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89화 (189/231)

189화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란 생각은 안 들어요.”

“단단한 사람도 어딘가 나약한 구석은 있기 마련이야. 테이먼에게는 그것이 명예일 수도 있어. 그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었다면 그는 아주 쉽게 무너졌을 거야.”

“만일 그가 본 것이 헛것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그는 사람들이 믿는 대로 정말 뭔가….”

카르낙은 돌려 말할 마땅한 표현을 떠올리려다가 포기했다.

“왕으로 선택받은 사람일 수도 있지. 난 죽어 마땅한 운명이고.”

“칼.”

릴리가 힐책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르낙은 빙그레 웃었다.

“난 기록소에 들어갈 수 없었어, 릴리.”

“…….”

“행여 나로 인해 당신이 어떻게 될까 겁이 났거든.”

자신의 땅에 들어온 투로가 노여워 지진을 일으킨 거라면, 분명 성전에서도 마찬가지겠지. 평생 엘버그와 그들이 믿는 신을 조롱하며 살 작정이었는데 모든 것이 달라졌다. 눈앞의 여자 때문에. 이조차 아마네스가 정해 놓은 운명일까. 만일 그녀로 인해 자신이 파멸해야 한다면, 카르낙은 기꺼이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할 것이다. 거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딘가 당신에 대한 흔적이 있을 거예요. 당신과 같거나 혹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아니면 설화 같은 것들이라도.”

여기가 아니면 그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어떻게든 찾겠노라 릴리는 다짐했다.

“길란이 해 준 말이 있어, 릴리. 언젠가 자미에 포드 부인의 선대에게 하얀 옷을 입은 자들이 나타나 검을 하나 보여 주며 그 검을 녹여 관을 만들어 달라 했지만 불가능했다더군. 그래서 결국 에나가 그 검을 불의 장벽에 던져 버렸다고 말이야. 그리고 길란은, 내가 그 검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카르낙은 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릴리에게 보여 주었다. 잘 벼린 칼날, 단단하고 윤이 흐르는 그 칼날 위로 섬뜩한 광채가 감돌았다.

카르낙은 그날 길란이 이야기해 준 단어들을 하나씩 천천히 읇었다,

“피와 화염과 정욕과 불꽃. 그 검이 그런 것들을 부른다 하더군.”

릴리는 아찔한 칼날의 광채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되뇌었다. 피, 화염, 정욕, 불꽃. 그는 검을 다시 검집에 넣으며 덧붙였다.

“물론 난 그다지 믿지 않지만. 왜냐하면 이 검은 사막에 버려져 있었어. 아주 형편없는 모습으로…. 누구도 그런 대단한 검을 그런 식으로 버려두진 않아.”

“하지만… 전설에 의하면 불의 장벽은 바로 그 사막에 있으니 혹, 그 검을 당신이 발견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카르낙은 웃었다.

“글쎄. 과연 그럴지….”

사막 자체가 1년 365일 불판에 올려진 듯 지글지글 끓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는 면적에는 한계가 있었고 사실상 그 땅이 얼마나 넓은지 그 끝에 당도해 본 일은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 넓은 땅 어디에도 살아남은 것은 없으며 누구도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 역시 그 뜨거움을 이기지 못해 늘 머물던 곳에만 머물렀다. 불의 장벽이란 그리하여 결국 그 뜨거움을 가리키는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너무 뜨거워 도달할 수 없으니 그 사막 어딘가 아주 뜨거운 불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에나에게 아주 특별한 힘이 있어서 그 사막을 온전히 건넜다면 혹시 모르겠군. 물론 그 전에 통구이가 될 확률이 높지만.”

지금의 베오르토를 보자면 삼중관을 쓴다고 다 그런 능력이 생기는 것은 분명 아니겠고 말이다.

“칼이라면…. 철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나올지도 몰라요. 파란색이 과학에 관한 것이라고 했으니….”

“설마 그 지하까지 다시 내려가겠단 거야?”

릴리는 카르낙의 뺨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 제 치맛자락을 들었다.

“가 봐야겠어요. 꽤 오래 자리를 비울 것 같네요.”

“설마… 잠자리까지 안 들어온다는 것은….”

“이해 부탁드려요.”

릴리는 카르낙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서둘러 홀을 빠져나갔다. 카르낙은 오늘도 독수공방이었다. 드넓은 침대에 홀로 누워 있을 생각을 하니 어쩐지 끔찍하여 다시 한번 제 앞에 펼쳐진 지도에 정 중앙, 캘던을 바라보았다. 하루 더 늦춰야 하는 걸까.

“폐하.”

마침 그때, 사제가 쟁반에 편지 하나를 담아왔다.

“왕비 전하께 온 편지이온데….”

아아. 지금 파니릴리는 기록소에 들어갔는데. 아마 하룻밤 정도는 그곳에서 꼬박 새우려 들것이다. 행여 자신이 원하는 서책을 찾아 나오더라도 기록소 밖으로는 가져갈 수 없는 물건이라니 그 안에 자리를 펴고 앉겠지.

그렇게 이틀, 사흘, 길면 나흘이 넘어갈 수도 있었다. 카르낙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리하여 사제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자 카르낙은 쟁반 위의 서신을 집어 들며 그에게 명령했다.

“왕비가 기록소로 들어갔다. 사나흘 안 나올지도 모르니 먹을 것을 챙겨 보내도록 해.”

“하지만 폐하, 기록소에서 취식은 금지가….”

“그럼 왕비를 굶기란 말이냐?”

“하지만….”

“먹을 것을 챙겨 보내도록 해. 기록소에 불을 질러 버리기 전에.”

상대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투로의 왕. 불을 지르겠다 하면 기꺼이 지를 수 있는 이였다. 사제는 서슬 퍼런 카르낙의 경고에 떨며 대답했다.

“…에, 예…. 폐, 폐하.”

그가 굳은 안색으로 서둘러 물러가고 난 후, 카르낙은 편지를 펼쳤다. 따로 인장이 찍혀 있지 않은 것을 보니 에이가로부터 온 것은 아닌 듯했다. 정갈하게 꼭꼭 눌러쓴 필체는 정성스러우나 다소 어색해 보였다. 키르낙은 한쪽 눈을 치켜올린 채 맨 끝 단락부터 확인했다. 로리아나로부터의 편지였다.

전하. 브롱힐스에서 소식을 전합니다. 현재 이곳의 분위기는 뒤숭숭합니다. 테이먼 테르조의 군대가 이곳을 지나 퇴각을 한 까닭입니다. 덕분에 사창가를 찾은 탈영병들에게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현재 테이먼 테르조의 군대는 와해되어 많은 군인들이 진영을 벗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테이먼 테르조의 죽음 이후 진영의 실권은 표면상으로는 럼비의 브리다스, 그러나 실상은 그의 딸인 이베트 코르넬리오가 장악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바르시 코르넬리오를 전면에 내세워 테이먼의 세력을 그대로 흡수하고 싶어 합니다. 부친인 브리다스에게는 막강한 군자금이 있으니 금방 세력을 불릴 것이라고요.

저는 배운 것이 없는 천한 계집이라 정세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나, 이 이야기는 전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펜을 듭니다. 현재 코르넬리오 가문은 브리다스 가문의 영지인 럼비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군대는 어제 이곳 브롱힐스를 거쳐 갔고 탈영병은 내일, 에인힐스를 지나 리오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 해가 뜨는 대로 캘던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혹 그사이 듣는 이야기가 있다면 다시 서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왕비 전하 모쪼록 몸조심하시길. 곧 캘던에서 뵙겠습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 로리아나 드림.

카르낙은 시선은 편지에서 지도로 향했다. 놈들이 어제 브롱힐스를 지났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에인힐스를 지나 동쪽 능선에 다다랐을 것이다.

그곳을 넘어가면 브리다스의 영지인 럼비가 있다. 브리다스 가문이 그처럼 부유한 것은 영지를 둘러싼 험준한 산맥에서 나오는 철광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질 좋은 철광은 엘버그 대륙뿐 아니라 해외로도 수출되어 막대한 부의 원천이 되었다. 또한 전쟁 시 막대한 무기를 지체 없이 생산하고 개발까지 할 수 있는 군력의 중심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알기어스 왕. 왜 하필 그 땅을 브리다스에게 내어 주어선. 하기야, 선대에게 그는 가장 믿음직한 충신이었던가. 지금껏 그를 죽인 저를 적대하고 있으니 과연 선왕의 사람 보는 눈은 제법 정확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할과 자파는 지금쯤 하게너 영지를 버리고 멀루아에 당도했을까. 그들에게 추격을 시킨다면 놈들은 코르넬리오와 브리다스가 럼비에 도착하기 전에 놈들을 처치할 수 있을까. 캘던보다는 멀루아가 그 땅에 훨씬 가까웠고 캘던의 병사들보다 투로인 자할과 자파가 훨씬 더 추격에 능했다.

“비열한 놈들이군.”

카르낙은 편지를 떨구며 혀를 찼다. 테이먼 테르조의 시신조차 확인하지 못했을 텐데, 벌써 그가 죽었다고 믿고 다른 가문을 왕으로 옹립한다니. 이게 다 그 멍청한 코르넬리오의 계집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겠지. 친정아버지와 모웨나의 적장자인 제 아들이 앞뒤로 있으니 더는 무서울 것이 없다는 건가.

어찌 되었든 이로서 테이먼 테르조는 그들에게서 버림받았다. 더 인질로서, 그가 쓸모가 있을까. 아니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서는 테이먼 테르조가 살아 있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원하지 않는 일이리라.

카르낙은 자리에 앉아 지도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자파에게 건넬 서신을 써 내려갔다. 놈들이 럼비에 당도하기 전에 브리다스를 처치하라는 내용이었다.

만일 그 일이 잘되면 다 썩어 빠진 멀루아가 아닌 럼비를 둘의 손에 넘겨 주면 된다. 럼비의 고고한 영지민들이 기함할 일이지만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회유해서 되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면 된다. 저를 증오하는 이까지 품어 줄 아량은 되지 못하니까.

그 시각, 파니릴리는 사제들이 어쩐지 잔뜩 겁을 먹은 채 허겁지겁 싸 준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 들고 기록소의 지하로 향했다.

카르낙의 말한 검에 대한 일화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연대가 언제쯤일까, 아예 엘버그 초기의 역사는 아니리라. 포드 가문도 있었을 때이고, 철검이 있던 때이고, 제련술도 발달했을 때일 테니 그즈음부터 찾으면 된다.

릴리는 적당히 계단을 내려간 뒤, 지하 기록소의 문을 열었다. 오래된 책들의 매캐하고 알싸한 향이 면부를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벽에 횃불을 고정시켜 놓고 촛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베오르토가 알려 준 대로 과학 항목이 적힌 푸른색 띠의 책들을 펴 들었다. 제련과 공예에 대한 지식과 그림들이 빼곡했다.

“검…. 검….”

릴리는 중얼거리며 무기류 항목을 살폈다. 그 책에는 릴리가 원하는 내용이 없었다. 덮어 옆으로 치워놓고 그다음 책을 제 앞으로 끌어와 책장을 넘기며 내용을 훑었다.

도검류의 분류…. 가공법…. 이 책도 아니야. 릴리는 그 책도 덮어 옆으로 치워 놓고 또 다음 책을 펴 들었다.

도검의 활용, 기원. 아. 릴리는 항목을 유심히 살피며 책장을 넘겼다. 활, 창, 도끼, 해머, 온갖 무기의 기원과 최초 무기의 모습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변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릴리는 검 항목을 찾아 훑었다. 최초의 검이라는 그림이 있었다. 마치 창처럼 둥근 원뿔 모양의 검이었다. 릴리는 그 항목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엘버그 최초의 검은 베르구스 라미레스가, 아마네스 여신의 첫 번째 아이의 어금니를 갈아 만든 것으로 ‘아굴’이라 불렀다. 그 검은 첫 제련을 시작한 지 꼭 100년 만에 완성되었으나 서쪽의 불길을 잠재우기 위하여 소실하였다.

“……”

아. 아굴. 역사 항목에서 본 적이 있다. 그것이 검의 이름이었구나. 릴리는 다시 한번 검의 모습을 살폈다. 카르낙의 검은 다소 짙은 빛을 띠고 있다. 전혀 다른 생김새인데. 게다가 불길을 잠재우기 위해 소실되었다니.

일전 역사 항목을 읽으며 엘버그 대륙에 사막이 생겨나면서부터 하나둘, 사람들의 외형과 머리색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적힌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아굴이 소실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엘버그 땅에는 사막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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