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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80화 (180/231)

180화

테이먼 테르조는 하늘을 보았다. 전열이 뒤틀리고 산위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새하얀 눈에 휩쓸려 바닥으로 추락했다. 사방에서 비명을 질러 댔고 몇몇은 그를 엄호하기 위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테르조 님!”

알레온이 말에서 떨어진 그에게 다가와 어깨를 붙잡아 부축하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

테이먼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제게 닥친 이 상황을 알 수 없어 멍할 뿐이었다. 그는 겁에 질린 눈으로 알레온을 바라보았다. 그 다음 순간은 없었다. 차갑고 무거운 거품 같은 것에 휩쓸려 어둠 속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카르낙은 몸을 일으키며 방패로 무겁게 쌓인 눈 더미를 밀어냈다. 어금니가 절로 물리고 악 소리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릴리, 괜찮아?”

어느새 눈은 허리까지 차올라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시린 감촉에 카르낙은 진저리를 치며 그는 주저앉아 있던 제 아내를 일으켰다. 머리카락과 얼굴에 흩어진 눈가루들을 쓸어 내고 안색을 살피니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괜찮아요.”

“카르낙!”

저편 어딘가에서 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허리까지 차오른 눈더미를 쓸어내며 다가왔다. 온몸에 눈을 뒤집어써 엉망이었다.

“괜찮아? 전하, 괜찮으십니까?”

“네, 저, 전, 괜찮아요.”

카르낙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깔린 몇몇 병사들을 루이스와 나머지 사람들이 손을 모아 눈 더미 속에서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군의 손해는 그것이 다였다. 제대로 맞붙기도 전에 산사태가 일어난 덕이었다, 해일처럼 밀어닥친 산사태 속에서 비켜나 있었으니, 그야말로 하늘이 도왔다 여겨야 할 것이다.

그는 몸을 돌려 적진을 바라보았다. 청록색 깃발은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눈만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펼쳐져 있을 뿐, 그야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 고요해졌다. 기괴했다. 카르낙은 다시 릴리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새가….”

릴리는 호흡을 고르며 말을 이어갔다.

“새들의 모습이 이상했어요.”

“…….”

카르낙은 하늘을 보았다. 몇몇 새들이 무리 지어 하늘을 활주했다. 그것이 다였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핀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전하께서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로서도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땅이 흔들리고 이렇게 많은 눈이 마치 파도처럼 바닥으로 밀어닥치는 게 낯설었다.

오코가 투레질을 하며 다가왔다. 카르낙은 놀란 놈의 콧잔등을 몇 번 쓸어 준 뒤 말에 올랐다.

“이제 어쩌죠?”

핀이 아연한 기색으로 물었다.

“전열을 가다듬고 우회하여 진군하면 돼.”

“네.”

핀은 그의 명령에 몸을 돌려 병사들에게로 향하며 전열을 갖추라 소리쳤다. 칼은 고삐를 잡아당겨 천천히 오코를 앞으로 몰았다. 눈 더미 사이사이로 적군들의 방패 끝이나 투구의 깃털 같은 것이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말이지 단 한순간에 그들이 전멸했다 생각하니 피가 식었다. 그는 조각난 눈더미들을 떨군 산의 끝자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본디 그 모양이었다는 듯 잠잠했다. 그는 생각했다.

녹아내리고 있는 건가. 신의 땅이라는 이 북쪽의 얼음들이 모두 서서히 힘을 잃고 떨어져 나가고 있는 건가. 그는 모래 폭풍과 지난한 가뭄을 떠올렸다. 멀루아의 썩어 들어가던 땅도. 이 모든 것이 따로 떨어져 있다 생각되지 않았다. 유기적인 흐름으로 느껴졌다. 그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자가 왕좌를 차지했다는 대가일까. 사람들의 말처럼. 신의 저주를 받은 투로이기에 이 모든 것은 그를 향한 단죄일까.

오코의 발밑에 깃대가 차였다. 카르낙은 고삐를 당겨 오코를 멈추게 하고 말에서 내렸다. 우드득, 하고 발아래 눈이 마찰하며 뭉치는 소리가 났다. 카르낙은 눈을 쓸어 깃대를 확인하고 그것을 뽑아 들었다. 대가 꺾인 청록색 깃발이 눈이 젖어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폐하!”

멀리서 루이스의 고함이 들렸다,

“위험합니다!”

그러나 카르낙은 듣지 않았다. 보다 못한 루이스가 제 군마를 몰고 낑낑대며 다가왔다. 카르낙이 쌓인 눈더미를 살살, 쓸었다. 황금색의 실 몇 가닥이 마른 잡초처럼 눈더미 속에서 솟았다.

“…….”

카르낙은 그것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테이먼 테르조, 네놈이구나. 놈을 확인해야만 했다. 네놈을.

“칼!”

멀리서 릴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르낙은 걱정스러운 제 아내의 낯빛을 확인하고 나서 무슨 이유에서인가 잠시 그 금빛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테이먼 테르조, 내 아내의 단 하나 남은 혈연.

여기에 두고 가면 네놈은 이대로 죽겠지. 눈 속에 파묻힌 채 하루 정도 지나면 이대로 산송장이 될 것이다. 그 전에 남은 네 부하들이 너를 찾아낸다면? 그때도 과연 네가 살아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다.

게다가 설령 네가 살아난다 하더라도 에나의 명령을 거역했으니 넌 이 북쪽 땅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체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쫓겨날 거야. 대관식을 치르고 베오르토가 정식 에나가 되고 나면 그는 에나의 군대를 움직여 네놈의 씨를 말리겠지. 넌 끝이야 테이먼 테르조. 내가 너를 구해 주지 않는다면.

카르낙은 눈더미를 긁어 내고 테이먼 테르조의 면부를 확인하고는 맥박을 짚어 생사를 확인했다. 맥박은 아직 뛰고 있었다. 카르낙은 눈을 파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폐하!”

“아직 살아 있어.”

루이스가 말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다가왔다. 대체 그가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루이스는 일단 그를 도와 테이먼 테르조를 같이 눈더미 속에서 빼냈다.

“폐하, 대체 무엇을….”

“놈을 데리고 간다.”

“예?”

카르낙은 테이먼 테르조의 축 늘어진 몸을 오코의 위에 얹었다. 루이스는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를 살려서 데려가신단 말씀이세요?”

루이스에 말에 답하지 않고 그는 말에 올랐다. 대체 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루이스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

이베트는 소식을 듣고 테이먼 테르조의 막사로 뛰어 들어왔다. 그곳에는 눈 더미 속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브리다스와 알레온이 병사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건가요!”

이베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브리다스는 뜨거운 찻물로 몸을 녹이며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 눈이….”

눈사태가 일어난 사실은 알고 있다. 지진도 눈사태도 모두 그녀도 함께 겪었다. 다행인 건, 산등성이에서 조각나 떨어진 눈덩이들은 그녀가 머물던 야영지와는 먼 곳에 떨어져 굴렀단 사실이었다. 모두 혼비백산하였지만 곧 지진은 멎었고 모두 그렇게 안도했다. 그것이 전장을 덮쳤다는 사실은 그녀로서는 추론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었다.

“…카르낙은?”

“…….”

“아버지, 그는요? 그 작자는요!”

브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알레온의 시신은 확인했다. 그렇지만….”

멜타가 기력이 다한 브리다스를 대신해 답했다.

“테르조 경의 시신은….”

“…….”

이베트가 몸을 휘청였다. 죽었어? 설마, 설마 테이먼 테르조가. 신이 점지했다는, 아마네스 여신님의 가호를 받았다던 그 금발 사내가, 그 눈부신 외모의 사내가 죽었어? 이렇게 쉽게? 그것도 제 어미의 눈 더미 속에 파묻혀서?

“하하….”

믿을 수 없어 웃음이 났다. 기가 막혔다. 하하하하 하고 이베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침울한 가운데 그녀의 목소리만 히스테릭하게 메아리쳤다.

“어리석은 짓이었어.”

멜타가 이를 갈았다.

“괜한 짓을 한 덕에, 에나의 미움만 샀어. 카르낙 발투만이 만약 살아서 성소에 당도한다면, 그래서 에나의 즉위식이 제대로 치러진다면, 우린 모두 몰살당할 거요.”

“…카르낙 발투만이 살아있다는 보장은 없소.”

“살아 있소! 브리다스 경! 놈들의 말발굽을 보았지 않나! 그들은, 그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어! 오로지 우리만이! 우리만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어! 우리 군은 전멸했네! 남은 자들이라곤 모두 부녀자와 병든 자들, 그리고 아이들뿐이야!”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돈이 있어요.”

이베트가 눈을 번뜩이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직 브리다스 가문엔 천문학적인 돈이 남아 있죠. 그리고 바르시가 있어요.”

이베트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요. 여기서 빠져나가서 용병을 모집하면 돼요. 그래서 우리의 땅을 되찾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요.”

“무엇을 시작한단 말이야?”

멜타가 물었다. 이베트가 눈을 빛냈다.

“테이먼 테르조는 죽었잖아요.”

“…….”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바르시가 남았어요.”

멜타는 웃었다. 헛웃음을 켰다. 세상에 이처럼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 이야기가 또 있을까.

“정신이 나갔군, 이베트. 바르시는 귀엽고 착한 아이지. 그러나 그 아이는 테이먼 테르조를 대신할 수 없어. 그 아이에게 어떤 적통성이 있단 말이지?”

“테이먼 테르조가 없는 이상, 더는 왕가의 핏줄은 남아있지 않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진 거겠지! 이제 남은 핏줄은 카르낙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는 파니릴리 알기어스 하나뿐이니까!”

멜타는 참을 수 없어 이베트를 바라보며 비난을 퍼부었다.

“애초에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밀어붙인 건 너다, 이베트! 네 말도 안 되는 주장 덕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어! 네 아둔한 계획이 모든 것을 망쳤어! 테이먼 테르조 경의 시신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네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자고? 너처럼 아둔한 어미를 둔 그런 놈을,”

노인의 말은 거기서 멈추었다. 이베트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단검으로 노인의 목을 꿰뚫었다. 푹, 하고 살이 찢기고 비어지는 소리, ‘억’ 하고 노인의 혀가 말리는 소리, 그 다음 순간에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멜타는, 테이먼 테르조 진영의 가장 존경받던 원로는 그렇게 앞으로 꼬꾸라져 바닥에서 피를 흘렸다. 뿜어져 나온 피가 이베트의 면부와 가슴팍을 적셨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단도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젠, 우리 바르시가 왕이에요. 그렇죠, 아버지?”

이베트가 광기에 찬 눈을 빛내며 브리다스에게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허한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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