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릴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책장을 덮었다. 다른 정보가 필요해.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과학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것들. 에나는 아굴을 던지면 불꽃이 꺼지리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여신에게 계시라도 받았을까? 그렇다면 그 계시를 적어 놓진 않았을까? 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층 더 아래로 향했다. 한 층 더 아래로, 또 더 아래로. 횃불을 벽에 걸고 촛대에 불을 밝히고 그녀는 기록소를 거닐었다. 책을 꺼내 들어 목차를 살피거나 훑어보아도 그녀가 아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조금씩 진이 빠져 허리를 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데, 벽에 파인 네모난 홈에 그릇만큼 작은 단지들이 놓인 게 보였다.
“…….”
일전에 테이먼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기록소 지하에는 서적과 함께 진귀한 유물들이 같이 있다던. 저것이 유물들인가? 그동안 책에 정신이 팔려 단지들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 모양새가 꽤나 은밀하여 집중하여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눈치채기조차 힘들었다.
릴리는 촛대를 들고 그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다지 화려해 보이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데, 이 안에 테이먼이 말한 귀한 성물들이 있는 걸까. 릴리는 단지 중에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종이도, 가죽도 아닌 것이 안에 가득 둘둘 말려 있었다. 호기심이 일어 테이블 위에 가져가 촛대를 놓고 뭉치를 꺼내 펴 보았다.
“뭐야, 이게.”
아주 얇은 나무껍질들. 질긴 것을 종이처럼 얇게 잘라 말아 놓았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이걸로 뭐 하려고 이렇게 단지에 둘둘 말아서….”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껍질을 매만지다가 문득 손끝에서 기묘한 감촉을 느꼈다. 릴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번 반질거리는 나뭇결을 만져 보았다. 그러다가 몸을 숙여 촛불 빛 아래로 더 가까이 가져가자 표면 위에 예리한 것으로 긁은 자국들이 보였다. 릴리는 의자에 앉아 더 세심히 그 모양을 살폈다.
“…글씨야.”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찢기고 해져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진 않았지만, 뭉치 가득 반들거리는 껍질 위에 빼곡히 쓰인 것들은 분명 글씨였다. 릴리는 미간을 구기고 조금 더 내용에 집중했다.
꿈에 하얀 늑대가 나타나 서쪽에 검은 사람이 나타났다 하였다. 불길은 커졌고 더는 막을 수 없다. 왕은 아들을 생산하였으나 사흘 만에 왕비와 함께 죽었다. 검은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왕가는 대가 끊긴다.
그다음 장을 넘겼다.
넉 달 만에 검은 사람을 죽였다. 왕은 병사 이 백을 족히 잃었다. 두 번째 비를 맞이하였고 이번에는 후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대가 끊긴다.”
릴리는 첫 장에 적힌 말을 되뇌었다. 검은 사람이 나타나면.
현재, 알기어스 왕의 아들들은 모두 죽었으므로 대는 끊겼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원해 릴리는 다른 단지를 가져와 뚜껑을 열고 둘둘 말린 나무껍질들을 펴 들었다.
왕가에 아들이 귀해졌다. 그 때문에 왕은 장자를 내놓지 않으려 한다. 곧 알기어스가 파멸할까 두렵다.
가뭄이 지속되고 있다. 불길이 거세지면 분명 검은 사람이 나타난다. 왕에게 장자를 내놓도록 회유하기 위해 카이섹을 보냈다. 장자를 내놓아야만 불길이 멎을 것이다.
왕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왕위를 반드시 사내아이가 이어 가라는 법은 없다고 설득하려 한다. 점점 씨가 귀해진다면 그 방법 말고 도리가 없다.
군사를 풀어 투로들을 도륙했으나 그중 검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다. 왕이 장자를 내놓지 않으면 불길이 잦아들 때까지 엘버그의 갓 난 사내아이를 바쳐야 한다. 왕은 곧 권위를 잃을 것이다.
갓난아이 오 백을 불길에 던졌다. 그 덕에 불길은 멎었다. 흘린 피가 너무나 많다. 다음엔 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희생될지 알 수 없다. 희생이 많을수록, 투로의 수는 더 많아진다. 아마네스 님의 저주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왕은 당신의 머리 위에 그토록 많은 영혼을 짊어지고도 그 죄에 무감해지고 있다. 그는 아이를 잃을 것이다.
릴리는 캘던의 왕좌를 떠올렸다. 겸손과 그 무거움을 잊지 말라며 왕이 머리 위에 올려 두었다는 꺼지지 않는 불. ‘아이 오 백을 불길에 던졌다.’ 그러니까… 릴리는 거기까지 떠올리다 곧 머리를 털어 생각을 지웠다.
끔찍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왕은 반드시 첫 번째 아들을 그 불길에 바쳐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 대가 끊긴다니. 몰랐던 이야기다. 일기 형식의 기록들은 분명, 분명 에나의 것이 틀림없다. 종이도, 펜도, 잉크도 구할 수 없던 시절 에나는 자신의 사적인 기록을 얇게 썬 나무 단면 위에 새기는 것으로 괴로움과 번민을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떠올렸다. 그는 하나뿐인 알기어스 가문의 적장자였다. 그를 희생하지 않아 검은 사람이 태어난 걸까. 그 검은 사람은 카르낙일 테고, 그의 손에 알기어스는 대가 끊겼다. 영원히.
그렇다면 그가 미쳐 버린 이유도, 알기어스의 대가 끊긴 이유도 모두 아마네스를 거역해서? 결국 모든 것이 신의 뜻이란 말인가? 릴리는 허공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당신은 어쩌자는 건가요. 아마네스? 이젠 당신의 계획은 뭐죠?
카르낙은 핀과 근위대 그리고 베오르토를 대동해 테이먼의 방을 찾았다. 멍한 얼굴로 초라한 침대에 누워 있는 그에게 카르낙은 로리아나로부터 전해 들은 사실을 알렸다.
“코르넬리오와 브리다스가 너를 배신했다더군,”
“…….”
테이먼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핏줄인 바르시 코르넬리오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할 모양이던데. 어떻게 생각해?”
잠시 안면을 굳히던 그는 이내 웃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는 그의 모습을 보고 카르낙도 웃었다.
“이제 네가 무슨 가치가 있지, 테이먼 테르조? 넌 인질로도 가치가 없고, 군사로도 가치가 없고, 재물로도 가치가 없으니 네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이베트 코르넬리오는 멍청한 여자야. 브리다스는 자식에게 눈이 멀었고. 알리온과 멜타 같은 똑똑한 이들이 곁에 없다면 그들은 자멸할 거야.”
카르낙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먼은 그런 그를 눈으로 좇았다. 단단하고 거대하고 수려한 외모에 비단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투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우아하였다. 그가 가진 아우라가 정말로 타고난 것인지, 왕좌가 만들어 낸 환영인지, 아니면 파니릴리 알기어스를 곁에 두어 만들어진 그녀의 잔상인지 테이먼은 몹시도 궁금했다.
“넌 돌아갈 곳이 없어, 테이먼. 오히려 네가 코르넬리오에게로 돌아가면 넌 죽임을 당할 거다. 그것만은 내가 장담하지.”
“그래서 당신에게 감사라도 표하라는 건가? 비천하게라도 살게 해 주어서?”
카르낙이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기묘한 바이올렛 빛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일렁거렸다.
“사실 지금으로선, 테이먼 테르조. 네 죽음조차 별다른 가치가 없어.”
“…난.”
그는 침대 시트를 구겨 쥐었다.
“난 너와는 다르다, 카르낙 발투만.”
“아직도 네가 전정한 왕이라고 생각해?”
“그래.”
테이먼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답했다. 카르낙은 웃었다.
“넌 패배했어.”
“지진 때문이었어. 산사태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였을 거다.”
“이런 것을 신이 도왔다고 하지 않던가? 아마네스 여신인가 뭔가는 네가 아니라 나를 택한 것 같은데.”
그 말에 참지 못하고 테이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아무 병사에게나 다가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핀이 곧바로 그를 제지하기 위해 제 검을 쥐려 했으나 카르낙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핀은 얌전히 검을 바로 하며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먼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난 네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 있다, 카르낙 발투만!”
“변변찮은 핏줄?”
“아니! 그것보다 더 고귀한 것! 내겐 명분이 있고, 사랑하는 이 왕국을 지켜 내야 한다는 의무가 있어!”
“맙소사.”
카르낙은 실소하며 신음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제 이마를 쥐고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테이먼은 바짝 약이 올랐다.
“내겐 최초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이 엘버그 땅이 창조되기도 전에, 아마네스 여신이 이곳에 내려오기 전부터 나의 선조는 이 땅에 살고 있었다. 내 피가 곧 이 대지이고, 이 대지의 모든 것이 곧 내 뿌리야. 너는 그것을 파괴하고 살육하고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려고 하잖아!”
“…….”
“네놈에겐 어울리지 않는 자리야. 네게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다, 발투만. 다만 네가 그 신성한 자리에 엉덩이를 비비고 앉아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 뿐.”
“그래.”
카르낙은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바로 그런 얼굴을 보기 위해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야.”
“…….”
“그렇게 바짝 독이 오르고 불쾌한 얼굴을 보기 위해서. 고귀하신 나으리.”
테이먼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칼을 휘둘렀다. 에나가 외쳤다.
“안 됩니다! 이곳은 신의 성전입니다! 당치도 않은 짓을! 그만두세요!”
그러나 테이먼은 괘념치 않고 카르낙에게 달려들었다. 동작은 기민하고 빨랐다. 휘두르는 손길은 강인했고, 힘이 좋아 비껴간 칼날이 벽에 박힐 때마다 굉음을 내며 부스스, 연기를 일으켰다.
“저거 미친놈이네.”
핀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눈으로 열심히 그를 좇았다. 괜히 왕좌에 오르겠다, 허풍을 떤 것이 아니다. 확실히 뛰어난 검술 실력과 민첩하고 기민한 신체를 가졌다. 탄력성이 좋아 제 체격에 비해 배는 더 힘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곧 그가 휘두르던 칼날이 부러졌다. 옆에서 누군가가 신음했다. 제 검을 빼앗긴 병사였다. 두 동강이 나 바닥에 뒹구는 칼날을 보며 놈은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걱정 마. 내가 좋은 것으로 하나 마련해 주겠다.”
핀이 그를 위로했다.
“…….”
테이먼이 반 토막이 된 검날을 보며 굳었다. 저 빌어먹을 놈. 그러고는 눈을 치떠 카르낙을 노려보았다. 카르낙의 검 끝이 제 목젖을 찔렀다. 꿀꺽 침을 삼키면 그대로 목이 꿰뚫릴 것 같아 테이먼은 입을 벌린 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카르낙이 검 끝을 그의 목젖에 더 바짝 들이밀었다. 테이먼은 미간을 구기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더, 더, 더. 결국 등이 벽에 닿았고, 칼날은 목젖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으으으, 하고 테이먼이 악물린 신음을 냈다. 조금씩, 조금씩, 핏방울이 아래로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