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슈욱, 하는 소리와 함께 활이 바람을 갈랐다. 그러고는 얇은 나무판자에 천을 덧대어 만든 연습용 과녁의 정중앙에 인정사정없이 꽂혔다. 벌써 다섯 발째였다.
“…….”
핀은 말을 잃고 멍하게 과녁만 응시했다. 세찬 바람이 부는 날씨였다. 볕은 따듯했으나 눈에 둘러싸인 성전의 훈련장은 장갑을 끼고 있어도 곧 손끝이 시려 둔해질 만큼 추웠다. 그런데도 파니릴리는 흐트러짐 없이 계속 과녁을 맞혔다. 그것도 정중앙에.
“…어떻게….”
시종이 건네준 활을 받아 침착하게 다시 장전하는 파니릴리를 보며 그는 더듬거렸다.
“바람이 불어서요. 조금 빗겨 조준했어요. 몇 번 하다 보니 손에 익는데요?”
“…….”
보통은 활시위를 당기는 것도 힘들어한다. 여성들을 훈련시켜 본 적은 없어서 잘은 모르겠으나, 보통 활시위를 처음 잡는 사람들은 모두 그랬다. 그것도 어느 정도 근육이 생기고, 힘을 기르고 꾸준히 훈련을 해야만 활을 잡는 것, 시위를 당기는 것, 과녁을 맞히는 것이 익숙해진다.
핀은 저도 모르게 파니릴리를 위아래로 살폈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가느다란 뼈와, 약간의 살뿐인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손쉽게 활을 쏘지? 일전에 쏘아 본 적도 없다더니.
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훈련 중이던 병사들이 모두 동작을 멈추고 파니릴리와 과녁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것을 보고 부창부수라 하던가. 어쩌면 파니릴리 역시 제 남편처럼 타고난 전사 체질인지도 몰랐다.
조준을 하고, 활시위를 당기고, 활시위를 떠난 활이 또다시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는 것을 무감한 표정으로 감상하고 난 후, 파니릴리가 온화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핀.”
어쩐지 무서워져, 핀은 바로 대답했다.
“네.”
“다른 것을 알려 줘요.”
“어떤…?”
“활쏘기도 물론 좋지만요. 이건 무예라고 하기엔 좀 뭐랄까, 지나치게 느긋하잖아요. 안 그래요?”
“하지만 전하. 활쏘기는 귀부인에겐 가장 잘 어울리는….”
“난 귀부인이 아니에요.”
릴리는 완강히 그의 말을 부정했다.
“난 그라타 산길을 뛰어다니던 천둥벌거숭이였고 당신 역시, 신사는 아니잖아요?”
그러니 엘버그의 방식으로 재단하지 말아 달라고. 일부러 전통을 답습하여 예를 갖추려는 것은 쓸데없는 소모였다.
“전….”
핀이 곤란한 듯 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긁었다. 그러더니 가까이 다가와 초조하게 속삭였다.
“만약, 제가 전하께 검술을 가르치다 행여, 전하의 몸에 상처라도 나면….”
나면?
“카르낙 발투만이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훈련이잖아요.”
“그 자식은 그런 것 안 따져요. 놈과 싸우고 싶진 않단 말입니다.”
이야기 중 멀리서 사제 하나가 뛰어와 릴리에게 고했다.
“전하, 테이먼 테르조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카르낙과 이 문제에 대해 직접 해결을 봐야겠지 싶어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제를 따라 훈련장을 떠나는 그녀를 보며 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먼은 깨어난 뒤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어 내고 유리창과 나무로 만들어진 덧창부터 열어젖혔다. 매서운 한풍이 커튼을 휘날리며 방안으로 밀어닥쳤다. 테이먼은 그 너머 새하얀 설원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진눈깨비 같은 얼음 알갱이가 떨어졌다. 추적거리고 무거우면서 쌀알처럼 작은 데다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의 세기였다.
“테이먼.”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파니릴리가 방안으로 들어서는 소리도 듣지 못한 듯한 그의 얼굴은 하루 사이에 부쩍 수척해 보였다.
“…파니릴리.”
그는 여전히 꿈결을 헤매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짓을 한 거예요? 자칫 거기서 죽을 수도 있었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당신은 얼어 죽었을 거예요.”
파니릴리는 호된 목소리로 그를 질책했다.
“모두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들도 보지 못한 거야?”
테이먼은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을요?”
“그 빛 말이야.”
“…….”
“그 푸른 빛.”
아직도 그 타령. 그것 때문에 죽을 뻔했으면서. 릴리는 아연한 기색으로 어딘가 핀트가 나가버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어도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사람을 이토록 얼빠지게 만들다니.
“분명 봤는데….”
테이먼은 중얼거렸다.
“분명 두 번이나 봤어. 그 빛.”
분명 보았어. 그 푸른 빛 말이야. 발광하듯 깜빡거리는 그 아름다운 빛.
“내게… 내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던 것 같아.”
“테이먼.”
“분명 뭔가를 내게….”
이곳은 아마네스 여신의 신전이고 기록소는 분명 이 신전의 중심부라고 했으니 그 빛은 아마네스 여신의 것이 분명했다. 뭔가, 분명 뭔가를 전하려는 것이다. 이 내게. 테이먼 테르조에게.
릴리는 그에게 다가가 그가 활짝 연 덧문과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감기 걸려요.”
“파니릴리, 난….”
“조금 더 쉬어야겠어요.”
“…정말 너는 보지 못한 거야?”
“쉬어요….”
릴리는 방으로 나오며 시종에게 일렀다.
“방문에 보초병을 더 세워요. 만일에 대비해서.”
“예, 전하.”
릴리는 곧바로 카르낙이 있는 작은 홀로 향했다. 카르낙이 있는 동안 그곳은 왕을 알현하는 장소이자 그의 회의실로 사용되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즐비한 테이블 위에 커다란 지도를 펼쳐놓고 저 혼자 무언가를 궁리하다가 아내의 등장에 고개를 들었다.
“릴리.”
“얼이 빠져 있어요.”
릴리는 고개를 흔들며 테이먼의 상태를 알렸다. 카르낙은 아내의 손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여전히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던가?”
“네.”
테이먼을 구해 기록소를 나오며 릴리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카르낙에게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다. 테이먼 테르조가 보았다던 그 푸른빛에 대해서. 그리고 마치 빛에 홀린 나방처럼 그 안으로 정신없이 뛰어들었다는 것도. 카르낙은 그것을 상기시키며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정말 그 빛을 못 보았어?”
“네.”
그렇다면 놈이 헛것을 본 게 분명하다. 무언가가 있었다면 파니릴리가 보지 못했을 리는 없을 테니.
“가지고 나온 고서에서 뭐 발견한 것 없어?”
테이먼을 구조해 나오며 파니릴리는 기록소의 가장 아랫방에서 두 권의 고서를 더 챙겨 왔다. 기록소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은 허락되지는 않았으나, 기록소의 안에서 읽는 것만은 허락되어 릴리는 밤새 그곳에 들어앉아 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아직이요. 워낙 오래된 책이라 해석하는 것도 조금 시간이 걸려요.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에나는 사제들이 고서를 읽는 것조차 금지하였다. 그 글에 대한 권한은 오로지 에나인 자신과 여신의 자식인 왕에게만 있다며. 테이먼 테르조를 지하에 데려간 것조차 내심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나마 라미레스의 후손이란 점 때문에 대놓고 문제 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릴리, 이곳에 오래 머물 순 없어.”
이제 캘던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캘던성의 증축과, 엘버그 왕국의 부족한 세수를 베오르토의 즉위로 인해 확보하였으니 남은 것은 한시바삐 성으로 돌아가 그로부터 약속받은 돈으로 엘버그의 어지러운 정세를 안정시키는 것뿐이었다.
“알아요.”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이번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워낙 내용이 어렵고 양이 방대해서… 칼.”
릴리는 혼란스러운 듯 그를 부르고는 제 입술을 잘근 잘근 씹어 댔다. 그녀는 무언가 불안해하고 있었다. 카르낙은 굳은 그녀의 낯빛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테이먼을….”
“…….”
“그를 죽여야 할 것 같아요.”
“…….”
“물론, 지금 그를 죽이면.... 득보다 실이 많다고는 생각해요. 그를 인질로 잡고 있는 이상 우리가 이 판에서 더 우위에 설 수 있겠죠.”
그를 죽여, 괜스레 그를 따르는 이들의 공분을 살 필요는 없다. 게다가 어찌되었든 그 역시 라미레스라는, 알기어스에 못지않은 고귀한 가문. 그에게 자비를 보이면 형편없는 발투만 왕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조금은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릴리는 그리하여 가능하면 오랫동안 테이먼을 살리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비록 그를 죽여야 할지라도 분명 적절한 떄를 기다려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맨 처음, 그가 눈 속에 파묻혀 죽도록 내버려 두었어야 했거나.
그러나 카르낙은 그러지 않았지. 그것이 자신을 위한 일이었음을 릴리는 안다. 테이먼 테르조의 안위를 온전히 그녀의 손에 맡긴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파니릴리의 혈육을 제 손으로 단죄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결국 그것은 파니릴리, 자신에게 주는 깊은 애정과 배려였으리라.
“그가 미쳐 가고 있는 것 같아?”
카르낙이 조심스레 물었다. 릴리는 그제야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딘가 넋이 나간 얼굴로 테이먼은 계속 같은 것만을 물었다. 자신만이 보았다는 그 푸른 빛.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눈빛이 어딘가 섬뜩했다. 카르낙이 그녀의 볼을 매만지며 다시 물었다.
“꼭, 당신의 아버지처럼?”
“…….”
그랬다. 알기어스 왕이 겹쳐졌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친이지만 혹, 그 역시 저런 모습이었을까, 테이먼을 보며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알기어스도 이 곳에 와서 테이먼이 보았다는 그 환영을 보고 미쳐 버린 것은 아닐까.
대장장이 스코크는 분명, 어린 시절 알기어스 왕은 총명하고 선량하였다 했다. 그런 그가 미쳐버린 시점이 혹시, 혹시 이 북쪽의 신전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테이먼을 보며 그런 의문이 들었다. 우습게도.
테이먼에게는 최초의 엘버그인 라미레스의 피가 흐를 뿐, 아마네스 여신에게서 태어난 알기어스 가문의 피와는 전혀 접점이 없는데도 그에게서 알기어스를 본 것이다. 그럼에도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가 꼭 아버지처럼 미쳐 버렸다는 생각을.
“…칼, 만약 나 역시 그 빛을 본다면….”
보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만일 테이먼이 보았다는 그 빛을 저 역시 보았다면, 자신 또한 그처럼 넋이 나가 홀려 버렸을까, 만일 알기어스가 그렇게 미친 것이라면 그의 피를 이어받은 저 역시 제 아비처럼 변할까?
“당신은 보지 못했잖아.”
카르낙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렇다면 테이먼은 어둠 속에서 헛것을 본 것이 틀림없고 다만 신경 쇠약에 걸린 것뿐이야.”
“…….”
“왕 대접을 받던 이가 하루아침에 나락에 떨어져 진창을 구르고 있으니 넋이 나갈 만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