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93화 (193/231)

193화

성 밖에 검은 깃발이 보였다. 망루를 살피던 병사가 호각을 불자, 에이가가 서류 더미에 파묻혔던 머리를 번쩍 치켜들었다.

“국왕 폐하십니다!”

드디어! 그녀는 펜을 책상 위에 집어 던지듯 내려놓고 방을 뛰쳐나갔다. 멀리서 다가오는 근위대 무리를 보고 있자니 너무나 반가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노환과 관절염 따위는 새까맣게 잊은 채 치맛자락을 붙잡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 성문 앞에 섰다. 이미 내벽과 외벽, 도개교까지 성문을 기준으로 좌우에 수많은 군중이 왕을 맞이하기 위해 운집해 있었다.

“에이가 님!”

반가움에 볼을 발갛게 물들인 세일린을 보자 에이가는 감격에 겨워 손을 맞잡았다.

“폐하께서 드디어….”

세일린 역시 흥분으로 말을 잇지 못했고 에이가는 그렇다고 대답할 여유도 없어 연거푸 고개만 끄덕였다.

대체 이게 얼마 만의 귀환인가. 왕이 자리를 비운 새에 로로도 없이 저 혼자 이 큰 수도의 살림을 꾸려 가느라 얼마나 벅찼던가. 밤새 잠 한숨 이루지 못한 날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로로도 없이 추밀원조차 꾸려 주지 않고 대관식을 핑계로 팔자 좋게 여행을 떠난 그를 원망하던 때도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그러다가 테르조 일행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에는 그저 살아서 돌아와 주길,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 왔더랬다.

그런 그들이 드디어 돌아온다. 가을의 초입에 성을 나섰던 이들은 겨울이 거의 다 지나갈 때쯤이나 되어서야 다시 성에 발을 들였다. 그것도 몸 성히.

아마네스 님 감사합니다. 에이가는 몇 번이고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제 가슴팍에 두 손을 그러모으고 국왕 부부를 기다렸다.

“에이가!”

멀리서 파니릴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저런, 왜 고상한 마차를 두고 말을 타실까, 잠시 멈칫했지만 에이가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파니릴리 님!”

파니릴리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에이가를 덥석 껴안았다. 에이가는 비로소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흐느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혹여, 당신이 테이먼 테르조 때문에 어떻게 되었다면 나도 따라 죽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이지, 무슨 일이 생겼더라도 살아만 있다면 이 노쇠한 몸이라도 희생해 당신을 살리겠노라 신께 맹세하기도 했다.

사지 불구가 되어도 좋으니 그저 살아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정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할 말이 천지를 뒤덮을 만큼 쌓였는데도 에이가는 흐느끼기만 했다. 사실 이제 아무 상관없었다.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사지 멀쩡하게 돌아왔으니까. 비록 전보다 야위고, 전보다 그을리고, 또 전보다….

“세일린.”

“비전하.”

파니릴리가 세일린도 마찬가지로 힘껏 껴안았다.

“그런데, 전하, 왜 머리가….”

또 전보다 머리가…. 왜 이렇게 짧아졌는지 분명, 이제 상관이 없긴 하지만….

“아아.”

하고 파니릴리가 제 짧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쓱쓱 매만졌다.

“사연이 좀 길어요. 에이가.”

아, 하고 에이가가 신음했다. 아쉬움에 애가 탔지만 세일린이 부러 밝게 말했다.

“하지만 전하께서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지요?”

그러자 에이가도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시금 눈가에 눈물이 차올라 그녀는 제 소매로 콕콕, 눈가를 찍었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비 전하께서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신 것 말고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바랄 것이….”

정말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노라 말하며 파니릴리의 손을 잡았다가 그녀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까끌한 감촉에 에이가는 다시 미간을 구겼다.

“…비… 비 전하… 이… 이 상처…. 이 상처는….”

“아아. 이건.”

그랬다. 파니릴리의 손바닥에 흉측하고 긴 상처가 나 있었다. 에이가는 참담한 빛으로 고개를 들어 릴리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다치신 겁니까? 혹, 다른 곳에도 이렇게 상처가, 상처가 많은 건가요? 칼에, 칼에 찔리신 건가요? 예? 그러셨나요?”

“다른 상처는 없어요. 정말이에요!”

혹시 어디 하나 상했을까 펄쩍거리는 에이가의 잔소리가 반가워 파니릴리는 까르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며 다시 에이가를 안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여전히 건재한 것 같아 안심이네요.”

“건재하지 않습니다. 이 늙은이의 잔주름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잘 살펴보세요. 10년은 더 늙어 있으니까요.”

“나는 눈에 뵈지도 않는가 보지?”

카르낙이 제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핀잔을 늘어놓았고 세일린은 한걸음 물러나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에이가는 왕을 향해 눈을 홉떴다.

“폐하께서는 성을 비우시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늘 멀쩡히 나가 멀쩡히 돌아오셨으니 이번에도 멀쩡히 돌아오시겠거니 했답니다.”

“이봐. 나도 이번에 죽다 살아났다고.”

에이가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면부를 살폈다.

“글쎄요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건강해 보이십니다만….”

하, 하고 카르낙이 짧게 헛웃음을 쳤다. 정말이야. 정말 죽다 살아났다니까. 파니릴리가 아니었으면 어쩌면. 그 숲에서 정말 뒈졌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래. 하지만 그 이후 전보다 더 건강해졌으니 에이가가 저를 향해 저렇게 눈을 홉뜨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좀 억울한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세일린.”

카르낙이 오랜, 파니릴리의 시종을 향해 아는 체를 했다.

“페하.”

세일린은 볼을 붉히며 더 깊이 몸을 숙였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반겨 주는 것은 세일린뿐이로군.”

다만 그 말 한마디에 세일린은 제 입술을 꾹 물었다. 아아. 잊은 감정을 불러오는 것은 어째서 이토록 쉬운가.

“아, 아닙니다. 캘던의 모든 이들이 폐하의 귀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좀 씻고 싶군.”

카르낙이 장갑을 벗어 시종에게 건네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랫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온 탓에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에이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물을 데워 두겠습니다. 간단한 요깃거리와 함께 폐하께서 살펴보셔야 할 장부도 함께 보내지요.”

“숨 돌릴 틈도 안 주는군.”

“지금이 그런 때입니까? 하실 일이 아주 산더밉니다.”

아아, 하고 카르낙은 떫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파니릴리는 그의 뒤를 따르며 웃었다. 그러며 다정하게 세일린의 손을 맞잡았다.

“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세일린.”

“저도 그렇습니다. 전하.”

카르낙이 에이가의 잔소리를 들으며 장부를 펼쳐보는 동안, 릴리는 에이가가 준비해 둔 욕조에 들어가 먼저 몸을 씻어 낸 뒤 세일린의 도움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창가에 앉아 묵묵히 에이가의 융단 폭격을 견뎌 내고 있는 카르낙의 얼굴은 단 몇 분 새에 폭삭 늙어 있었다.

“릴리. 제발 이 노인네에게서 나를 좀 구출해 줄래?”

카르낙의 하소연에도 에이가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저 들으세요!”

에이가가 고함쳤다.

“성벽 보수 건에 대해 확인을 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대금을 지급할 수 있어요. 또 이재민들에 대한 구제 방안도 명해 주셔야 하고요.”

“지금껏 해 온 대로 해 가면 되잖아.”

“성안에 사람들이 미어터져 가는데, 이대로 두란 말씀이세요? 사람들이 거지처럼 계단이며 길목마다 쪼그려 앉아 살아가고 있어요! 배급만으로도 한계가 있어요.”

“빈민 구제는 내 전공이 아니라. 릴리.”

카르낙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저를 부르자 릴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폐하.”

“당신이 좀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어.”

“아.”

“잠시만….”

하고 카르낙을 불러 세우려 하였으나 그는 에이가의 말을 무시하고 욕조가 준비되어 있는 옆방으로 달아나 버렸고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목욕 시중을 드는 시종에게 문서 더미를 안겨 주며 말했다.

“폐하께서 씻으시는 내내, 이 문서를 읽어 드리거라.”

“…제가 말입니까?”

“그래.”

“…….”

그러다가 제 목이 달아나면 어쩌죠? 라고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 낯빛이었다. 그러나 에이가가 눈을 부라리자 시종은 아무 말 없이 서류 뭉치를 들고 옆방으로 향했다. 그가 정말로 명대로 카르낙이 들을 수 있도록 문서 내용을 읽어 내려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에이가는 명령에 불복했다고 칼을 휘두르지 않지만 카르낙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화재 때문에 캘던의 서쪽이 전소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 건가요?”

릴리가 묻자 에이가는 카르낙에게도 펼쳐 들었던 지도를 다시 한번 펼쳐 들어 릴리에게 보여 주었다.

캘던의 성벽 밖, 서쪽이 모두 새까만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다행히, 성벽에 피해는 없습니다. 그전에 비가 내려 준 것이 천만다행이지요.”

성벽을 다시 축조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것은 에이가의 말처럼 다행인 일이었다. 그러나 피해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 이 정도라면 캘던 전체의 3분의 1이 소실되었다고 보아야 맞았다.

“사막에서 불씨가 날아들었다고 들었어요. 그건 정확한 이야기인가요?”

“화재가 있기 전, 로로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에이가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구깃한 편지를 릴리에게 전했다. 이미 카르낙이 한차례 본 듯 편지는 완전히 펼쳐져 있었다. 릴리가 편지를 읽는 동안 에이가가 설명했다.

“폐하의 명에 따라 멀루아로 향하기 며칠 전에 써 보낸 것인데, 자할과 자파가 영지를 떠나기로 결정한 뒤 2, 3일쯤 지나니 불씨가 날아들기 시작했다더군요. 아시겠지만 하게너의 영지는 대부분 황폐해져 불씨가 날아들어도 태울 것이 없었겠지만 설마 캘던까지 날아올 줄이야….”

편지에는 사막에서 날아드는 불씨에 대한 로로의 위기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와 그로 인해 지쳐가는 투로들의 건강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일찍이 이토록 뜨거웠던 적이 없었다며, 메마른 날씨로 인해 진흙을 개어 만든 하게너의 성벽 역시 잿가루처럼 부서져 내려간다고. 그는 사막에서 날아드는 불씨가 커지는 것을 염려했다. 또 대체 사막의 어디쯤에서 날아오는 것인지 그조차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 불이 꺼지기 전에는 불씨 또한 그치지 않고 날아올 것이라고.

“그럼 다시 날아올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한차례 비가 내렸으니…. 불길도 멎었겠죠.”

아니, 그렇게 잠재울 수 있는 불길이 아니다. 겨우 한차례 내린 소나기로 잠재울 불길이라면, 에나가 그토록 두려움에 떨며 알기어스의 장자를 가져다 바치려 하지도 않았으리라. 아이를 내놓지 않은 왕을 대신해 어린 아기 오백 명을 바치며 괴로움에 치를 떨지도 않았으리라. 불씨는 분명 다시 날아올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피해를 남기겠지. 한시바삐 서두르지 않으면 결국 그 불은 엘버그 왕국을 모조리 삼키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