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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09화 (209/231)

209화

이베트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와 털썩 의자에 앉았다. 안주인의 파리한 안색을 본 고프리는 냉큼 얼음냉수를 건네주며 기민하게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여우처럼 약아빠진 구석은 있으나 천성은 울퍼처럼 아둔한 여자였다. 면부에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는 점 역시 그랬다. 잔뜩 구긴 미간을 보니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묻자 이베트는 벌컥 얼음물을 들이켜며 신경질적으로 제 입가를 훔쳤다.

“에나가 어음을 보내왔어.”

“어음이요?”

“50만 겔랑짜리 어음.”

그녀의 말에 고프리는 아, 하고 신음했다. 50만 겔랑. 엄청난 액수의 돈이다. 그 정도의 돈이라면 브리다스가 발투만 일가와의 전투에서 입은 손해를 온전히 보전하고도 남을 만한 금액이었다. 그렇다면 인상을 구기는 대신 기꺼워 춤이라도 추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때, 이베트가 말을 보탰다.

“테이먼 테르조의 앞으로.”

“…예?”

고프리가 되묻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그래. 그 남자 앞으로 되어 있다니까.”

테이먼의 앞으로 된 어음을 브리다스 경에게 보냈단 말인가?

“…그 말은, 그러니까….”

“그가 곧 롬비로 온다는 뜻이지. 캘던을 탈출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이베트가 쾅, 하고 발을 굴렀다.

“진작 네 말을 들을 것을 그랬어!”

테이먼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프리는 그녀에게 테이먼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는 이베트가 저를 버리고 롬비로 도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고, 그대로 그가 재집권하게 된다면 그녀는 물론 브리다스 경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다고 조언했었다.

이베트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부친은 달랐다. 아직도 옛날 옛적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노년의 사내는 더는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베트는 이제라도 모든 것을 바로잡겠다며 테이먼 테르조가 저를 죽이겠다면 기꺼이 그의 검에 죽겠다는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 땅과 성의 주인은 그였고, 저는 그에 딸린 객식구일 뿐이었으니 그저 테이먼 테르조가 캘던성에 영영 붙잡혀 그곳에서 늙어 죽어 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노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이렇게 허무하게 캘던성에서 빠져나올 줄이야.

“에나가 그를 도왔군요. 그만한 뒷배가 아니라면 캘던성에서 탈출하기란 불가능했을 테지요.”

선대 에나였다면 라미레스 가문의 혈육이니 팔은 안으로 굽는다손 쳤을 거다. 그러면 이렇게 어처구니없지도 않겠지.

하지만 그는 베오르토다. 라미레스 가문과도 테르조 가문과도 손톱만큼의 연줄도 혈연도 없는 사람. 그런 자이기에 카르낙 역시 에나 자리에 올려 두었을 터였다.

그런 작자가 탈출을 돕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50만 겔랑짜리 어음까지 발행하다니. 왜? 무슨 이유로? 테이먼 테르조에게서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가 베오르토의 앞에서 신의 기적이라도 일으켰단 말인가?

이젠 어쩌지? 앞일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테이먼은 이베트도, 브리다스도 분명 예전처럼 신임하지 않을 거다. 그뿐이랴? 고프리 저에 대한 태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좋지 않았다. 테이먼 테르조는 바르시를 데리고 처음 그의 캠프에 도착했을 때부터 저를 냉대하며 믿을 수 없는 자 취급했다. 그러니 이 상황에 그가 고까울 리가 없다. 예전보다 더 냉랭하다 못해 경멸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리라.

“우리에겐 그 돈이 필요해.”

이베트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래. 그 돈이 필요해. 오랜 차출과 계속되는 패배로 지금 부친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테이먼 테르조는 차치하더라도 에나가 그의 앞으로 달아 놓은 50만 갤랑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 돈이면 구멍 난 재정을 메우고 다시금 전쟁을 준비할 충분한 여력이 될 것이다.

그 점 때문에 아버지는 더욱더 테이먼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바르시를 치우고 기꺼이 그에게 다시 왕좌를 내주어야 한다고.

하지만 난 달라. 난 다시 그에게 무릎을 굽히고 싶지 않아. 난 왕좌의 옆에 있었단 말이야. 바로 그 곁에서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이제 와서 다시 저 아래로 내려가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리라니. 싫어.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고프리는 굴욕감에 바들바들 떠는 이베트를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로군요. 필시, 기회가 올 겁니다. 그때가 올 때까지만 몸을 사리고 계십시오. 이베트 님.”

그래. 정말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테이먼은 롬비로 입성해 가장 상석을 차지할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선.

***

말을 달리는 내내 카르낙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서서 불에 바스러져 가는 캘던을 바라보면 다시는 달리지 못할 것 같았다. 힘차게 발을 구르며 악착스럽게 고삐를 말아 쥔 주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오코 역시 멈추지 않고 질주했다. 그 바람에 자할과 자파의 말이 한참이나 멀리 뒤처지기까지 했다.

그들은 통상적인 행선지인 멀루아를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지름길로 달려 서쪽으로 향했다. 카르낙은 어떻게든 파니릴리를 찾아낼 작정이었다. 이 넓은 땅 위를 몇 번이라도 가로지르고 반복해 순찰하며 늦기 전에 어떻게든 그녀의 그림자라도 찾아볼 작정이었다.

그래서 멈출 수도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그녀를 찾아낸다면, 만일 그렇게 된다면 카르낙은 그녀의 뺨이라도 후려쳐 줄 작정이었다. 차마 그럴 수 없겠지만, 늘 그랬듯 가장 먼저 품에 안아 버리고 말겠지만 그래도 그럴 마음이었다.

네가 나를 배신했노라. 나를 버렸노라. 곁에 있겠다던 맹세를 네가 저버렸노라 원망하고 화를 내며 그녀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을 들을 작정이었다. 그래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르낙!”

한참 뒤처져 달리던 자할이 소리쳤다. 숲에서 무언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여기 사람이 있어!”

어느새 자할이 말에서 뛰어내려 나무 그늘 아래로 향했다. 곧 자파도 그를 따라갔고 몸을 굽혀 상태를 살피다 소리쳤다.

“아직 살아 있어!”

카르낙은 비로소 속도를 늦추고 말 머리를 돌렸다. 맹렬한 더위에 디딘 곳부터 먼 지평선까지 바닥이 온통 이글거렸다. 이 더위에 쓰러진 채 그대로 구워 삶아지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운이라 생각했다.

카르낙도 말에서 내려 그늘로 향했다. 그러고는 희미한 인영을 살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명 양친을 데리고 성전으로 향했어야 할 이가 칼을 맞고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탓이었다.

“매짐!”

네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느냐는 물음에 앞서 그는 매짐의 상태를 살폈다. 긴 핏줄기가 저 멀리서부터 그가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카르낙은 날카롭게 베인 그의 콧등으로부터 등가죽을 뚫고 지난 상처까지 확인한 후 자할로부터 받아 든 수통을 그의 입가에 대 주었다.

“무슨 조화인지 피를 별로 흘리지 않았어.”

자파가 그의 관통상을 살피며 혀를 내둘렀다. 날카로운 것에 단번에 뚫렸을 때 간혹, 이런 경우를 목격하기도 했다. 대체 무슨 이치인지는 모르지만 그야말로 천운이라 그는 생각했다. 아니었다면 진작 죽어 시체로 나동그라져 있었을 테니.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움직이면, 위험할 것 같은데….”

움직이면 분명 피를 쏟아 낼 것이다. 당장은 숨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이 상태로는 사흘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폐, 폐하… 테이먼이….”

매짐이 아주 천천히 힘겹게 입을 뗐다. 그는 무겁게 감기는 눈꺼풀을 악착같이 들어 올리며 카르낙을 바라보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비 전하를.”

“…….”

“그가 전하를… 롬비로, 롬비로 갔어요….”

테이먼이 릴리를 롬비로 데리고 갔다. 안도하는 한편 일순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가기도 했다. 놈을 진작 죽였어야 했다. 진작 그 목숨을 끊어 놓았더라면 그가 릴리를 가로채 갈 일도 없었을 테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파니릴리를 롬비로 데려감으로써 그녀는 죽음으로부터 멀어졌으니 감사히 여기기도 해야 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운명이란 것은.

“멀리…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서두르시면….”

“카르낙.”

자할이 침착한 낯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르낙의 표정은 더없이 복잡했다.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과 머물고 싶은 마음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자할은 말했다.

“네 아내를 찾으려면 지금 떠나야 해. 놈이 롬비에 도착하기 전에.”

“그래, 놈이 롬비에 입성하고 나면 일이 어려워져.”

“…….”

매짐은 카르낙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그에게 떠나길 독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카르낙은 좀처럼 그를 외면한 채 오코에 오를 수가 없었다. 지금껏 그렇게 수많은 죽음을 외면하며 전진해 왔는데 어쩐지 전처럼 그에게 등을 돌릴 수 없었다.

네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 매짐. 너는 파니릴리를 쫓아 기꺼이 네 부모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택했겠지. 그래서 멀루아로부터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이곳에 혼자 칼을 맞은 채 버려져 있는 것이다. 네가 파니릴리를 지켜 주고 있었던 거야. 나를 대신해서.

카르낙은 자미에와 길란을 떠올렸다. 그들에게 매짐은 단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그들에게 그토록 큰 은혜를 입었는데 그의 아들을 이곳에 버린 채 아내를 찾아갈 순 없었다. 낯부끄러운 짓이었다. 자미에와 길란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파니릴리에게도.

“테이먼은 당장 릴리를 어쩌지 못할 거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자할이 미간을 구겼다. 카르낙은 마치 자신에게 하는 듯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에게도 릴리는 중요한 사람이니…. 하루 이틀 늦는다고 그녀가 어찌 되지는 않아.”

“…….”

자파와 자할이 서로를 향해 눈을 굴렸다. 저 의처증 걸린 미친놈이 지금 다른 남자가 아내를 채 갔다고 하는데도 이러고 있는 거지?

“폐하….”

매짐이 메마른 숨을 헐떡이며 그를 불렀다. 카르낙은 괘념치 않고 주변을 살폈다.

“자파, 넌 여기 남아 매짐을 돌봐라. 자할 너는 나와 함께 마을을 찾아야겠다.”

“여기서?”

“그래.”

카르낙은 오코의 등 위에서 술병 하나를 던져 주었고 자파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너 정말, 네 마누라를 내버려 두고 저 시커먼 사내놈을 살리겠다는 거냐?”

자할이 말 등에 오르려는 그에게 되물었다. 카르낙은 오코의 말고삐를 당겨 쥐고는 제법 냉랭한 눈동자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예전과 같은 눈동자에 예전과 같은 표정에 예전과 같은 오만함이건만 영 무엇인가가 달랐다. 자할은 그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의 무엇이 변해 버린 것인지 말이다.

“그래.”

“…왜?”

자할의 고개가 의문스럽게 한쪽으로 씰그러졌다. 물론 안다. 그에게도 귀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그가 지켜 온 생명들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조차도 그의 목적에 방해가 된다면 늘 냉정하게 버렸었다. 가끔은 눈앞에서 의도적으로 치워 버렸다.

그런 사내가 예전 같으면 차갑게 외면했을 것을 지키려 제 걸음을 멈춘다니 자할은 여전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카르낙은 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조차 그 답을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저 고집스럽게 예전과 같은 얼굴을 한 채 발을 구를 뿐이었다. 자할은 작게 욕설을 내뱉고 말에 올라 그의 뒤를 따랐다.

모르겠다, 카르낙 발투만. 네가 영 한심해져 버린 것인지 아니면 더 위대해져 버린 것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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