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말을 달려 반나절, 가파른 언덕 위, 찌를 듯한 위용을 자랑하는 새하얀 건물이 보였다. 사람이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둥근 원형의 건물은 마치 거대한 상아를 깎아 조각한 듯 모든 기둥과 창틀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신이 만들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자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파니릴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곳이 이 엘버그 왕국의 시초라 하였다. 이곳에 파니릴리, 저의 시초가 있었다.
아마네스 여신의 첫 번째 아이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그 사실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릴리는 가슴이 뛰었다. 여전히 그 전설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분별할 수 없지만 분명 이 순간 그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더러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 또 더러는 믿지 않을 수 없는 것들도 모두 이곳에서 시작됐을 터였다.
파니릴리는 카르낙을 쳐다보았다. 이곳에서라면 전부 다 알 수 있을까. 나, 그리고 당신을 둘러싼 비밀들을?
대리석 계단 위로, 그들을 마중 나와 있는 베오르토와 사제들이 보였다. 파니릴리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 말에서 내리려 했다. 그러나 카르낙은 말을 탄 채로 계단을 올랐다. 순간적으로 릴리는 핀을 쳐다보았다. 그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극히 카르낙다운 행동이었다. 어차피 그는 신이나, 사제나, 에나 따위를 존중해 줄 마음은 없었다. 그저 제 말을 잘 따르는 아둔하고 겁 많은 에나를 앉히는 것으로 신마저 제 아래에 깔아 눕힐 생각으로 이곳에 왔으니 예의 따위를 갖출 필요가 없겠지.
핀은 어꺠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 저도 카르낙을 따라 말고삐를 움직여 계단을 올랐다. 하는 수 없이 릴리도 말고삐를 잡았다.
“여기 계세요.”
루이스와 나머지 근위대에게 명령하고 릴리도 핀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베오르토는 성문 앞에 서서, 새까만 군마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몇 걸음 뒤로 주춤 물러섰다. 신의 집 앞에 말을 타고 등장한 이는 아마 카르낙 발투만이 최초일 것이다. 저도 모르게 커다란 그를 올려다보는 입장이 된 베오르토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카르낙의 차가운 눈동자가 그를 향해 내리깔렸다.
“…페… 폐하….”
베오르토가 더듬거렸다. 숱이 많은 회백색의 금발을 가진 노인은 하얗고 깡마른 외형을 하고 있었다. 발로 한 대 툭 차면 그대로 부러질 듯 연약했으며 얼굴빛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겁을 잔뜩 먹은 청백색의 눈동자는 노인의 것답게 혼탁하고 희미한 빛을 띠고 있어 전체적으로 옹졸하고 아둔한 인상을 띠었다.
뒤따라 핀과 파니릴리가 성문 앞에 당도했다. 베오르토는 파니릴리를 보자마자 숨을 들이켜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야말로 아마네스 여신의 현신 같은 여자였다.
“왕… 왕비 전하….”
카르낙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베오르토는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카르낙은 제 아내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우며 말했다.
“대관식은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나?”
지진을 염두하고 하는 말이었다. 하기야 전례에 없던 재난이었다, 건국 초기에 몇 번의 지진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역서에 있는 것은 보았으나 살아생전 그것을 겪은 것은 베오르토 역시 처음이었으니 경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서둘러 대관식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는 게 사제단의 판단입니다.”
에나의 뒤에서 누군가가 나서서 말했다, 카르낙이 그를 보자 사내는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베오르토가 그를 소개했다.
“티옹입니다. 성전의 일곱 사제들 중 한 명입니다.”
“영광입니다. 폐하, 비전하.”
“마을 곳곳이 눈에 파묻혔더군. 복구할 방안은 있나?”
카르낙이 그의 인사를 무시한 채 물었다. 베오르토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 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일 겁니다.”
속편한 이야기군. 카르낙은 비소했다. 그러고는 제 뒤편을 엄지손가락으로 쿡 찔러 가리키며 말했다.
“오다가 사람을 좀 주웠어.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아 유감이지만 살려두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사람이요?”
베오르토가 되물었다. 그가 아무나 데려오진 않았을테고.
“테이먼 테르조.”
“…….”
카르낙의 답에 베오르토는 입을 벌렸다. 테이먼 테르조는 카르낙 발투만의 숙적이 아니던가, 그런 그를 주워 왔다고? 그러고 보니. 분명, 카르낙 발투만을 위해 기수를 보냈다. 그를 신전으로 인도할… 베오르토는 그의 뒤편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신전에서 파견한 기수들이…
“죽었다.”
“…….”
“일단은 좀 씻었으면 하는데. 이야기는 길어질 테고, 나와 내 아내는 지금 몹시도 춥거든.”
“아, 예! 기꺼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티옹.”
“예. 이쪽입니다.”
티옹이 그들을 성문의 안쪽으로 안내했다. 베오르토는 국왕 내외를 먼저 보내고 핀의 명령에 따라 테이먼 테르조를 어깨에 이고 오는 병사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역시, 테이먼 테르조의 실물은 본 적이 없었다. 곱슬거리는 금발이 고드름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호리호리한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고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얬다.
“이미 죽은 것 아닌가요?”
베오르토가 핀의 옆에 서서 물었다. 핀은 초록색 눈동자를 해죽 접었다.
“그럼 안 되죠. 베오르토 님, 그럼 폐하께선 당신이 죽였다 생각하실 텐데요.”
그의 말에 베오르토가 ‘히익’ 하는 소리를 냈다. 질겁을 하며 발을 종종거리는 노인을 보며 핀은 저 혼자 웃었다.
***
성전의 내부는 칼바람이 부는 언덕 위에 자리한 것이라 믿기 힘들만큼 따듯했다. 캘던성조차 바람이 불면 벽의 틈새로 찬 기운이 스며드는데, 이곳은 신기하게도 찬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덕에 릴리는 내내 입고 있던 늑대의 털로 만든 망토와 장갑, 목도리 등을 모두 벗어 버릴 수 있었다. 목욕을 하고, 깨끗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파니릴리는 곧바로 테이먼 테르조의 방을 찾았다.
새하얗고 좁고, 간소한 방 안, 두어 명의 사제가 그를 보살피고 있었고 테이먼은 사제들이 쓰는 좁고 딱딱한 침대 위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릴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새하얗던 얼굴이 조금은 붉은 빛을 띠었다,
“약간의 미열이 있습니다.”
그를 보살피던 사제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아, 그렇군요.”
릴리는 다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얀 얼굴, 오뚝한 콧날, 카르낙 발투만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 그는 로레인 하게너의 핏줄이니. 내 어머니의. 그렇다면 그의 이 얼굴은 내 어머니와 닮아 있을까. 내 어머니도 이렇게 하얗고 깨끗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당신이 내 사촌이란 말이지…?”
또한 내 남편의 왕좌를 차지하려는 숙적이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사촌이며 어머니의 핏줄이고, 또 내 남편의, 그러므로 또한 나의 숙적이라니. 이렇게 하얗고 호리호리한 사내가. 믿어지지가 않았다. 당신은 카르낙 발투만에 비해 너무 작아.
그리고 너무 마르고, 또 너무 어려 보여. 분명 나이는 그가 카르낙에 비해 많을 것이다. 파니릴리 저가 카르낙보다 한 살 많으니, 사촌오라버니인 테이먼 테르조는 그보다 더 많으리라. 하지만 그는 너무 앳되어 보인다. 도저히 연상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생각했을 때, 갑자기 그가 번쩍 눈을 떴다. 물이라도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처럼 히익, 하고 숨을 들이켜며. 반짝, 눈을 뜨자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한가득 드러났다.
그 안에 파니릴리 제 얼굴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 제 모습이 가득했다. 릴리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가 갑작스레 파니릴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턱’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겁에 질린 릴리를 보며 신음하듯 중얼댔다.
“…파니릴리.”
***
베오르토는 테이먼 테르조가 신의 땅에서, 그것도 제 기수들이 있음에도 전쟁을 치르려 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자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는가.
“그래서입니다.”
베오르토는 자신의 서재 창가에 기대어 사색이 되어 말했다.
“그런 짓을, 그런 짓을 벌였으니, 당연히 아마네스 여신님이 노하신 겁니다! 그래서 벌을 주신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 신의 땅에서 감히 그런 짓을!”
그러며 그는 제 가슴을 짚었다. 신을 향해 용서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느라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저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카르낙과 핀은 서로 암묵적인 시선을 주고 받으며 눈을 굴렸다. 글쎄. 신이 정말로 격노했다면… 선대 에나를 제거했을 때부터 노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먼저 이곳에 피를 뿌린 것은 그때부터이니.
핀이 말했다. 자조적인 음성이었다.
“정말로 신이 도운 것인지. 만약 때맞춰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린 어쩌면 이곳에 당도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
군사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떻게 그 많은 병사들을 끌어모은 것인지 아이러니할 지경이었다. 거기에 매복까지 한 채 기다리고 있었으니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핀의 말대로 신이 도왔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놈은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실제로 그랬고. 자신의 편이던 선대 에나가 죽었으니, 다른 자가 에나가 되는 것 역시 본인에겐 악수였을 테니 대관식 전에 둘 다 싹을 자르고 싶었을 거야.”
“신이 자신의 편이라 느꼈으려나?”
“아마도.”
그랬겠지. 신의 저주를 받은 투로와, 신의 선택을 받은 라미레스가의 싸움이라면 당연히 그를 택하리라 맹신했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신이 진실로 존재한다면 그가 택한 것은 투로도, 라미레스도 아니다. 그가 택한 것은 파니릴리 알기어스. 그녀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또한 그녀에 대한 사랑은 투로에 대한 증오보다 강력했겠지. 그렇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베오르토 님!”
누군가 서재로 뛰어 들어왔다. 테이먼 테르조를 보살피라 일러두었던 사제였다.
“테이먼, 테이먼 님이!”
“…….”
카르낙이 앉았던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섰다. 그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테이먼 님이 깨어나셨습니다!”
“…릴리는 어디 있지?”
불현듯 카르낙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방, 방에 계십니다. 테이먼 님과 함께.”
“이런,”
카르낙이 쏜살같이 서재를 벗어나는 것을 보고 핀이 인상을 찌푸렸다.
“괜히 살려 뒀다 후회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