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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91화 (191/231)

191화

“폐하. 안 됩니다!”

베오르토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호소했다.

“이곳은 아마네스 님의 성전입니다. 제발 멈추세요. 이 이상, 피를 보아선 안 됩니다! 우리 모두를, 아, 아니, 아니 왕비 전하를 생각하십시오!”

“…….”

카르낙의 약점을 잘도 알고 있군. 확실히 이 정도면 엘버그 공인 팔불출이다. 핀은 혀를 찼고 카르낙은 날을 거두어 제 검집에 넣었다. 그는 명령했다.

“미친 개처럼 날뛰는 꼴이 체력은 모두 회복한 모양이다. 놈을 원래의 자리에 처박아 둬. 소 돼지의 분변이나 청소하도록,”

“네, 폐하.”

핀이 그의 말에 복종했고 카르낙은 더 볼일이 없다는 듯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핀이 왕을 따라 나서기 전 테이먼에게 말했다.

“테이먼 테르조, 페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잊지 마라.”

“…….”

테이먼은 카르낙을 따르는 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투로 놈이 내 목을 거두어 가는 대신 자비를 베풀어 살려 두었으니 감사라도 하라는 말인가. 빌어먹을. 테이먼은 수치스러워 제 이를 갈았다. 쾅, 하고 주먹으로 벽을 치자 베오르토가 다가왔다.

“테르조 경.”

테이먼은 고개를 들어 에나를 보았다. 머리 위에 얹어진 삼중관 때문인지, 그는 권위적이고 금욕적으로 보였다. 실상 그는 그리 권위적이지도 금욕적이지도 않은 사내임에도. 베오르토는 착잡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의 부친을 잘 알고 있소. 신의 성전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것을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일이오.”

“…내 부친과 잘 알고 있다면. 베오르토, 투로의 편에 붙은 당신을 용서치 않으시겠지.”

테이먼의 일갈에 그의 낯빛이 굳었다.

“그는 엘버그의 국왕이오. 파니릴리 알기어스와 결혼하여 엄연히 그 적통성을 갖추셨단 말이오. 게다가. 테이먼 테르조, 당신은 그와의 싸움에서 패해 포로가 된 신분이 아니오!”

“난 푸른빛을 봤어.”

“…….”

베오르토는 의아함으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테이먼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확신에 차 있었다. 패자임에도 마치 승리자라도 된 듯이.

“당신은 본 적이 없겠지, 베오르토.”

“…….”

“파니릴리 역시 보지 못했어.”

테이먼은 다시 그 빛을 떠올렸다. 그 푸르고 강렬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빛을. 어둠 속에서 눈이 부시게 발광하던 그 빛이 그의 모든 감각을 사로잡았던 때를 떠올리며 그는 황홀하게 말을 이었다.

“그 빛은 오직, 오직 나만이 보았어. 아마네스 여신의 빛을.”

“…….”

베오르토는 아연한 빛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캘던의 근위병들이 그를 끌고 방 밖으로 사라졌다. 멍한 베오르토의 심기를 살피며 사제들이 걱정스레 다가왔다.

“에나님.”

“…이 성전은 아마네스님의 첫 번째 아이가 잠든 땅 위에 지어졌지.”

그는 성스러운 아마네스 여신의 경전 속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이 땅위의 불꽃을 끄고 이 곳에 잠들었다 했네.”

많은 이들이 그것을 그저 전설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에나, 경전에 적힌 모든 말들을 그 누구보다 사실이라 믿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혹시, 정말 테이먼 테르조가 라미레스의 영혼을 본 것은 아닐까, 혹 그를 통해 신이 무언가를 계시를 내리려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베오르토가 명했다.

“은밀히, 기록소의 지하를 살펴보게. 무엇이라도 좋으니 발견된 것이 있다면 즉시 내게 알려야 할 걸세.”

“예. 베오르토 님.”

그의 명을 받은 사제가 조용히 방안을 빠져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서서 한참 동안 허공을 주시하다가 베오르토 역시 곧 텅 빈 방 안을 빠져나갔다.

3일째 밤, 릴리는 의구심이 드는 구절들을 모두 필사해 제 가슴팍에 감춰 기록소를 나왔다. 모두 잠이 든 시각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성전 안은 분주했다. 서둘러 몸을 놀리는 이들은 모두 시종과 캘던에서 데려온 근위병들이었다.

“전하.”

핀이 기록소에서 나온 릴리를 먼저 발견하고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좀 바빴어요.”

약간의 이죽거림이 담긴 핀의 인사를 아무렇지 않게 튕겨 버리고 릴리는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아아. 폐하께서 캘던으로의 귀환을 좀 서두르시겠다 하셔서요.”

“왜요?”

핀은 조금 더 몸을 숙여 은밀히 속삭였다. 혹여 다른 이들이 듣고 동요할까 신중한 기색이었다.

“캘던 서쪽에 불이 났답니다.”

“네?”

릴리가 화들짝 놀라자 핀이 검지를 곧추세우며 ‘쉬’ 소리를 냈다. 릴리는 주변을 살피고 다시 몸을 움츠렸다. 그녀 역시 속삭이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오늘 아침 에이가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어요. 캘던의 서쪽 지대가 불타 마을 하나가 통째로 소실되었다고 하더군요. 살아남은 자들을 일단 성안으로 들여놓았지만 구제할 방도를 결정해 달라고요.”

“…얼마나, 얼마나 죽었다고 하는데요?”

핀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자세한 내용은 저도 알지 못해서요.”

“폐하께선 어디 계시죠?”

“침실에 계십니다.”

릴리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종종걸음을 치며 침실로 향했다. 침실 안도 이미 짐을 꾸리는 시종들로 분주했다.

“칼.”

릴리의 부름에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던 카르낙이 몸을 돌렸다. 그는 아내의 등장에도 반가운 기색을 비치지 못했다.

“핀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카르낙은 대답하는 대신 에이가에게서 온 서신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릴리는 주저 않고 종이를 펼쳐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반가운 에이가의 필체였지만 내용은 자못 심각했다. 읽어 내려갈수록 릴리의 낯빛은 더욱 파리하게 질려 갔다.

“…정체 모를 불씨라니.”

“서쪽에서부터 날아 온다고 하니 사막에서 불어오는 불씨임에 틀림없어,”

자할과 자파가 하게너의 영지를 탈출한 이유도 분명 같을 것이다. 점점 더 메말라 가고 뜨거워진다 했으니.

“캘던까지 불씨가 불어왔다면, 그 사이의 다른 도시들도 화재로 소실되었을 거야.”

“그럼….”

“재앙이지.”

카르낙은 단언했다. 더는 내리지 않는 비, 모래 폭풍, 지진, 산사태, 그리고 이젠 화재다. 더 겪을 재앙은 무엇이 있을까. 하늘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만 한 우박?

“전부 사막처럼 변해 가는 거야, 릴리. 우리가 살았던 곳처럼 머지않아 엘버그의 모든 도시가 그렇게 변할 거야.”

“…….”

“여길 버려야 해.”

버려? 여길? 어떻게?

“캘던으로 돌아가 짐을 싸. 에이가. 세일린, 가능한 당신이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골라서 이 땅에서 떠나야 해.”

“…떠나라고요?”

“그라타로 돌아가. 릴리.”

“칼.”

“앞으로 더 많은 불씨가 날아올 거야. 캘던 왕좌 위에 있던 불을 기억해?”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씨가 혹 거기에 닿는다면….”

닿는다면? 불씨가 그 거대한 화로에 닿는다면 어떻게 될까? 비에도, 눈에도,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그 불길에 옮겨 붙는다면…? 그럼 그것은 거대한 화마로 변하는 걸까? 그래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이 되어 엘버그 땅 전체를 삼켜 버릴까?

카르낙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고개를 저었다. 이 땅에는 미련이 없다. 엘버그란 나라에도 그다지 미련이 없다. 조금은 상냥해지고 싶었던 것도, 조금은 희망이란 것을 꿈꾸었던 것도, 조금이라도 이 땅을 사랑했던 것도 오직 파니릴리가 이곳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그곳으로 보낼게. 약속해. 네가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모두 남김없이 그곳으로 보내 줄게.”

“…당신은요?”

“릴리.”

카르낙이 쓴웃음으로 그녀를 부르고 부드럽게 아내의 뺨을 쓸었다.

“난 투로야. 이 모든 재앙은 나로 인해 시작되었으니 내가 끝내야 해.”

투로.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 왕좌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멸망을 꿈꾸었다. 지금 와 돌이켜보니 그것이 운명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처음의 그 마음대로, 그 분노를 껴안고 이대로 소멸해버리는 것이. 그렇게 처절한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 제가 가지고 태어난 운명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릴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있어요. 당신은, 당신은 저주받은 그런,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난 알아요. 전부 다.“

전부 다 보았다. 에나의 일기에서. 당신 역시, 당신 역시 아마네스가 만든 피조물. 당신은, 당신은 왕을 경계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존재야. 당신은 멸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당신은…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신이 원하는 것은 투로의 피가 아니라 알기어스의 피야.

알기어스 왕의 가장 귀한 피. 그게 아마네스가 원하는 거야. 그것이면, 그것이면 이 모든 재앙을 막을 수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가 소멸되어야 한다면, 그건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나야.

“릴리.”

“…….”

그러나 말할 수 없다. 카르낙이 그 진실을 안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이 엘버그 땅에서 탈출시키려 들 것이 뻔했다. 그렇게 이 엘버그의 땅과, 그 안의 사람들과 같이 종말을 맞이하려 들 것이다. 릴리는 그 모르게 숨을 한번 삼키고 태연히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듯. 제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에 제 손을 겹치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우선, 우리 어서 캘던으로 돌아가요. 그곳에 돌아가면 뭐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그곳으로 돌아가는 동안 방법을 찾을 것이다. 알기어스에겐 더 이상 장자가 남아 있지 않아. 알기어스에겐 더는 아이가 남아 있지 않아. 나 이외에는. 아마네스 여신이 원하는 건 알기어스에게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의 피. 파니릴리 알기어스인 것이다. 그를 위해 카르낙을 이용하고 있다. 모든 것은 운명인 거지. 처음 그라타를 떠나오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정해진.

오래전 부르테가 말했다. 뜨거운 불길 위에서 춤추고 있는 너를 보았노라고. 릴리는 이제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불길에 던져져 기쁜 얼굴로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당신의 말이 맞았어요, 다이옌. 난 기꺼이 그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 기쁨에 춤을 출 거예요. 그로 인해 나는 많은 사람들을 구할 테니까요. 어떻게 이것이 축복이 아닐 수 있겠어요. 어찌 기쁨이 아닐 수 있겠어요. 어찌 춤을 추지 않을 수 있겠어요. 다이옌, 아아. 이것은 행복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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