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서쪽으로 가야 해.”
멍하게 앉아 있던 말리가 별안간 날카로운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노인의 것이라기보다 투정을 부리는 아이의 것과 같은 말이었다.
“서쪽으로?”
볕도 들지 않는 소각장의 한구석에서 로리아나는 지친 낯빛으로 되묻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리. 불이 꺼지면 우린 서쪽이 아니라 부나비로 가야지. 지하 굴 안에 우리 집 아이들이 잔뜩 있잖아,”
“아니야, 서쪽으로 가야 해. 그래야 한대.”
“누가 그래야 한다는 거예요.”
로리아나의 옆에서 영 모르겠다는 듯 에이가가 끼어들어 물었다. 제 동년배쯤으로 보이는 이 말리란 여자는 그녀가 보기에 참으로 해괴했다, 목소리며 행동이며 노인임이 분명한데도 노인 같지가 않아서 어딘가 나사가 빠진 반쯤 미친 여자로밖에 보이질 않는 까닭이었다.
“몰라. 하여간 그렇게 말해.”
말리는 대충 대답했다. 에이가는 잔뜩 미간을 구기며 로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로리아나는 그저 곤란한 듯 옅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말리가 화재에 대해 알아차린 것은 불씨가 날아들기 한 시간쯤 전이었다. 해가 지기 전, 장사 준비를 마치려 분주히 업장을 꾸미고 있을 때 별안간 그녀가 펄쩍 뛰며 비명을 질러 댔다.
“도시가 불탈 거야! 도시가 불타 버릴 거야! 도망가야 해! 도망가야 해! 모두가 죽을 거야! 전부 다 죽을 거야!”
그녀가 눈이 뒤집혀 고함을 칠 때면 그것이 거짓이었던 적이 없기에 로리아나는 부나비의 종업원들을 부나비의 지하 동굴로 대피시켰다. 그러면서 릴리와 카르낙을 떠올렸다. 다른 이들과 함께 지하에 숨지 않고 말을 달려 캘던성으로 달려간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 안에는 말리처럼 미리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을 것이기에 혹여 그들의 신변에 큰 위험이 들이닥칠까 봐 피가 식었다.
그렇게 서둘러 도개교를 지날 때쯤 기어이 불씨가 날아들었고 말리는 눈을 뒤집으며 거품을 물었다. 핀과 루이스가 서둘러 나서 주지 않았다면 아마 에이가와 로로를 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소각장은 늘 무언가를 태우므로 화재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참 우스웠다. 이치에 맞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그랬다. 소각장으로 이들을 대피시킨 것은 핀이었다, 그는 늘 위험에 맞닥뜨리던 사내답게 침착하게 캘던성의 식구들을 소각로로 이끌었다.
“서쪽이라면 폐하가 향한 곳이야.”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던 핀이 끼어들었다.
“그 남자는 만나기 싫어.”
말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잔뜩 골을 냈다.
“그 남자는 위험해.”
“서쪽으로 가는 것 자체가 위험한 거야, 할망구.”
루이스는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말했다. 서쪽이란 어차피 사막으로 향하는 길이 아닌가. 불씨의 근원지이니 지금쯤 불벼락을 맞은 듯 활활 타오르고 있으리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말리가 가야 한다면…. 그렇다면 가야 해요.”
로리아나는 그녀의 말을 신뢰했다. 핀 역시 말리가 카르낙 발투만을 살린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부리는 아주 이상한 요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폐하는 우리에게 성전으로 가라고 하셨어. 불길이 잠잠해지면 우린 살아남은 사람들을 꾸려 북쪽으로 올라가야 해. 왕명이야.”
“대장께선 가실 필요 없어요. 저와 말리만 가면 됩니다.”
루이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자 둘이서?”
“부나비의 지하에 식구들이 있어요. 말리 덕분에 모두 무사할 테니 그들과 함께 가면 됩니다.”
늘 그랬듯이 부나비의 장정들을 데리고 길을 떠나면 된다. 말리가 원하는 지점까지. 분명 그녀가 말하는 서쪽은 파니릴리를 향한 곳이리라 로리아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왕이 서쪽으로 향한 이유도 그녀를 찾기 위함이었으니 분명 말리도 그녀를 찾기 위해 서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
성벽 위로 길고 육중한 호각 소리가 들렸다. 테이먼 테르조의 입성을 알리는 소리였다. 브리다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문으로 향했다. 언제쯤 그가 도착할까 이제나저제나 창 앞에서 서성이던 나날들이었다.
지속되는 가뭄으로 롬비의 창고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롬비를 둘러싼 광활한 광산을 채굴해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돈도 이미 탕진한 지 오래였다. 너무 오랫동안 영지를 비워 두고 있었다.
이렇다 할 혈육도 남겨 두지 못하고 주인이 성을 비웠으니 남은 것들이란 오로지 곳간을 털어먹을 생각뿐인 아둔하고 미련한 것들뿐이었으니 영지가 잘 돌아갈 턱이 없었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그러니 브리다스에게 테이먼의 앞으로 발행된 어음은 동아줄이었다. 그 돈을 받아야만 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테이먼의 앞에 엎드려 네발로 길 수도 있었다. 절실한 일이었다.
“주군!”
브리다스는 말에 오른 테이먼을 보자마자 곧바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를 배신한 전적이 있기에 더 극적인 연출이 필요하다 판단한 까닭이었다. 이베트는 굳은 얼굴로 아버지를 따라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머리를 조아렸다가 줄에 묶인 여인 둘을 보며 돌연 아연한 빛이 되었다. 노예처럼 말에 두 손이 묶인 채 끌려온 여인 중에는 누가 보아도 아마네스 여신의 환생처럼 보이는 이가 있었다. 묻지 않아도, 혹은 본 일이 없더라도 분명 알 수 있었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누구인지 말이다.
“…알기어스.”
이베트가 신음하듯 그녀를 불렀다.
“왕비 전하!”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바르시가 파니릴리를 보자마자 뛰쳐나와 그녀의 앞에 섰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수척한 파니릴리의 낯빛을 살피더니 아이는 초조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폈다.
“풀어 줘! 풀어 주세요! 이분은, 이분은 왕비 전하세요!”
그제야 브리다스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발견했다. 그 역시 이베트와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아주 잠깐 의심하다가 그녀의 정체를 깨닫고 그대로 넋이 나가 버렸다.
“브리다스.”
테이먼은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바르시를 보며 예의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르시.”
“테르조 님.”
바르시가 숨을 헐떡이는 사이 테이먼은 파니릴리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보란 듯이 풀어 주었다.
“…구스.”
릴리는 한때 아이의 것이었던 이름을 멍하게 불렀다. 아이는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네, 전하. 저예요. 구스예요.”
이것을 불행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너를 만나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이의 맑은 웃음 앞에서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잇긴 힘들었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네가 이렇게 무사히 살아 있는 것은 정말로 다행이지만. 하지만 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란다, 얘야.
“세일린도 풀어 줘요.”
파니릴리는 다소 공격적인 어조로 테이먼에게 말했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그녀의 말을 따라 세일린의 손목에서도 밧줄을 풀어 주었다. 붉은 생채기가 난 손목을 감싸 쥐는 손끝이 파르르 떨려 왔다. 릴리가 질린 그녀의 손마디를 위로하듯 감싸 주었다.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세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한데….”
평생 캘던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였다. 늘 어딘가에 종속되어 있었으며 캘던에서조차 마음껏 활보하며 돌아다녀 본 적이 없던 터라 세일린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낯설고 두려울 것이다.
릴리는 그런 그녀의 상황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많은 사람 앞에서 쉽사리 그녀에게 위로의 말이나 응원의 말을 건넬 수는 없었다. 대신 릴리는 힘껏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걱정할 것이 없다는 듯 굳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게.
“캘던은 불탔어.”
파니릴리에게 넋을 빼놓고 있던 좌중은 테이먼의 한마디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기함했다.
“예?”
“땅이 진동할 정도의 거대한 폭발이 있었는데 보지 못했어?”
브리다스는 멍하게 답했다.
“예…. 아시다시피, 테이먼 경… 이곳은 캘던과 먼 데다가 험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그곳의 소식은 잘 알지 못합니다. 한데, 캘던이 폭발했단 말씀입니까?”
“그래. 도시 전체가 화염에 뒤덮이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아마네스 여신께서 투로 놈에게 엄벌을 내리신 거다. 안 그래, 파니릴리?”
“…….”
모두의 눈이 다시 파니릴리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히 답이 되었다. 그녀가 붙잡고 있던 세일린의 손이 떨렸다. 다시금 그 끔찍한 장면이 떠오르는지 끝내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네게는 받아야 할 것이 있는데 말이야, 브리다스.”
“…….”
브리다스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에나의 어음을 말하는 것일 확률이 컸다. 그러나 배신에 대한 대가를 받아 내야겠다는 엄포일 수도 있었다. 테이먼의 속내를 알 길이 없었다. 당장 그가 제 목을 베어 내 버릴까 봐 브리다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른 식도가 불에 덴 듯 선득하였다.
“예, 주군.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무엇이든 말씀하시면 드리겠습니다.”
브리다스가 몸을 비켜 길을 내주었다.
“이리 와, 파니릴리,”
“…….”
손을 내밀어도 토막처럼 서 있기만 하는 릴리를 테이먼이 잡아끌어 제 옆에 세웠다, 그러고는 기세등등하게 본성으로 향했다. 그 꼴을 보는 이베트는 심사가 뒤틀려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그 벌레 놈이 죽었다는 사실에 기뻐 춤이라도 춰야 하는데 지금은 그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테이먼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그가 전리품처럼 카르낙 발투만의 여자를 데리고 왔다는 것. 그 모든 것에 이베트는 위협을 느꼈다.
이제 이 세상은 완전히 테이먼 테르조의 것이겠구나. 저나 부친은 그의 발밑에 엎드려 숨조차 쉬지 못하겠구나. 그 사실이 분해 견딜 수가 없었다.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브리다스는 에나로부터 건네받은 서신과 어음부터 그의 앞에 내밀었다.
“에나님께서 보내 주신 오십만 겔랑입니다.”
에나의 사인이 들어가 있는 어음과 그의 서신을 테이먼은 느긋한 자세로 살폈다. 본디 용병을 모집하는 데 써야 할 돈이었다. 그러나 벌레 놈은 뒈졌고 더는 용병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이 돈을 출금할 이유가 없다.
혹 대관식이나 결혼식을 위해서라면 모를까. 테이먼의 눈이 파니릴리에게로 향했다. 마치 피를 나눈 자매처럼 세일린과 딱 붙어 서 있는 저 여자가 진정한 자신의 짝일진대 현재로서는 혼인이 불가능했다.
그녀는 미망인이 되었으니 재혼이 가능했지만 테이먼 저는 여전히 결혼에 종속된 몸이었고, 엘버그의 국법상 한번 성사된 결혼은 돌이키기도 파기하기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당장 세일린을 죽일 수도 없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파니릴리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지금은 세일린이 유일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사랑도 없이 묶여 버린 삼각관계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