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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82화 (182/231)

182화

테이먼은 눈을 깜빡이며 흐릿하던 제 시야 안의 형상을 분명히 했다. 맞았다. 그녀다. 새하얀 눈 같은 여자.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앞에 있는 것이 그녀라니 꿈이 아니라면, 필시 이것은 운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파니릴리는 손을 비틀어 그에게 잡혔던 손목을 빼냈다. 강한 악력에 피부가 욱신거려 그녀는 다른 손으로 제 손목을 감싸 쥐었다.

“…어떻게….”

테이먼 테르조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릴리는 단호히 답했다.

“카르낙 발투만이 당신을 구했어요.”

“…….”

테이먼 테르조는 여전히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카르낙 발투만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눈에 파묻혀 죽었을 거예요.”

“아.”

하고 그가 낮게 신음했다. 이제야 조금 기억이 나는 듯했다. 그러고는 이불을 들추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당시의 충격이 남아 있어 현기증이 일었다. 테이먼은 제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신음 소리가 절로 났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칼.”

릴리가 방안으로 들어서는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테이먼이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저자가 카르낙 발투만인가. 그림으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잔인해 보인다. 다만 그림 속의 남자가 거친 야만인의 풍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면 실제 눈앞에 마주한 카르낙 발투만 아직 제왕이라기엔 다듬어지지 않은 듯 풋풋한 모습이 남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위압적인 존재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테이먼 테르조.”

카르낙 발투만이 조롱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을 음미해 보는 듯하더니 입꼬리 한쪽을 올려 비소했다,

“얼마나 대단한 사내인가 내심 기대를 했지.”

“…….”

“설마 이렇게 볼품없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 뭐야.”

파니릴리가 불안한 기색으로 카르낙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누구 하나가 당장 칼을 꺼내 달려든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기류가 두 사내 사이에 흘렀다.

“덩치만 크다고 대단하다면, 네놈 대신 곰을 데려다 앉혀 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걸.”

“그만하세요.”

릴리가 그를 만류했다.

“발투만 폐하는 당신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니, 마땅히 예를 갖추세요.”

릴리의 말에 테이먼은 웃었다.

“예의? 자신의 잇속을 위해 죽은 것보다 못한 처지로 만든 자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올리란 말인가?”

제 처지는 인질이나 다름이 없다. 그가 왜 저를 살려 뒀는지는 모르겠다. 저 새까만 머릿속에 분명 여러 가지 꿍꿍이가 있겠지. 무엇이건 저에겐 이득이 될 것이 없다.

“네가,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 따랐을 뿐이야.”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 전투를 치렀다면 분명, 카르낙 발투만의 목은 제 손에 떨어졌을 것이다. 이 지난한 싸움을 그렇게 끝내려 했건만.

“그런 걸 보고 천운이라고 하지. 하늘이 내린 뜻이라면 아마네스 여신이 네게 등을 돌렸단 소리가 아닌가. 테이먼 테르조, 네놈의 부하들도 그것을 깨닫고 진즉 줄행랑을 쳤다지. 자신들이 그렇게 추앙해 마지않던 왕을 버리고서.”

“그렇다면 날 살려 둘 이유가 없으니 죽여. 당장.”

카르낙은 삐뚜름히 웃었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에게 그럴 이유가 있나, 그저 적당히 가지고 놀며 유희나 즐기면 그만인 것을.”

“…….”

보초를 서는 근위병에게 놈을 잘 감시하라는 명령을 뒤로 하고 카르낙은 방에서 나왔다. 파니릴리가 그의 뒤를 쫓았다.

“테이먼 테르조의 부하들이 그를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몰라.”

“네?”

카르낙의 심드렁한 대꾸에 릴리가 되물었다. 그는 씩 웃었다.

“뻔하잖아. 놈의 군대는 전멸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제 살길을 찾아 흩어졌겠지. 아니라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놈들의 왕은 내 손에 있으니, 없어진 그의 사체라도 찾으려고 지금쯤 눈구덩이나 파고 다니다가 설령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더라도 이미 늦은 것 아니겠어?”

“어째서 그를….”

파니릴리는 어째서 그를 살려두었느냐 묻고 싶었다. 테이먼 테르조는 내내, 카르낙 발투만을 위협하던 정적이었다. 그가 살아있는 한, 사람들은 왕위 찬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할 테고 그의 왕좌는 언제나 위험할 것이다. 그것은 테이먼이 인질이 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언제든, 누구든, 테이먼 테르조를 구하겠노라 군대를 모아 전쟁을 일으키려 할 것이다. 잠재적이고 분명한 위협이었다.

“그는 하나 남은 당신의 혈연이지.”

카르낙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릴리는 그의 말을 헤아려 보려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러니, 그의 생사는 당신에게 맡기겠어, 파니릴리.”

“…….”

“그를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또한 어떻게 죽일지, 혹은 어떻게 살릴지 그 모든 것은 당신이 결정하는 거야.”

“…어째서…”

“선물이라고 해 두지.”

카르낙은 씩 웃었다. 그러면서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는 파니릴리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당신이라면 나보다 나은 결정을 내릴 거야.”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오판을 한 내 불찰이겠지.”

“…칼.”

“다만, 너무 선물을 너무 아끼며 가까이 붙어 있지는 말라고. 당신의 남편이 질투에 미쳐 날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

카르낙은 제 할 말을 마치고 다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베오르토와 아직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파니릴리는 그가 떠난 자리에 남아 멍하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걸음을 돌렸다. 대체 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정말 정적의 목숨을 내게 맡기겠다는 건가? 어째서?

릴리는 멀루아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바르시와 고프리를 탈출시킨 이후로 릴리는 그에게 정치적 신용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 일에 대해 칼이 저를 진작 용서했을지라도 말이다. 내가 또 그를 그런 식으로 놓아주면 어쩌려고? 혹은 그에게 틈을 보여 그가 탈출할 구실을 준다면? 두려움이 그녀의 목을 조여 왔다.

릴리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테이먼 테르조에게로 향했다. 침대에 앉아 분을 삭이고 있던 그는 릴리의 등장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파니릴리 알기어스.”

“파니릴리 발투만이에요.”

“…저놈이 기세등등한 것은 다 너란 뒷배 때문이지.”

“…….”

“난 네가 결혼식 날 그를 버릴 거라 생각했어.”

“…….”

“모두들 반대했지. 그래도 난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네가 나 대신 왕좌에 앉아도 놈만 없앨 수 있다면….”

“나를 과소평가하셨네요.”

테이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릴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때에도, 지금도 내가 원하는 것은 발투만 왕가에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뿐이에요.”

말하는 태도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자신의 신념에 대해 그녀는 두려움이나 죄책감 따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작 그깟 벌레 놈에게.

“투로가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나?”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요.”

“저주받은 존재가 왕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도 알아?”

“…….”

“엘버그 왕국은 멸망해. 예전처럼 다시 지옥도로 변해 아무것도 살아 숨 쉴 수 없는 땅이 될 거야.”

“그건 본인의 생각인가요?”

“아니, 모두가 그렇게 생각해. 오직 너만 빼고.”

카르낙 발투만은 꼭 세상이 망하길 바라는 것 같았지. 분명. 처음의 그는 그랬다. 그리고 지금의 그는…. 지금의 그는 달라. 분명 그때와는 다르다.

“놈이 원하는 건 멸망이야, 그렇지?”

“아니에요.”

테이먼은 비소했다. 짐짓 떨리는 파니릴리의 목소리에서 그 진위를 판별할 수 있었다.

“내가 너를 먼저 찾았어야 했다, 파니릴리. 그랬다면 지금 같은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에이가가 왜 놈의 편에 섰는지 알 수 없다. 왜 로레인의 하녀가, 그녀의 충복이 카르낙 발투만의 옆에 붙었을까. 남편에 대한 비틀린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알기어스 왕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을까. 그녀 역시 세상이, 저를 고통스럽게 한 엘버그가 멸망하길 바란 탓이었을까.

“만약 테이먼, 당신이 나를 먼저 발견해서 내가 당신의 곁에 있었다면 나는 진즉 당신을 떠났을 겁니다.”

릴리는 확신했다.

“내가 엘버그에 남기로 한 것은 오로지 카르낙 발투만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에요.”

“파니릴리.”

“어쩌면 당신을 떠나 카르낙 발투만에게로 향했을지도 모르죠.”

“너도 그놈의 짐승 같은 면에 빠진 건가? 다른 멍청한 여인들처럼?”

“그는 선한 사람이에요, 테이먼 테르조.”

릴리의 말에 테이먼은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사실이에요. 카르낙 발투만은 선한 사람이에요. 그런 그를 난폭하게 만든 것은 아마네스라는 신을 믿는 우리 엘버그인들이고요.”

“파니릴리.”

테이먼이 가엽다는 듯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읊었다. 신음에 가까웠다. 너를 어찌하면 좋겠냐는 듯 그는 혀를 찼다. 그러나 릴리는 동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보고 겪어 온 것만을 믿어요. 당신들이 믿는 것을 나는 믿지 않아요. 그러니 내 눈에 비치는 엘버그인이란, 자신들의 부정과 타락을 다른 이를 탓하며 자위하는 한심한 족속들일 뿐이에요. 그러니 세상이 멸망한다면 그것은 투로에 대한 신의 저주가 아니라 타락한 자식들을 위한 어머니의 형벌일 겁니다.”

“돌았군.”

테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투로와 함께 있더니 너 역시 돌아 버린 게 틀림없어.”

“어쩌면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오랜 시간 그와 함께해 오며 많은 것을 겪었으니. 나 역시 그에게 동화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저에게 동화되었거나. 어찌 되었든 지금은 그가 보는 것과 저가 보는 것이 다르지 않을 터였다. 파니릴리 저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카르낙 발투만이 이 엘버그 왕국에서 살아남는 것. 언젠가 이 어리고 서툰 왕이 천수를 다하며 엘버그 왕국에 이름과 족적을 남기는 것. 그 곁에 함께하며 그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돕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것을 위해 귀향의 희망을 버렸다. 그곳으로 돌아가 남은 여생을 평화 속에 누리고 싶다는 욕망보다, 이곳에, 카르낙 발투만의 곁에 남아 그를 돕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은 운명이라고 믿어요.”

카르낙 발투만이 저를 먼저 찾은 것도. 그의 아내가 된 것도, 지금껏 살아남아 이곳에 온 것도 모두.

“그리고 우리에겐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주 많답니다.”

릴리는 방그레 웃었다.

“그것이 당신이 아직 살아있어야 할 첫 번째 이유이지요. 내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을 겁니다, 사촌 오라버니.”

테이먼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어조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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