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마구부장이 정성스레 빗어 윤기가 반질거리는 오코의 위에 왕의 짐을 실었다. 잘 말린 과육과 고기를 오른쪽에, 그리고 수축력이 좋은 가죽 물통에 잔뜩 물을 채워 또 반대쪽에 매달았다. 카르낙의 짐은 그것이 다였다. 그마저도 자할은 왕이라 누릴 수 있는 호사라 하였다. 핀은 카르낙이 말에 오르는 것을 도우며 말했다.
“네가 떠나자마자 우리도 캘던을 뜰 채비를 시작할 거야.”
그러고선 오코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뒈지지 말고 성전에서 보자.”
카르낙은 웃었다. 매번 하는 뒈지지 말라는 말이 어쩐지 뒈지라는 말 같았다. 어느 쪽이라도 농담이겠지만 말이다.
“그래. 성전에서 보자고.”
에이가가 걱정스러운 듯 그를 올려다보며 인사했다.
“몸조심하세요. 제겐 전하의 안녕만큼이나 폐하의 무탈 역시 중요합니다.”
“응.”
카르낙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운 바람이 한차례 훅 그를 스치고 지났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주위가 소란해졌다. 그것은 아주 작고 미세하였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햇빛에 비친 먼지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더러는 바람을 타고 파니릴리의 정원에서 떠나온 아주 작은 꽃잎처럼 보이기도 했다.
“불씨….”
자할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카르낙도 그것을 보았다. 제 코끝을 스쳐 지나는 아주 작고 붉은 것을.
“…….”
순간 침묵이 일었고 다음 순간 또 다른 불씨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자파가 입을 뻐끔거렸다.
“부… 불씨, 불씨야….”
훅, 하고 한 차례 더 바람이 불었다. 하나, 둘 떠내려가던 불씨가 삽시간에 많아졌다. 뿌우우, 하고 망루의 병사가 길게 호각을 불었다.
“불입니다! 서쪽에서! 서쪽에서 불씨가 날아듭니다!”
“가! 어서!”
핀이 다급하게 자파의 등을 밀었다. 그는 넋이 나간 채로 흐름에 밀려 말 위에 올랐다. 오코가 불 내음을 맡고 불안하게 앞발을 굴렀다. 벌써, 벌써 날아든단 말인가. 에이가는 성벽 위로 날아드는 불씨를 바라보았다. 지난번과 달랐다. 이번엔 훨씬 더 빠르고 훨씬 더 많은 양이었다.
“떠나세요! 서두르세요!”
“에이가.”
“여긴 괜찮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믿고 맡기세요. 곧 성전에서 뵐게요.”
그러나 카르낙은 망설였다.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고삐를 쥐고 제자리걸음만 하자 보다 못한 핀이 오코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히히힝, 하고 긴 울음소리를 내더니 오코가 쏜살같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몸이 뒤로 젖혀지려는 것을 카르낙은 말고삐를 당겨 쥐며 중심을 잡았다.
어느새 오코는 달리고 있었고 제 뒤로 자할과 자파가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날아드는 불씨가 볼에 닿아 따끔한 감각을 새겨 넣더니 곧 검게 바스러졌다. 카르낙은 망토를 뒤집어썼다. 망루를 건너 도시를 가로지르는데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불이야!”
건초 더미에서 옮겨붙은 불이 어느 집의 나무 기둥을 태우고 있었다. 바람이 더 거세게 불었다.
“불이야! 불!!!”
거리마다 사람들이 뛰어다녔다. 혼비백산해 그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기 바쁜 이들을 향해 카르낙은 소리쳤다.
“성으로 가! 모두 성으로!”
사방이 돌벽으로 둘러싸인 캘던의 내성이 그나마 가장 안전했다. 그 외에는 어디라도 불씨가 옮겨붙으면 삽시간에 타오를 것이다.
자할은 제 망토에 옮겨붙은 불씨를 손으로 비벼 끄며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그때였다. 쾅! 하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오코가 앞발을 들며 신경질적으로 울었다. 그 바람에 카르낙이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낙하했다.
“카르낙!”
자파가 소리 질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섬광이 일었다.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았음에도 한동안 눈앞이 점멸할 정도였다.
“…….”
자할도 자파도 캘던성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성이….”
“대체… 대체 뭐야…?”
“…….”
푸른 불길이 본성의 지붕을 뒤덮었다. 카르낙은 그 불꽃의 정체를 알고 있다. 왕좌에 걸어 놓은… 그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불에 기어이, 기어이 불씨가 옮겨붙어 터져 버린 것이다. 숨이 막혔다. 가슴은 터질 듯 타들어 가는데 호흡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했다.
“…서둘러….”
자파가 말에서 내려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재앙이었다. 세상이 끝나는 징조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서둘러! 이 등신아!”
그래서 마음이 급했다. 자파는 카르낙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밀며 말고삐를 쥐여 주었다. 불안하게 발을 구르는 오코에게 협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코! 한 번만 더 네 주인을 내팽개쳤다간 네 머리를 잘라 버릴 거야! 정말이야!”
“서둘러, 카르낙. 네 아내를 찾으러 가야 할 것 아냐!”
자할의 말에 카르낙은 정신을 차렸다. 에이가의, 로로의, 핀의, 루이스의 얼굴이 차례대로 스쳤다. 페부가 찢기는 듯 아파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오코의 위에 올랐다. 카르낙은 오코의 옆구리를 발로 차며 제 이를 사리물었다.
성을 두고 떠나는 왕이었다. 제 사람들을 두고 떠나는 자격 없는 군주였다. 오직 여자 하나 때문에. 그 어리석고 진부한 사랑 나부랭이 때문에.
죄 많은 왕이었다. 부끄러운 군주였다. 아무도 용서하지 마라. 아무도. 그 누구도.
***
릴리는 멀리서 번쩍이는 섬광을 보았다. 매짐도 그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기이한 광경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뭐죠?”
“캘던….”
릴리가 저 혼자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몸을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매짐이 황급히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전하!”
“…….”
릴리는 말을 잃었다. 분명 그 섬광은 캘던 쪽에서 일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보일, 그만한 섬광이라면 떠오르는 것은 하나였다. 그게 터졌어. 그 물건이.
칼….
“안 돼….”
왜 그를 떠나왔는데. 왜 이렇게 멀리, 모두를 속이고 이곳까지.
“전하.”
“…….”
서둘러야 했다. 조금 더 빨리. 한시라도 더 빨리. 아쉬움과 미련에 뭉그적거리다가 결국 때를 놓쳤다. 모두가, 모두가 살아 있을 거란 생각이 안 들었다. 한차례 눈부신 섬광이 지나간 그곳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이 멀리에서도 불씨가 날아드는 게 보였다. 죽었을까? 그는, 그는 죽었을까? 정말, 정말로 죽었을까? 카르낙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웠다. 그 형체를 어루만져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촉과 온기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릴리는 ‘흑’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에이가, 로로, 핀, 루이스… 세일린…. 따라 죽고 싶었다. 아끼는 것은 모두 잃었다. 더 남은 것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라타로 왔을까. 다이옌. 정말로 내가 불길 속에서 춤을 추었나요. 기쁘게 웃고 있었나요. 이제 난 모르겠어요. 정말이지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사막으로….”
“예?”
“사막으로 가야 해요. 사막으로….”
멈출 수 없어. 절대로 멈출 수 없다. 여기서, 여기서 넋을 놓고 멈춰 있을 순 없다. 굶주린 불길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 내 심장과 호흡과 피부와 장기를, 이 보잘것없는 생명을 집어삼키고 나서야 만족할 것이다.
알아. 그게 새로운 시대야. 알기어스의 맥이 완전히 끊어져야만 이 불길은 잦아들 것이다. 대륙을 녹일 듯한 뜨거움도, 가뭄도, 굶주림도, 열기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게, 그게 새로운 세상이야. 더는 타락한 신의 아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더는 눈처럼 빛나는 머리도, 은백색 눈동자도 존재하지 않는 그 세상만이 엘버그의 미래이다.
매짐은 그런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막으로 간다고? 서쪽에 있는 투로의 사막으로 간단 말인가. 이 불길이 그곳에서 시작되었을 텐데, 이 불씨들은 그곳으로부터 날아왔을 텐데.
“전하, 불길이 캘던까지 번졌습니다. 그런데 사막을 어떻게…. 갈 수 없어요. 온통 불바다일 겁니다.”
“가야 해요. 매짐. 내가 가지 않으면 결코 멈추지 않을 거예요.”
“…….”
무엇이? 무엇이 멈추지 않는단 말인가? 릴리는 눈물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휘청이며 허리를 굽히고 밭은 숨을 힘겹게 토했다. 바르르 떠는 입술을 질끈 무는 것이 보였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슬퍼하면서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걸음을 뗐다. 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고통스럽고 눈물이 났다. 매짐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성에서 몰래 빠져나오신 겁니까? 무리에서 이탈하신 이유가 사막으로 가기 위해서였습니까? 거기서 불에 타 죽으시려고요?”
“매짐.”
“안 돼요. 못 갑니다. 그렇게는 못 하십니다.”
매짐은 단호했다. 미쳤어? 누가 그런 짓을 하도록 두고 봐? 그렇게 죽는 꼴을 누가 두 손 놓고 지켜본단 말인가.
“전하는 엘버그의 왕비세요. 전하는 고귀한 분이시잖아요.”
“매짐.”
“신의 아이잖아요. 하얀 늑대와 교감하시잖아요. 폐하를 살리셨잖아요. 이 세상에 그게 가능한 분은 오직 전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 분을 불길에 잃을 순 없어요. 절대로요.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못 가세요.”
절대로 안 된다. 절대로. 그녀가 죽으면 그녀의 고귀한 피는 누가 이어 간단 말인가. 엘버그 땅에 신의 아이는 더 이상 남지 않게 된다. 아이를 잃은 땅에 어느 부모가 축복을 내린단 말인가. 파니릴리의 죽음은 그에게는 대륙의 죽음과도 같이 여겨졌다.
“돌아가요. 무리로 돌아가요, 우리. 같이 성전으로 가서 그곳에서… 불길이 멎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분명 폐하도 그곳으로 오실 겁니다. 캘던의 화마를 피해 북쪽으로 오실 겁니다. 그곳엔 불길이 닿지 못할 거예요. 결코 그 얼음을 다 녹이지 못할 겁니다.”
그곳은 신의 땅이니까. 신의 아이가 잠들어 있는 얼음의 땅이니까. 그러니까 그곳에서라면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매짐, 성전의 얼음은 녹고 있어요. 이 불길이 진정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그곳도 엘버그의 다른 땅처럼 사막이 되어 버릴 거예요. 더는 태울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불길은 사그라들 거예요. 아니, 그래도 사그라들지 않을지도 몰라요. 태초의 엘버그 땅처럼요.”
“…….”
“불길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알기어스의 피뿐이에요.”
매짐은 입을 벌렸다. 그녀가 언제나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가야 해요.”
“…그럼 전하는 죽어요.”
죽어. 죽는다고. 불길에 닿기도 전에 그 뜨거움에 뼈까지 녹아 없어질 거다. 제아무리 신의 아이라지만, 그래서 범인과는 다른 능력을 지녔다지만 시뻘건 불길 아래 사지가 멀쩡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령 멀쩡하다손 치더라도 그런 불확실한 기적을 믿고 그녀를 불길 아래 내던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와 불은 태생부터 상극의 존재가 아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타 죽을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높았다. 그래, 죽을 게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