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테이먼이 대장간으로 향한 것은 이재민들이 성을 떠난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직 성안은 대규모 이동으로 인해 소란한 상태였고 게드릭은 탈출하기에 앞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장검과 방패가 필요했다.
대장간은 늘 대장장이들이 쇠를 두드리느라 소란했으므로 그는 대장간이 가장 조용한 때를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화로와 모루를 지나 막 손질을 마친 농기구와 주방 날붙이들 사이로 몇 개의 장검과 방패가 보였다.
테이먼은 서둘러 대장간의 창고 안에서 날이 짧은 단검 하나와 제 손에 잘 맞는 장검 하나를 챙겨 들었다. 스코크가 나타난 것은 그때쯤이었다. 그는 정신없이 검을 챙기는 테이먼의 뒤로 아주 조용히 나타나 아주 조용히 그에게 어둠을 드리웠다.
“지나친 자유는 방종으로 이어지곤 하지.”
낯선 목소리에 테이먼은 움찔 떨며 몸을 돌렸다. 막 손에 쥔 장검의 끝을 겨누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신에게 악감정은 없소.”
테이먼이 위협하듯 말했으나 스코크는 동요하지 않았다. 제 코끝을 겨눈 칼날은 보이지도 않는 듯 그는 침착했다.
“비 전하께서는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셨지.”
“그건 자비가 아니야.”
테이먼은 고개를 저어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녀가 내게 준 것은 엄벌이다. 창살 없는 감옥을 선사했을 뿐이다.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그녀의 계략이었다. 저를 저 뜨거운 불길 속에 처넣으려 했을 때도 실은, 저를 죽일 마음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그 발칙한 꾀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자신의 아둔함을 비난해야겠지만 동시에 두 번 다시 그녀의 잔꾀에 놀아나지 않겠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이곳에 있으며 파니릴리 발투만의 놀이 인형이 되진 않으리라.
스코크는 고집스러운 테이먼 테르조의 눈동자를 참으로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노인은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읽은 듯 공허한 이야기를 꺼냈다.
“비 전하는 오랫동안, 당신이 선친을 닮아 가지 않을까 걱정하셨지.”
“…….”
“참으로 이상하지. 당신은 알기어스와 핏줄도 섞이지 않았는데.”
“…….”
“닮았어. 오히려, 당신이.”
푸른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온기도 사랑도 이상도 그 어떤 것도 읽히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확증과 오만을 뺀다면 아무것도. 그 모습이 딱 알기어스 왕과 겹쳤다. 자기애를 넘어서 거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미쳐 버린 그와 꼭 같은 눈빛이었다.
“난 적통성을 가진 알기어스 왕실의 후계자야.”
테이먼은 분노가 섞인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 모습마저 알기어스 왕과 닮았다고 스코크는 생각했다. 광증은 딱히 피에서 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혈육이기에 닮는 것 또한 아니었다. 다만 필요한 것은 넘치는 자기애와 오만함뿐. 단 그 두 가지만 갖추면 얼마든지 사람은 미쳐 버릴 수 있었다. 꼭 그처럼.
“당신은 엘버그의 국왕이 될 수 없어, 테르조 경. 아무리 우겨도 진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테이먼은 화를 억누르지 못해 눈을 크게 떴다. 어금니를 물어 턱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스코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테이먼을 분노케 했다.
검을 휘두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사선으로 검을 베어 냈고 스코크는 그대로 꼬꾸라졌다. 노인이 바닥에 엎어진 이후로도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해 씨근덕거렸다. 멀리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테이먼은 서둘러 단검을 하나 더 챙겨 제 허리춤에 꽂고 사람들이 대장간으로 들어오기 전에 쪽문으로 빠져나갔다.
곧 스코크를 발견한 대장장이들의 고함이 들렸다. 테이먼은 그대로 뛰었다. 게드릭이 약속한 장소가 있었다. 시체 소각로에 탈출을 도울 이들을 마련해 둔다 했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테이먼은 회랑을 지나 본성의 뒤쪽 숲을 향해 달렸다.
스코크의 비보를 들은 세일린이 치맛자락을 붙잡고 제의실을 빠져나간 이후 내부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카르낙이 넋이 나가 있는 새에 시종들은 게드릭의 시체와 바닥의 핏물을 닦아 내고 왕의 안정을 위해 얼음과 포도주를 가져다 쟁반에 받쳐 놓았다.
핀은 병사들에게 성문을 닫고 내부를 샅샅이 뒤져 테이먼 테이조를 찾아내라 명령을 내렸고 에이가는 백지장처럼 질린 그에게 잔을 건넸다. 매사에 심드렁하던 그가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에이가는 어떻게든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 상황에 왕을 달랠 역할을 해 줄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으므로.
카르낙이 얼떨떨하게 잔을 받아 들자 속이 타들어 가는지 핀은 제 잔에 와인을 들이부어 벌컥벌컥 마시고는 손등으로 입을 훔쳐 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꼬락서니란 말인가.
“좋아. 상황을 좀 정리해 보자고.”
짧은 한숨을 내쉰 후 자할은 다소 높은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게드릭인지 개새끼인지 이 작자가 테이먼 테르조의 도주와 관련이 있는 거지? 그리고 이 개새끼는 베오르토가 친히 지명해 이곳으로 보낸 작자고?”
카르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으므로 로로가 그를 대신해 말했다.
“그리고 베오르토는 폐하께서 에나의 자리에 친히 올린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연타로 뒤통수를 맞으셨다?”
자파가 거들었다. 로로는 침묵했다. 긍정이었다. 핀은 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아직, 놈이 성을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하여간 신의라곤 없지. 빌어먹을 엘버그 샌님들.”
그 허여멀건 것들은 아무튼 믿을 게 못 된다. 뻑하면 배신에 뻑하면 뒤통수에 제 잇속을 챙기느라 바쁘지 명예나 의리나 신념이나 우정 따위는 진작 엿 바꿔 먹은 놈들이었다. 그러면서 말만 번드르르. 누구보다 선의와 신앙을 강조하면서 실상 그것들과 가장 먼 종족들이 아닌가. 값비싼 옷만 둘러입은 이 엘버그의 비렁뱅이들은.
세일린은 정신없이 대장간으로 향했다. 리쿠스가 막 스코크의 시신 위로 하얀 천을 덮어 주고 있었다.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멍하게 다가오는 세일린의 존재를 알아챈 리쿠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알은체했다.
“부인.”
“…….”
테이먼이 휘두른 검날은 그의 콧등과 뺨에도 끔찍한 상흔을 남긴 채였다. 그것을 보고 나니 부르르 몸이 떨렸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 제 배를 부여잡고 그녀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파니릴리가 떠올랐다. 그녀를 떠올리니 더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괴로워하는 세일린의 어깨를 리쿠스가 위로하듯 어루만졌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비 전하께서…. 전하께서 정말 아끼던 분이세요.”
그녀는 누구보다 스코크를 좋아했지. 이 성안에서 선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릴리에게 그녀는 아버지 같은 이였는지도 모른다. 늘 그와 그의 불을 좋아했다. 모루에 쇠붙이를 두드리는 그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릴리의 평안한 얼굴을 떠올렸다.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파니릴리는, 그녀는 분명 테이먼 테르조에게 자비를 베풀었건만, 기꺼이 과오를 껴안고 자신의 식구로 받아들여 주었건만 그런 사촌의 사랑에 이런 식으로 보답한단 말인가.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죄송합니다, 부인.”
리쿠스는 처참한 어조로 사과했다.
“상처가 너무 깊어서 도저히 손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세일린은 카르낙을 생각했다. 단단한 강철처럼 상흔 하나 없던 카르낙 발투만이 곧 두 쪽으로 쪼개질 듯 실금이 가는 것을 보았다. 비 전하가 상처 입으면, 그분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러면 카르낙 발투만도 무너질 것이 뻔하다.
파니릴리 발투만이 카르낙에게 그가 가진 전부임을 세일린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어딜 가신 건가요. 비 전하, 대체 어디를. 모든 것이 후회되었다. 카르낙이 은밀히 떠날 준비를 하라고 했던 그때 그 사실을 파니릴리에게 고했다면 상황은 지금과 달랐을까.
차라리 카르낙의 그 명령을 거부했다면, 그랬다면 파니릴리는 어쩌면 저를 데리고 떠나 주었을까. 그랬다면 카르낙 발투만은 지금처럼 두려움에 넋을 놓는 일이 없었을까.
“세바스탠….”
세일린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다가 중얼거렸다. 모자를 벗어 스승에게 예를 갖추는 많은 수련공들 사이 누구보다 각별했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리쿠스도 그녀를 따라 주위를 둘러보다 말했다.
“제가 왔을 때도 보이지 않았어요. 분명 스코크의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한 자일 텐데.”
***
대장간을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성벽의 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병사들이 스코크의 시신을 발견한 것 같았다. 더불어 저의 도주도 눈치챘을 듯하여 테이먼은 마음이 더 급해졌다. 사방에 병사들이 깔리기 시작했고 테이먼은 깊은 숲으로 몸을 숨겼다. 그곳에 숨어 삼엄해진 경비병의 눈을 피해 아주 조금씩 이동했다.
만일 자신이 캘던성을 차지하게 된다면 이 성 뒤편의 숲부터 모조리 불태워 버리리라 결심했다. 파니릴리의 정원까지 합하여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모두. 멍청한 투로 놈이 사막에서 자란 탓인가 숲에 대한 판타지가 있는 모양이지. 적이 숨을 곳을 마련해 둔 카르낙의 아둔함을 그는 혀를 차며 비웃었다.
멀리 시체 소각로가 보였다. 거뭇하게 그을린 소각로의 입구에 잿빛 망토를 두른 사내도 한 명 보였다. 저 작자가 게드릭이 말한 그 사내이리라. 테이먼은 검을 허리춤에 넣고 몸을 낮춰 신속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그는 갑작스레 걸음을 멈추고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누군가 나타나 단검으로 사내의 멱을 땄고 쓰러진 그의 허리춤을 뒤져 열쇠 뭉치를 가로챈 탓이었다. 그가 갈취한 열쇠가 무엇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테이먼은 알 수 있었다. 소각장 자물쇠 열쇠이리라. 그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일이 정말이지 복잡해지고 있었다.
세바스탠은 죽은 사내의 몸을 발로 차 저에게서 멀리 굴려치워 버렸다. 흥분 때문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미친 듯이 달려온 탓인지 헐떡거리는 숨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얼굴에 튄 핏물을 소매로 닦아 내는데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테이먼 테르조가 나무 뒤에서 나타나 아주 천천히 살금살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세바스탠은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저를 벌레 보듯 쳐다보는 저 고귀하고 경박한 사내의 면상을 그대로 뭉개 주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성문을 제외하고,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거든.”
세바스탠은 한껏 비웃었다.
“시체가 나가는 문 말이야. 네놈의 꾀는 아주 얕아서 물길처럼 투명하지.”
“순순히 열쇠를 내놓는다면 네 목숨만은 살려 주마, 대장장이.”
“순순히 성을 탈출하고 싶었다면 스승님을 죽이지 말았어야지.”
“…….”
테이먼은 제가 그어 버린 노인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내 손에 죽을 짓을 했어.”
“그래?”
세바스탠은 다시금 그를 비웃으며 눈을 굴렸다.
“그렇다면 너 역시 내 손에 죽어 줘야겠다. 내게도 이유는 충분하니까.”
그러자 테이먼은 소리 내 웃었다. 감히 이 천박한 대장장이 놈이 뭐라는 건가. 감히 나를?
“너 따위 불이나 만지는 천박한 잡종이 내게 맞서겠다고?”
“그거 알아? 가문에 빌붙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한심한 나리. 발투만 왕가는 나와 내 스승님을 존중해 주었다. 누구도 내게 잡종이라거나 천박하단 이야긴 하지 않았지. 성안의 누구에게도 너와 같은 더러운 말을 내뱉은 적이 없어. 그들에게 있어 싸구려는 오로지 너 같은 귀족 놈들뿐이었으니까. 잘난 머리카락과 피부만이 전부인 너 같은 한심한 종자들이야말로 제 손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낸 것이 없는 천박하고 비루한 자들이니까.”
부러 헛웃음을 켰으나 테이먼의 낯빛에는 불쾌함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