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폐하.”
베오르토가 분주한 시종들의 가운데를 헤치며 다가왔다.
“에나.”
에나는 우선 파니릴리를 향해 정중한 인사를 건넨 뒤 카르낙을 향해 물었다.
“테이먼 테르조는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무엇을?”
카르낙이 되물었다. 그러자 베오르토가 다시 말했다,
“그를 캘던으로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를 두고 가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베오르토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그의 세력들이 모두 등을 돌렸으니 인질로도 그 쓰임이 다한 자입니다. 그러니 제 쓰임이 다 할 수 있도록 이곳에 두고 가시는 게 어떠실지요?”
카르낙은 의아함에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날카로운 낯빛에 오만함이 더해졌다.
“얼마 전 지진과 산사태로 이곳에는 일손이 부족합니다. 또… 그에게 개인적인 의구심도 있고….”
“놈이 말한 그 푸른빛 말하는 건가?”
정곡이 찔려 베오르토는 답하지 못했다. 테이먼이 푸른빛에 대해 이야기한 이후로 그는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직접 테이먼을 지하로 데려가 그가 본 빛을 저 역시 보고 싶었다. 그러나 테이먼이 왕의 포로인 이상 베오르토는 그를 함부로 쓸 수 없었고, 적당한 때를 기다리려 했으나 캘던의 화재로 카르낙이 급하게 짐을 꾸리는 바람에 베오르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설마 그 이야길 정말로 믿는 거야?”
“…폐하, 하지만 그는… 라미레스 가문의 혈통입니다.”
“그래서? 그게 진실이라면 놈을 네 다음 에나로라도 추대하려는 건가?”
“그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신의 땅에서 칼을 겨누었다고 방방 뛸 때는 언제고, 태세 전환 한번 빠르군.”
“…….”
베오르토는 몸을 움츠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많은 사제들이 그에게 말했다. 투로를 왕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투로가 왕좌에 앉은 까닭에 세상에 재앙이 일어나고 있다고.
처음엔 그 말들을 무시했다. 카르낙 발투만이 아니라면 에나의 자리는 언감생심 꿈조차 꾸어 보지 못했을 자신이 그의 덕에 엘버그 왕국에서 가장 영예롭다는 자리에 올랐으니 누가 뭐라 해도 베오르토에게 카르낙 발투만은 엘버그의 적통성을 갖춘 왕이었다. 그래야만 그의 손에 삼중관을 넘겨받은 저 역시 정당한 에나가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테이먼이 말한 그 푸른빛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성전에 일어난 지진과 산사태도, 자꾸만 녹아 가는 얼음도,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가 캘던에 불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베오르토는 악몽을 꾸었다. 테이먼 테르조가 말한 그 푸른빛이 제 온몸을 불사르는 꿈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침대 시트가 축축했다. 간밤 불볕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듯 흠뻑 식은땀을 흘린 탓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진저리가 쳐지는 기억. 정말로 사제들의 말처럼, 왕좌에 잘못된 이가 앉아 신께서 노하셨는가. 그리하여 아마네스 여신이 꿈에 나타나 내게 경고를 하는 걸까. 너는 잘못된 왕을 섬기고 있노라고. 그것을 라미레스의 혈육인 테이먼을 통해 저에게 알리고자 하심인가.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공포가 그의 꿈자리와 정신을 갉아먹었다.
“폐하. 송구합니다. 저는 다만, 엘버그의 에나로서 어디까지나 아마네스 님의 뜻을 받들고자 할 뿐입니다.”
“베오르토, 너는 발투만 가문의 안정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았다.”
“…….”
알고 있다. 처음 에나의 자리를 제의하며 그가 원한 것은 딱 하나였다. 발투만 왕권의 안정. 그것을 위해 끈도 세력도 든든한 뒷배도 없는 그를 에나로 택했다.
“그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제 에나의 자리에 올랐으니 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나를 의심하고 테이먼 테르조의 헛된 망상을 확인하는 일인가?”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나는 너의 뜻을 받아들여 추밀원의 장이 될 사제까지 모셔 가는데, 이게 내가 베푼 아량의 보답인가?”
“폐하,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라….”
보다못한 릴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나와 함께 있었어요. 에나.”
“…왕비 전하.”
“그러니 그가 무엇인가를 보았다면 나 역시 보았을 겁니다.”
“…….”
“하지만 전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
“미안해요. 에나. 그를 기록소에 데려가 괜한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당치않은 말씀이십니다. 비 전하.”
“테이먼은 제 사촌 오라버니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저와 함께 캘던으로 갈 거예요.”
파니릴리가 나서자 베오르토는 더는 대꾸할 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에나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는 제 남편을 향해 몸을 돌리며 에나에 대해 말했다.
“불안해하고 있어요.”
“에나뿐만은 아니지. 세상이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
릴리는 종말이라 말하는 카르낙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평온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일련의 사태들로 에나뿐 아니라 엘버그의 모든 인간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데 말이다.
그것은 성전을 떠나며 더 확연히 드러났다. 수많은 인파가, 짐을 꾸려 북쪽 성전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재앙을 피해 신의 자비에 기대고자 하는 불안과 열망에 대한 증표였다.
매짐은 카르낙이 ‘누렁이’라 이름 지어 준 갈색 말을 탄 채 불안하게 사람들의 행렬을 둘러보았다. 그는 테이먼 테르조를 가둔 죄인 호송 마차를 근거리에서 감시해야만 했음에도 자꾸만 뒤처졌다,
“매짐!”
루이스가 고함쳤다.
“한눈팔지 마라! 멍청아! 대열이 흐트러지잖아!”
“죄, 죄송합니다!”
매짐은 서둘러 말고삐를 당겼다. 누렁이는 속도를 올려 호송마차 옆에 바짝 붙었다.
“투로 때문이야.”
테이먼이 창살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매짐은 험악한 눈으로 그를 곁눈질 했다. 흐트러진 눈빛으로 테이먼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친놈인가 싶었다.
“투로 때문에 세상이 망해 가고 있어.”
“입 닥쳐,”
매짐이 이를 물고 협박했다.
“너 따위 샌님이 뭘 알아. 그렇게 치자면 세상은 진즉에 망해 가고 있었어.”
단지 불을 다룬다는 것만으로,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단지 머리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산 이들에게는 지금도 예전과 다름없는 지옥이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카르낙 발투만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여전히 불가에 앉아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불을 다루는 하잘것없는 대장장이가 아닌 왕의 기사로 죽을 수 있다면 매짐에게 그만 한 영광은 없다.
핀은 선두에서 카르낙의 뒤를 따르다, 속도를 조금 더 늦춰 파니릴리의 옆에 붙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다가왔겠거니 생각하여 그를 쳐다보니 핀은 신중한 어조로 조용히 물었다.
“테이먼을 어쩌실 생각입니까?”
핀의 성격이라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당연히 테이먼 테르조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기에 그의 생사를 제쳐 두고 제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며 사실상 테이먼 테르조를 등진 코르넬리오와 브리다스 가문의 행방을 따져 본다면 더욱더 그랬다. 테이먼은 이제 발투만 왕가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테이먼은 라미레스 가문의 후손. 지금 에나의 태도를 살펴보자면 그를 죽이는 것으로도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핀.”
릴리가 다소 침잠된 어조로 그를 불렀다. 언제나 상냥하고 부드럽던 파니릴리의 억양이 평소와 달라 핀은 얼굴을 굳혔다.
“네, 전하.”
“화재가 잠잠해지면 곧 왕국은 평화를 찾을 거예요. 만일 그때, 테이먼의 태도가 지금과 다르지 않다면….”
핀은 조금 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릴리가 말을 이었다.
“그를 죽여요.”
“…….”
핀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를 죽일지, 말지 그 판단을 저보고 하란 말씀이십니까?”
“네.”
“어째서요?”
간단한 이야기다. 계속해서 테이먼이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왕이라 우기는 것 같다 판단되면 그때 가서 명령을 내리면 된다. 파니릴리 발투만의 이름으로 근위대장인 자신에게 명을 내리면 두말 않고 놈을 그녀가 원하는 방식대로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파니릴리는 명에 의한 처리가 아닌, 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처리이길 원했다. 마치 자신은 그 자리에 없을 거라는 듯이.
“저보다, 당신의 판단이 더 정확할 것 같아서요.”
릴리는 웃으며 답을 얼버무렸다.
“여러모로 의외로군요. 전하. 저는 당연히 결코 그를 죽이는 일은 없을 거라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어째서요?”
“그야….”
그야 당연히. 파니릴리 알기어스는 그런 사람이니까. 생명을 중요시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가능한 모든 것을 자신이 품으려 하는. 또 그 때문에, 카르낙 발투만의 약점이 되고야 마는. 파니릴리 알기어스는 아직까지 핀에게 그런 여자였다.
그녀의 선함을 존경하면서도 끝내 그 도덕에서 나오는 폐단을 증오하게 되고야 만다. 파니릴리 역시 그러한 그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젠 대칭점에 서 있던 그에 대해서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를 위한 정의는 없다는 걸, 모두를 위한 도덕도, 모두를 위한 선의도 없다는 걸. 초야에 묻혀 살던 때의 아둔한 망상이었다.
“카르낙에게 에나의 지지는 무척이나 중요하니, 가능한 에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할 거예요. 에나는 테이먼 테르조의 처형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사제들의 눈치를 보는군요.”
“에나는 바뀌었어도 성전의 사제들은 아직 그대로예요. 그 말인즉슨, 여전히 선대 에나의 뜻에 따라 카르낙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이죠.”
그럼에도 성전에 머무르는 카르낙을 제거할 수 없던 이유는 북쪽 땅에서, 그것도 신의 성전에서 피를 볼 순 없다는 신앙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선대 에나도 캘던에서 리오의 상인을 이용해 카르낙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고.
“멍청한 자들이군요.”
“지극히 보수적이라고 칭해야겠죠. 아직 우린 에나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사제들의 입맛도 맞춰주어야 해요.”
“살얼음판이네요. 이래서 제가 정치를 싫어합니다. 차라리 칼을 드는 게 편해요.”
이분법적인 세계는 얼마나 쉬운가. 내 편이 아니면 적이니, 그저 모조리 베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적을 모조리 해치우고 나면 평화가 찾아오고 말이다. 그전까지는 분명 그러한 세계였다. 카르낙 발투만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세상은 참 살기 편했다. 치열하고 위태로웠어도 모든 것이 단순하고 쉬웠으니까.
“단순하게 생각해요. 때가 되면 테이먼을 향해 그 칼을 들면 돼요.”
“때가 되면 전하께서 명령하시죠. 저보다 현명하시니.”
핀은 파니릴리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고 말고삐를 당겨 카르낙과 함께 선두에 섰다. 다정하지 않은 말투임에도 이상하게 다정하게 느껴졌다. 문뜩 이제야 핀이 저에게 진심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지도, 너무 이르지도 않은 때였다. 릴리는 희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