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그래도 가야 해요.”
파니릴리는 초연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엘버그의 모든 이들이 귀하디귀하게 여기는 그녀의 목숨을 이토록 가벼이 여기는 이는 파니릴리 당신 하나뿐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어차피 죽어요. 난 때와 방식을 선택했어요.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영광을 기꺼이 붙잡을 거예요.”
“…….”
그게 영광이라고. 매짐에게는 개죽음과 다름없이 느껴지는 그 화형식을 그녀는 참으로 우아하게도 표현한다.
“내가 죽으면 길란과 자미에가 살 수 있어요. 당신의 마을 사람들과 언젠가 당신의 앞에 나타날 당신의 아내와 그녀와 함께 낳아 기를 자식들까지. 당신은 그 모두를 구할 수 있어요.”
릴리의 말에 매짐은 말을 잃었다. 거기에 어떤 대꾸를 할 수 있으랴. 부모님이 살았으면 좋겠지. 언젠가 어여쁜 각시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지.
하지만 그런 미래를 위해 지금 당신의 선택에 기꺼이 동조하며 박수라도 보내라는 의미라면 매짐은 그에 동의할 수 없었다. 양친의 목숨만큼, 자신의 미래만큼 파니릴리의 목숨 역시 소중했으니까.
무언가를 취하려 무언가를 포기하고, 무엇이 더 소중하고 무엇이 덜 아까운지, 그런 것 따위를 따질 만큼 영악한 성정은 되질 못한다. 그러니 모두 다 구할 순 없는 것이냐고,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냐고, 매짐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파니릴리의 답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그럼 저도 같이 가겠어요. 어디든 전하 혼자선 못 가세요.”
매짐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미래 따윈 몰라. 다만 당신을 혼자 둘 순 없어. 혼자 불길 속으로 걸어가게 하진 않을 거야.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카르낙 발투만도 그건 원하지 않을 테니까.
릴리는 옅게 웃었다. 단념하는 빛이 반, 그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또 반이었다. 매짐은 고개를 돌려 붉게 타오르는 캘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단 말이지. 성전과는 반대 방향으로. 그러니까 사막을 향해서. 이 불길을 뚫고.
“…과연 사막에 닿을 수나 있을까요? 그전에 새까맣게 탄 통닭구이가 될 것 같은데요.”
파니릴리도 그를 따라 거대한 화염을 바라보았다.
“닿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더 번지기 전에 서둘러야 해요.”
부디 저 불꽃이 캘던을 모조리 집어삼킨 후에 사그라졌으면. 부디 저 모든 불꽃이 사막의 그것처럼 꺼지지 않는 불길로 번지지 않았으면.
***
펑, 하고 터지는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뒤를 돌아본 것은 비단 릴리와 매짐뿐만은 아니었다. 캘던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굉음은 말 그대로 엘버그의 모든 이의 청각과 감각을 뒤흔들었다. 파니릴리보다는 한발 늦게 캘던성을 벗어난 세일린과 테이먼 역시 그랬다. 게드릭이 미리 마련해 둔 말에 올라 빠른 속도로 롬비로 향하던 그는 그 굉음에 말고삐를 당기고 멀리, 까마득한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캘던의 화마에 넋을 잃었다.
“폐하….”
그것은 세일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신음하듯 카르낙을 부르고는 자신의 왕을 떠올렸다. 저 굉음과 함께 그의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는 상상을 했다. 숨이 막혔다. 말 그대로 몸이 두 동강이 나는 듯했다. 그녀는 혼절하며 허리를 꺾었다. 테이먼이 받쳐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대로 낙마하였을 것이다.
하하하, 하고 테이먼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게 다 투로가 왕좌를 차지한 탓이리라. 감히 올라선 안 될 자리에 앉아 더럽혔기에 아마네스 여신께서 이런 저주를 내리신 거다. 저 불벼락과 함께 사지가 갈가리 찢어졌겠군.
투로 놈에게 동조한 엘버그인들과 이국의 혈통 모를 잡종 놈들까지 깡그리 전멸했을 것이다. 참으로 그에게 걸맞은 최후가 아닌가. 여신께서 알아서 놈을 단죄해 주시니 더 의심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엘버그의 왕좌는 이제 저의 것이었다. 어디든 그가 앉는 자리가 왕좌가 될 것이고, 어디든 그가 가는 곳이 엘버그의 왕성이 될 것이다. 하하하. 그는 한 번 더 소리 내어 웃었다. 좀 더 히스테릭하고 더없이 유쾌한 소리였다.
테이먼은 고삐를 당기고 말의 옆구리를 찼다. 서둘러 롬비로 가야 했다. 롬비에 도착하고 나면 모든 상황은 정리되어 있으리라. 저는 그저 준비된 자리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기만 하면 된다. 여신이 점지해 준 왕좌이니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하리라. 그렇게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투로 놈이 사라졌으니 이제 캘던을 태운 저 불길도 곧 사그라들리라.
봐. 파니릴리 알기어스. 이게 네가 선택한 사랑의 결과다. 결국 그녀의 아둔함이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생각했을 때 테이먼은 눈앞에서 그녀를 보았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그를 위해 돌아가고 있다고 확신할 만큼 참으로 기가 막힌 순간들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 불현듯 나타난 백마의 기척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는 매짐이 알아차렸고, 거의 동시에 파니릴리도 그의 등장을 알아차렸다. 테이먼과 눈이 마주친 그녀의 표정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얼이 빠졌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어서 그는 이죽거렸다.
“이게 누구야. 파니릴리.”
“어떻게….”
릴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정신을 잃고 늘어진 세일린을 발견하고는 낯빛을 굳혔다. 테이먼이 그녀의 기색을 알아차리고 답했다.
“명색이 부부인데, 나 혼자 나올 수가 있어야 말이지.”
탈출했구나. 세일린이 그것에 동조했을 리 없다. 인질로 잡혀 온 것이 분명했다. 그 혼자의 힘으로 성을 빠져나왔을 리 없어. 누군가 그를 도왔다. 생각나는 이는 하나였다. 게드릭, 그 오만하고 보수적인 사내가 결국 왕을 배신했다.
“이것도 운명이려나?”
“세일린.”
파니릴리는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힘없이 늘어진 세일린의 팔을 흔들었다. 그러나 답이 없었다.
“기절했어. 캘던이 폭파하는 것을 보고는. 정말이지 장관이더군.”
“…….”
매짐이 보호하듯 칼을 빼 들고 릴리의 앞에 섰다. 가소로운 꼬락서니에 테이먼은 피식 웃었다. 꼴에 너도 사내이고 기사란 건가. 그래 보았자 근본은 천하기 그지없는 대장장이인 주제에.
“그나저나, 나야 그렇다 치고 파니릴리 넌 왜 캘던을 탈출한 거야? 이제 투로 놈이 질리기라도 한 거냐?”
“닥쳐!”
왕을 모욕하는 말에 매짐이 발끈해 소리쳤다. 그러자 테이먼은 웃었다. 그는 웃고, 웃고 또 웃을 뿐이었다.
“이런 게 신의 뜻이란 거지, 파니릴리. 너 역시 나와 함께 롬비로 가야겠다.”
롬비. 높은 산맥과 바다로 뻗어 있는 긴 강줄기를 가지고 있는 험준한 땅. 결국 그와 조우하는 것인가. 살아서. 기어이. 그곳엔 분명 구스도 고프리도 있겠지. 릴리는 그 작은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를 살려 보내며 제가 했던 말 역시 떠올렸다.
언젠가 꼭 그때의 자비를 잊지 말아 달라고 했었다. 그 부탁은 카르낙을 위해 한 것이었다. 언젠가 그가 행했던 모든 약탈과 무자비함의 대가를 치러야 할 때, 그때를 위해 예비해 둔 것이었다.
구스가, 그러니까 언젠가 코르넬리오 백작이 될 바르시가 혹 나락으로 떨어진 카르낙 발투만을 단죄해야 할 때가 온다면 그때 부디 그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그래서 그를 살렸다. 선을 행하면 언젠가 그 선이 되돌아온다는 믿음으로 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카르낙은 없다. 온 마음을 다해 바라 왔던 자비와 친절과 사랑들. 그것을 되돌려받아야 할 사람은 이곳에 없다. 어쩌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부질없고 허무한 짓이었다.
모르겠다. 무엇이 옳았을까. 차라리 그의 곁에 조금 더 머물러야 했을까.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어야 했을까. 아니면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빨리 그를 떠났어야 했을까.
테이먼이 혼절한 세일린을 말 등 위에 걸쳐 두고 껑충 바닥으로 내렸다. 그는 생기가 넘치다 못해 다소 광인처럼 보였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검을 들어 매짐의 몸을 그었다. 쉭, 하고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매짐이 민첩한 몸놀림으로 그의 첫 번째 칼은 피했지만 두 번째는 무리였다.
칼을 고쳐 잡은 테이먼이 대번에 그의 복부를 찔렀다. 기다란 칼날은 그의 배를 관통하고 등을 뚫었다. 릴리는 비명을 질렀고 잠시 후 매짐은 칼을 놓치며 피를 울컥 토했다.
“매짐!”
털썩 무릎을 꿇은 그를 발로 차 뒤로 넘겼다. 아직 숨은 붙어 있으나 곧 사그라들 것이다. 제대로 검술 훈련조차 받지 않은 놈이 태생부터 그것이 일과였던 저와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칼을 빼 든 것부터가 어리석은 짓이었다. 차라리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빌었다면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겨 목숨은 붙여 놓았을 것이다. 아둔하기로는 역시 주인을 닮았다.
“그는 필요 없으니까.”
릴리는 매짐을 품에 안고 그를 힘껏 노려보았다. 가소롭고 앙증맞다. 뭐. 네 남편이었으면 뭐가 달랐을 것 같아? 그놈이었다면 진작 죽였어. 말을 섞지도 않고 보자마자 바로 등을 난자했을 거다.
“일어서. 파니릴리.”
“…….”
”너에겐 이제 대안이 없어. 너에겐 나뿐이다. 널 보호해 줄 이도, 아껴 줄 이도, 사랑해 줄 이도 오로지 나뿐이야.”
“…….”
괜한 아집을 부린다는 생각에 테이먼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는 제 망토를 뒤로 한번 휙 넘기더니 말에 늘어진 세일린의 옷깃을 움켜쥐고는 단도를 꺼내 들었다.
“테이먼!”
금방이라도 찌를 기세에 릴리가 경악하였다.
“잘 들어, 파니릴리. 네가 가지 않는다면 이 여자도 저 작자 꼴로 만들겠어.”
파니릴리가 입을 뻐끔거렸다. 마치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는 듯했다. 테이먼은 콧방귀를 꼈다.
“왜? 못 할 것 같아?”
아니. 못 할 것 없다. 어차피 허울뿐인 부부 아니던가. 오히려 사라져 주면 감사한 일이다. 이곳은 깊은 숲속이고 사람들도 없으니 남의 시선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죽이면 그만이다. 죽이고 돌아서서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그는 재혼을 할 수 있었다. 수준에 맞는 여인을 골라 다시 결혼하면 그만이었다. 그래, 파니릴리 딱 너 같은 여자 말이야. 세일린을 죽여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쳐. 그리고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오로지 너 하나 때문이지. 네가 세일린이라면 죽고 못 사니까. 네가 끔찍이도 아끼니까.
너는 내게 족쇄를 채웠다 생각하지. 아니, 틀렸어. 세일린은 내 족쇄가 아니라 바로 네 족쇄란 말이야, 파니릴리. 언제고 너를 부릴 내가 네 발목에 채울 족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