 절차를 걸친 혼인이야. 그러니 하는 수 없지.”

테이먼이 느리게 고기를 씹으며 답했다. 딱히 아내의 편을 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다만 관습을 존중할 뿐.

“후에 사람들이 입방정을 떨까 염려될 뿐입니다. 이래서야 근본이 없는 발투만 왕가와 다를 게 없잖아요?”

“이베트.”

브리다스가 경고하듯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반박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단 말을 하려던 거였어요. 그뿐이에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파니릴리가 뾰족하게 물었다.

“여긴 뭐하는 자리예요? 고기 대신 우리를 씹고 뜯고 맛보는 자리인가요?”

“…….”

“포로를 전시해서 욕을 배설하게 하는 자리인가요?”

“전하….”

세일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파니릴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릴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

테이먼이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그 말을 따르는 대신 릴리는 손에 쥐고 있던 냅킨을 집어던졌다.

“당신을 아주 오랫동안 뵙고 싶었어요, 파니릴리 알기어스.”

이베트는 주눅 들기는커녕 더 오만한 낯빛으로 눈을 들어 파니릴리를 바라보았다.

“그 짐승 같은 사내와 한 침대에서 뒹구는 여자는 과연 어떤 이일지….”

파니릴리는 잔을 들어 이베트의 얼굴에 포도주를 뿌렸다. 사방에서 놀란 신음소리가 났다.

“아이 앞에서 입 조심해요.”

“…….”

“정말 격 떨어지는 식사 자리였어요. 실례합니다.”

파니릴리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갔고 세일린이 곧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악사가 막 들어섰고 테이먼은 고기를 천천히 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구스는 곧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여… 연주를….”

류트를 들고서도 악사는 쉽게 켜지 못하고 주저하였고 테이먼은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모두가 그를 따라 일어섰고 테이먼은 이베트에게로 다가가 부지불식간에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낭창한 여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매서운 손길이었다. 어금니가 빠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 다시 한번 홀에는 시종들이 지른 비명소리로 소란했다.

이베트는 충격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제 뺨을 부여잡고 눈을 깜빡이는데 새까만 가죽부츠의 앞코가 보였다. 테이먼의 그림자가 길게 그녀에게 드리웠다.

브리다스는 휘청거리며 제 의자를 집었다. 일찍이 저조차 제 딸을 때려본 적이 없었다.

“내 앞에서 그녀를 모욕하지 마.”

“…….”

“나 이외에는 누구도, 누구도 그녀를 깔 볼 수 없어. 알아 들었어?”

“…….”

이베트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찍이 그가 이런 자였던가. 늘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자였다. 그래서 그 속내를 알기 어렵기는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와 다르다. 지금의 그는 단지 속을 알 수 없는 자가 아니었다. 새까맣다. 그 속이 검어서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다. 진저리가 났다. 테이먼에게서 광기가 보였다. 더는 매혹적이고 신비한 청년이 아니었다.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는 주동자도 아니었다.

이베트의 얼굴을 후려치고 그는 다시 자리에 돌아가 음식을 씹었다. 그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바닥을 짚은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테이먼이 말하는 그녀가 대체 누구야. 그의 부인도 아니고 더는 왕비도 아닌 파니릴리 알기어스? 아니면 근본도 없이 비천한 그의 아내 세일린? 누가 되었건 테이먼은 둘 다 가질 수 없다. 알기어스를 버리든 제 아내인 세일린을 버리든 누구 하나는 버려야 했다. 제 옆에 계집 둘을 끼고 벌써부터 왕 흉내를 내며 거만을 떠난 꼬락서니라니.

캘던에서 카르낙 발투만의 포로가 되어 개처럼 기었던 주제에! 천하디천한 년과 억지로 결혼해 영영 그렇게 살아야 했을 주제에!

어쩌다 운이 좋아 에나의 도움으로 간신히 거기서 탈출해 놓고, 어쩌다 운이 좋아 카르낙 발투만이 뒈진 바람에 파니릴리 알기어스까지 차지해 놓고 그 모든 것이 마치 지가 노력해서 얻은 것처럼 건방을 떨다니.

가진 거라고는 핏줄뿐인 놈. 그것도 라미레스의 방계인 주제에. 카르낙 발투만의 손에 그 가문의 씨가 마르지 않았다면 언감생심 왕좌는 꿈도 꾸자 못했을 자가 그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 의기양양해서는.

바드득바드득 이가 갈렸다. 브리다스는 딸년이 실성하여 아무 말이나 떠들까 냉큼 몸을 숙여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속삭였다.

“이베트.”

“…….”

“때가 아니다.”

“…….”

“때가 아니야.”

“…….”

어린 구스는 덜덜 떨며 입술이 터진 제 어미의 꼴을 보았다. 아이는 겁에 질린 채 테이먼이 식사를 끝낼 때까지 목석처럼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누구도 그 어린 아이가 받았을 충격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 어미조차도 말이다.

테이먼은 식사를 끝내자마자 파니릴리를 찾아갔다. 잔뜩 굳은 얼굴로 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오만한 얼굴로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에게선 엘버그의 여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연약함이나 위태로움 따위는 없었다. 불안함에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세일린 같은 모습 말이다. 테이먼은 못마땅함에 미간을 구겼다.

“투로 놈과 함께 살더니 정말 너도 벌레가 되어 버린 거야?”

“날 풀어 줘요.”

또 그 소리. 그는 지겨움에 눈을 굴렸다. 롬비에 오는 내내 들었던 소리다. 풀어 달라, 제발 풀어 달라, 보내 달라.

“불길이 번지고 있단 말이에요. 내가 아니면 누구도 멈추지 못해요!”

그러면 테이먼은 누차 같은 답을 했다.

“캘던을 태우고 투로 놈을 죽였으니 불길은 잦아들 거야.”

“그렇지 않아요.”

“신은 이미 죄를 벌하셨어. 놈이 죽었고 내가 왕좌에 오를 테니 그녀의 뜻이 이루어졌단 말이야. 그러니 더 대륙을 태울 이유가 없어.”

“투로를 벌하려는 게 아니에요. 신이 원하는 건….”

“어음을 찾아 북쪽으로 갈 거야.”

테이먼이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불꽃과 조우하겠어.”

거대한 행렬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할 것이다. 엘버그의 왕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성전으로 가겠다.

그래서 다시 한번 증명할 거다. 내가 어떤 이인지. 너도 보지 못한 그 푸른 빛. 오직 나만이 볼 수 있었던 그 신의 빛. 그 빛을 보았던 순간 모든 걸 깨달았지. 내 운명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것은 마치 계시와 같았다. 그때 모든 것이 분명해졌으니까 말이다.

“그럼 너도 알게 될 거다, 파니릴리.”

그때가 되면 너 역시 내게 무릎을 꿇을 거야. 나를 기꺼이 너의 왕으로 받아들이겠지. 이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을 너 역시 깨닫게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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