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세일린.”
왕의 목소리에 세일린은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카르낙이 별다른 호위도 없이 어느새 제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그녀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
“폐, 폐하.”
재빠르게 젖은 뺨을 훔쳐냈지만 이미 모두 보인 뒤였다. 세일린은 민망함에 낯빛을 붉혔다.
“…누구의 문제야? 너? 아니면 네 남편?”
“…….”
그녀는 답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애틋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또 그것에 무지하기도 하였다. 하기야 그는 엘버그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고 저는 근본도 없는 캘던성의 시종이었으니 존중이나 배려 따위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모두 감당해야 맞았다. 결혼의 증인이 되어 준 국왕의 앞에서 그녀는 면목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내게 죄송할 것 없어.”
“…….”
“다만, 왕비가 눈치 챌 일은 없도록 해. 마음 아파할 테니.”
“예,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세일린은 공손히 답했다. 얌전히 조아리는 모양새가 어쩐지 측은하였다.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 세일린.”
“…….”
“너는 네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인 중 하나야. 그것만은 명심해라.”
“예.”
“내일. 이재민이 북쪽으로 떠나고 나면, 릴리와 함께 엘버그를 떠날 배편을 마련해 둘 거다.”
세일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서둘러.”
“폐하.”
세일린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헌데… 어째서… 서둘러 떠나란 것은….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챙겨야 할 사람이 있다면 전부 챙겨서 가도록 해. 캐시랬던가, 네 방 동무였다던. 그 외에도 함께 가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누구든 데려가도 좋아. 금전과 물자는 충분히 준비해 주마.”
“…하지만….”
세일린은 그에게 정확한 답을 듣고 싶었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캘던을 덮쳐 온 화재. 많은 이들이 그 화재를 두고 신이 내린 저주라 했었다.
파니릴리와의 결혼으로 다소 누그러졌던 발투만 왕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이 화재로 인해 다시 팽배해지기도 했다. 혹, 폭동이라도 일어날까 걱정하는 것일까, 그 때문에 파니릴리를 미리 엘버그에서 대피시키는 것일까.
세일린이 생각할 수 있는 바는 거기까지였다. 분명 그보다 더 많은 이유가 있을 터인데 카르낙은 세일린의 물음은 다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고 세일린은 그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저 멍하게 멀어져가는 왕의 뒷모습을 보며 속앓이할 뿐이었다.
성전에 도착할 때까지 연명할 식량을 받기 위해 창고 앞에 2백여 명의 이재민이 기다란 줄을 섰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근위병들이 곳곳에 무장을 한 채 서 있었고 분위기는 다소 삼엄하며 긴장감이 넘쳤다.
“치료사를 대동하는 게 좋겠어요. 제법 긴 여행이잖아요.”
에이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리쿠스에게 견습생이 몇 있긴 한데…. 쓸 만한 이들인지는 아직 모르겠네요.”
오래전, 하게너의 영지에 다다르기 전 파니릴리의 서신을 통해 폭포수가 흐르는 숲을 발견한 이후 리쿠스는 왕명 하에 견습생을 뽑아 정력적으로 그들을 교육시켰다. 대부분이 사료를 채취하고 기록하는 일이었으나 그조차 해 보지 않은 이들에 비하면 무엇에라도 도움은 되리라. 적어도 무슨 약초가 어디에 효능이 이는지 정도는 알 테니 말이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 나을 테지요. 서둘러 이야기 해 두어야겠네요.”
“네. 그들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어차피 모두 북쪽에서 만날 텐데요, 뭐. 그렇죠, 전하?”
에이가는 불안한 얼굴로 릴리의 손을 붙잡았다. 이재민이 떠나고 일주일이 지나면 집을 버리고 북쪽으로 향하라는 왕령이 시내 곳곳에 선포될 터였다. 물론 떠나지 않겠노라 버티는 이들도 있겠지. 오히려 폭동을 일으키며 분노하는 이들도 있을 거다.
다시 불길이 번지기 전에 가능한 많은 이들을 캘던에서 내보내야 했다. 그 생각을 할 때면 에이가는 현기증을 느꼈다. 눈앞이 까마득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모든 것이 두려웠다. 다시금 거대한 시련을 겪기에 그녀는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요.”
릴리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오늘도 이렇게 일상이 흘러가고 있잖아요. 에이가.”
그녀의 말대로다. 불안하고 바쁘고 정신이 없는 가운데에도 해는 뜨고, 따듯한 볕은 빛나고, 모두 분주하게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아침을 먹고 각자의 할 일을 바지런히 하다가 차 한 잔을 마시며 일광욕을 하거나 정원을 거닐거나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었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일과들이었다. 부질없다 해도, 당장 내일의 삶을 장담할 수 없다 해도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 다음날 꽃이 피우길 기대한다. 정원에 물을 뿌리고 잡초를 뜯고 한달치 먹을 소고기를 염장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줄줄이 걸어 놓으며 앞날을 준비했다. 이것은 허무한 일일까, 아니면 현명하고도 희망적인 습관일까.
파니릴리는 에이가와 이재민들의 배급 상황을 살펴보고는 리쿠스의 치료실로 향했다. 갖가지 풀과 유리병, 종이가 뒤섞여 정신이 없는 가운데 리쿠스는 반가운 얼굴로 파니릴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왕비 전하.”
인사하는 그의 턱 주변과 손끝에는 푸른색 잉크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근래에 본 중 가장 지저분한 몰골이었으나 그리하여 지금까지 본 중 가장 학구적이고 열정적이었다. 학자의 탐구심으로 중무장한 그에게 바깥에서 일어나는 세기말적 현상은 영 거리가 먼 뜬세상 이야기인 듯싶었다.
“리쿠스, 무척 바빠 보이네요.”
“예, 에이가 님 통해 이야기 들었습니다. 이재민들을 돌보아 줄 치료사가 필요하시다고요.”
“네.”
“함께 보낼 견습생과 챙겨야 할 고약과 약초들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지난번 하게너 영지 근처에서 약초를 채취한 덕분에 수량은 넉넉하답니다. 모두 전하의 현명함 덕분이지요.”
리쿠스의 칭찬에 릴리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과한 칭찬이에요, 리쿠스. 하지만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그나저나,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부르셨으면 제가 급히 찾아뵈었을 텐데요.”
“아. 그게….”
리쿠스의 물음에 릴리는 조금 뜸을 들였다. 선뜻 입을 떼기가 껄끄러워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오피움 물약을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오피움 물약을요?”
리쿠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파니릴리는 약초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피움의 쓰임새와 부작용을 모르고 꺼낸 이야기는 아닐 테고 그것을 알면서 구한다는 것 역시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최대한 의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전하, 혹 어떤 통증 때문이라면… 인독말풀과 필리수스 고약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요. 오피움이면 좋을 것 같네요.”
“…전하. 그 약의 용도를 설마 모르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 테지요?”
“네. 알아요.”
양귀비꽃 종자에 칼집을 내어 얻어낸 진액을 굳혔다가 다시 불에 정제하여 만들어 내는 이 물약은 보통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만 처방하는 약이었다.
극심한 환각과 혼수 상태가 반복되며 육신과 영혼을 갉아먹는, 그러니까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이에게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고자 하는 독약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왕비가 원하고 있었다. 정확히 그 용도를 알고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고 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믿어도 돼요, 리쿠스.”
“물론입니다, 전하. 감히 누가 전하를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기에 더 두려운 것이다. 안 된다고 거절해야 할까? 그러나 무슨 이유로? 그녀는 엘버그의 주인이었다. 엘버그인이라면 감히 누구도 그 명을 거역해서는 안 되었다. 그 어떠한 이유로도 말이다.
리쿠스는 몇 번을 더 망설이다가 방의 가장 구석진 곳,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을 아주 깊숙한 곳에 놓인 나무 상자를 열어 작은 물약 병을 하나 꺼냈다. 고작 한두 모금이 될까. 냇물처럼 맑고 투명한 액체가 작고 투명한 유리 병 안에 담겨 코르크 마개로 꽉 잠겨 있었다.
“…치사량입니다. 전하. 한 번에 다 들이켜면 곧바로 정신을 잃고 말 양이니 혹 통증을 위해 쓰셔야겠거든 맑은 물이나 혹은 찻물에 희석해 드십시오.”
“고마워요, 리쿠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선 비밀로 해 줘요.”
“…….”
“부탁이에요.”
“전하께서 명하신다면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릴리는 밝게 웃으며 그가 건넨 것을 받아들었다. 어렵게 건넨 것을 받아드는 손길은 무척이나 쉽고 가벼웠다. 그 점이 자꾸만 리쿠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고마워요.”
파니릴리는 리쿠스에게 받은 물약을 제 치마 안주머니에 넣어 단단히 매었다. 그녀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해야 할 때를 떠올렸다. 산 채로, 두 눈을 뜬 채로 그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면 분명 이 약물은 그 뜨거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전보다 훨씬 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회랑을 지나 쪽문을 빠져나가 정원으로 향했다. 세바스탠이 매달아 놓은 유리 풍경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반짝이며 소리를 내었다.
“칼.”
릴리는 그곳에서 자신의 남편을 발견했다. 깡충 짧아진 까만 머리를 헝클어트린 채 그는 저를 보며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황량하고 뜨거운 사막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푸르고 싱그러운 정원의 풍경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검게 그을린 듯 그의 건강한 피부색도, 달빛을 머금은 듯 신비로운 눈동자 색도 모두 그랬다.
“천국이 따로 없군, 릴리.”
카르낙이 정원의 풍경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뜨거운 모래바람마저도 이 정원 안에서는 씻긴 듯 상쾌했고 물을 머금은 듯 시원하고 청량한 향이 났다. 캘던성 안 사람들이 그녀를 얼마나 아끼는 지는 이 정원을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또 그녀를 얼마나 숭배하는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르낙은 그 가운데 붉은 색 동백꽃 하나를 따 파니릴리의 귓등에 꽂았다. 하얀 아내의 얼굴빛이 선명한 색으로 화려하게 만개하였다. 그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왜 꽃은 사시사철 피어 있지 않는 걸까.”
그는 릴리의 잔머리를 쓸며 말했다.
“이 정원의 모든 것들이 영원히 썩거나 시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지킬 수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전부 시들고 썩어가겠지. 불길에 으스러져 가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것들은 그 색과 향을 잃고 꺾이고 떨어질 거야. 그러니 사실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공을 들여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꽃가루를 수분시켜 꽃을 피우는 것들. 단지 한때의 찬란함을 위해 너무나 많은 시간과 노동을 낭비해야만 한다.
“여자들은 대체 왜 이리 덧없는 것들을 좋아하는지….”
그래서 이 덧없는 것들을 영원히 지켜 주고 싶어진다. 영원히 시들지 않게 썩지 않게. 전부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문질러 닦고 달궈 두드려 그 빛이 바래지 않도록 재생시킬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자연의 것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썩고 시들고 덧없지만 무해하잖아요.”
릴리가 남편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귓가에 걸린 꽃잎이 바람에 파르르 떨렸다.
“사라지기 때문에 소유할 수 없지요. 하지만 욕심내지 않는다면 우린 언제든 때가 되면 이들을 볼 수 있어요.”
“…….”
“꺾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꽃을 피울 테니까요. 그럼 우린 그저 그것을 보는 거예요. 향을 맡고 어루만지고 그리고 돌아서는 거죠. 언젠가 또 그렇게 꽃 피울 때를 기다리면서요.”
“…….”
“가치 있는 일이잖아요. 그저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우린 그 아름다움을 목격할 수 있어요.”
릴리의 대답에 카르낙은 그저 웃으며 한걸음씩 천천히 걸음을 뗐다. 손을 잡고 다정히 정원을 거닐어 커다란 고목나무 앞에 섰을 때였다. 카르낙이 급작스레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부비며 드레스자락을 들춰 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