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게드릭의 아침은 질 좋은 포도주에 갓 지어낸 빵을 찍어 먹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엄숙한 가운데 호사스러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추밀원장의 상징인 하얀 제복에 붉은 쉬르코 그리고 붉은 꿩의 꼬리 깃털로 장식한 원통형 모자를 머리에 쓰고는 성서를 한 구절 읽고 에나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그것은 캘던에 온 뒤로 하루도 빠짐없이 행하는 그의 중요한 일과였다.
다 쓴 종이는 꼼꼼히 접어 씰을 붙이고 세바스텐에게 주문하여 제작한 도장 반지를 찍어 아랫것에게 전했다. 때에 맞춰 리쿠스가 제조한 향이 좋은 찻물이 그의 책상 위에 올라왔다. 게드릭은 우아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집어 들고 그 향을 맡았다.
캘던에서의 생활은 사치스러웠으나 그에게는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성전에서는 언제나 잿빛 튜닉에 다 해진 목도리가 그가 가진 의복의 전부였으며 늘 소박하고 절제된 식사로 청빈한 생활이 익숙했었다.
그러나 마치 그에 대한 부작용이라도 되는 듯, 캘던에 온 이후 게드릭은 무엇이든 최고급을 원했다.
그에게는 그것이 당연했다. 자신은 사제였고, 엘버그의 수도에 살며 왕의 고문 역을 하는 추밀원의 우두머리였다. 왕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요구하는 것은 제 처지에 맞는 합당한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근본도 없는 왕과 무너진 엘버그의 관습을 하나부터 열까지 손보고 고쳐야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으므로 그는 엘버그에서 그 자신보다 더 중요하고 엄숙한 임무를 가진 자는 없다 생각했다.
망가진 관습과 명예에 대해 생각하자니 다시금 골이 아파 왔다. 저 천하디천한 투로 놈을 어떻게 한담. 어느 정도 배운 자라면 끊임없는 대화와 정중한 토론으로 설득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어디, 투로가 그런 것이 통할 신사이던가.
게드릭은 에이가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치마를 두른 여자가 왕실의 재무를 돌봐 왔다니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다.
“원장님. 테르조 경이 찾아오셨습니다.”
시종이 테이먼의 도착을 알렸다. 게드릭은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오오. 그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먼을 맞이했다. 비록 포로의 신분이 되었지만 게드릭이 생각하기에 그는 이 캘던성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혈통과 품위를 가진 인물이었으므로 예를 갖추는 것이 당연했다.
“테르조 경.”
“원장님.”
테르조는 우아하게 머리를 조아렸고 게드릭은 흡족하게 웃었다.
“지난밤 평안하셨는지?”
평안한 밤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척이나 싫고 불편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고. 굳이 표현하자면 맡은 바 의무를 다한 밤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게드릭은 대답 대신, 피가 묻은 시트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당신이 요구한 거요.”
카르낙 발투만과 파니릴리 알기어스의 혼인 이후, 아내의 순결을 확인하는 엘버그의 혼인 풍습은 사라졌다. 금지하노라 공표한 것은 아니지만 왕은 스스로 그 관습을 깸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니 금지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게드릭은 달랐다. 비록 예전처럼 모두의 앞에 그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더라도 혼인을 집전한 사제에게만은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테이먼은 그의 말을 따랐다. 첫날밤, 아내의 순결을 증명하기 위한 이불보를 가지고 그를 찾아온 것은 그런 연유였다.
게드릭은 붉은 핏자국을 확인한 후 그것을 시종에게 넘기며 물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은 좀 하셨나요?”
“…….”
테이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게드릭은 웃었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분이 근본도 없는 투로의 포로가 되었으니… 괴로우실 만도 하지요.”
“…….”
테이먼은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늠하듯 잠시 침묵하더니 약간의 조소를 담아 말했다.
“이제 당신은 그의 고문관일 텐데… 그다지 그를 존경하지 않는 듯하군요.”
그러나 게드릭은 웃었다.
“저는 오랫동안 아마네스 님의 종으로서 엘버그의 전통과 문화를 숭배해 왔습니다. 투로를 존경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
게드릭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묘해졌다. 거기엔 친근함이나 유쾌함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다. 다만 웃는 낯빛 아래 그의 진짜 속내를 궁금해하면서도 또한 경계했다. 그의 교활함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어쩌잔 말입니까. 사이좋게 마주 앉아 발투만 왕에 대해 욕이라도 하며 회포나 풀자는 겁니까?”
차갑게 묻는 말에 게드릭은 소리를 내 웃었다. 그것을 보는 테이먼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테르조 경.”
한탄하듯 그를 부르고 게드릭은 유쾌함에 범벅된 눈을 들었다. 마주하는 테이먼의 낯빛은 계속해서 차가웠다.
“겨우 그런 계집들이나 하는 담소 따위를 나누자고 그대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아무렴요. 저는 테르조 경에게 다시는 없을 일생일대의 기회를 드리겠노라 확언하기 위하여 당신을 불렀습니다.”
“…….”
테이먼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역시, 평생 발투만 왕의 종으로, 개로, 포로로 살고 싶으시진 않을 겁니다. 그렇지요?”
“…….”
“저 역시 그대가 투로의 발아래에 깔려 옴짝달싹 못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이 성을 탈출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
이제 그의 미간은 의심으로 완전히 구겨졌다. 혼란스러웠다.
“…당신은 왕을 위해 에나가 보낸, 그의 심복이 아니오? 절대적으로 그의 명에 복종해야 하는?”
“물론이지요. 나는 아마네스 님의 종이자, 그분의 대리인인 에나 님의 충성스러운 심복입니다. 그렇기에 옳은 일에 대해서는 망설이지 않고 행하지요.”
“…….”
“그러니, 당신의 탈출을 돕겠습니다.”
“…에나는 이 일에 대해 압니까?”
테이먼이 묻자 게드릭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뗐다.
“이것은 옳은 일입니다. 테르조 경.”
“…….”
게드릭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옳다는 것에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거요.”
그것을 바라보는 테이먼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러나 이것은 절호의 기회, 거절할 이유 따윈 없는 제안이었다.
매짐은 막사의 한편에서 황순이의 갈퀴를 정성스레 빗질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마구부의 종들이 근위대원들의 말들을 모두 관리하지만 매짐은 아직 근위대의 정식 기사가 아니었으므로 자신의 말은 자신이 관리해야 했다.
물론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매짐은 언제나 황순이를 제 손으로 돌보았다. 그는 자신의 말이 좋았다. 특별히 뛰어난 혈통도 아니고, 특별히 다른 말들보다 튼튼하거나, 빠르지도 않지만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말이었으며 단 하나뿐인 동료였다.
“매짐.”
멀리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왕이었다. 매짐은 깜짝 놀라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한때, 왕은 그의 객식구였다. 한 집에서 자고, 한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함께 쇳물을 붓고, 함께 무두질을 했으며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일했었다.
지금은 그런 과거가 까마득했다. 그와 대등하게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매짐에게 카르낙은 더욱더 위대한 왕이 되었다. 절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야 마는, 진정한 주인.
“폐하.”
“이재민들의 이야기는 들었을 거야.”
“북쪽으로 향한다는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이야기.”
“예. 들었습니다.”
그 일로 핀은 열댓 명의 근위대 병사를 따로 떼어 내 이재민들의 호위를 명했고 모두가 그것에 대한 준비로 분주했다. 돌아가는 사태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호위를 앞두고 병사들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팽창해 있었다.
매짐에게 그것은 꼭 아주 거대한 전투를 앞둔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근위대의 우두머리인 핀과 그의 수족 루이스의 분위기를 살피자면 더욱 그랬다. 그들은 캘던성으로 돌아온 이후 내내 진지하고 예민했다.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보지 못할 만큼.
“너도 그들을 따라가도록 해.”
“…….”
저도요? 하고 되묻고 싶었지만 감히 그렇게 되물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알겠다’고 답하기엔 의아하여 어물쩍거리자 카르낙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양친도 함께 북쪽으로 모셔 가도록 해.”
“…….”
양친을? 분명 그의 고향은 캘던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골목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 무리에 부모님을 합류시키란 말인가? 어째서? 두 분은 비록 촌구석일지라도 분명 그 깊은 숲속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계실 것이다.
구태여 그런 두 분을 모셔 북쪽으로 떠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주 큰 난리가 나지 않는 이상….
거기까지 생각하던 매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감히 고개를 들어 카르낙을 바라보았다. 왕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하고 무거웠다.
분명 이것은 배려일 것이다. 왕이 베풀 수 있는 자비이며, 은인에 대한 보답임에 틀림이 없었다. 감히 그에게 이유를 물을 수는 없지만 그것만은 분명했다. 그런 이유로 매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매짐의 답을 듣고 카르낙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고작 그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왕은 일부러 막사를 방문한 것이다. 고작 그 한마디를 위해.
그 생각에 매짐은 마음이 벅찼다. 비록 대하는 신분은 바뀌었어도 왕은 여전히 그 사내였다. 함께 잔을 부딪치고 쇠를 두드리던. 무뚝뚝하나 언제나 진실하고 아내를 참으로 끔찍이 여기던. 그때로부터 흘러 지금에 이르렀어도 그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분명 그럴 것이다 매짐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매짐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카르낙은 혹, 파니릴리를 마주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정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지난밤 그녀는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떠들어 댔다. 그리하여 카르낙 역시 정원이 궁금했다. 평소 풀이나 꽃 따위에 관심조차 갖지 않고 있음에도 과연 어떠한 풍경이 아내를 그토록 기쁘게 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운이 좋다면 그곳에서 아내를 만나 함께 정원을 거닐 수도 있을 터였다.
카르낙은 가능하면 이 성안에서 그녀와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에 가능한 많은 것들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가 떠난 이후에 곱씹을 것들이 많아지길 원했다. 그러면 지루한 나날들을 견뎌 내기가 조금 더 수월해지겠지. 조금 더 행복해질 테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조바심이 나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빠른 속도로 안뜰을 지나 화랑을 가로지르는데 커다란 화랑의 기둥 옆에서 세일린을 보았다.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면 그저 인영만 남았을 그 실루엣을 카르낙은 놓치지 않았다.
그 표정과 자태가 곧 허물어질 듯 위태로워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파리한 얼굴로 분명 그녀는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