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당신은 코르넬리오지, 이베트. 브리다스가 아니라. 가문의 장자인 아들을 대신한 코르넬리오 가문의 가주가 된.”
“…또한… 여전히 브리다스 가문의 여식임에는 변함이 없지요.”
이베트가 주춤거리자 마침내 테이먼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달구어졌던 온도가 한껏 잦아 든 직후였다.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요, 이베트.”
이베트가 수줍게 바닥으로 향했던 시선을 들었다. 빨려 들어갈 듯. 테이먼의 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정신을 혼미하게 함과 동시에 아득하여 두렵게도 만들었다. 왜 이토록 맑은 빛이 혼탁해 보이는지 그녀로선 그의 안광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전에, 어머니지.”
“…….”
“지금은 그것이 당신이 해야 할 일의 전부요, 코르넬리오 부인.”
그러니 허튼 수작은 부리지 말라는 말이다. 애초에 그런 쉽고 지저분한 것에 못이기는 척 넘어갈 만큼 쉬운 사내도 아니니.
테이먼은 이베트를 피해 막사를 빠져나오자 입구를 서성이는 그녀의 장자가 보였다.
“바르시.”
테이먼이 먼저 아는 체를 하자 아이는 쪼르르 달려와 그의 앞에 섰다. 아이는 카르낙 발투만의 발아래에서 고난을 겪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맑은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테르조 님, 할아버지께 들었어요. 발투만 왕과, 그와 전쟁을 하는 건가요?”
테이먼은 아이의 작은 머리통을 손으로 부비적거렸다. 솜털 같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길 아래 나풀거리며 헝클어졌다.
“어떠십니까, 코르넬리오 경? 전쟁에 참가할 각오는 되어 계시는지요?”
그는 장난스럽게 물었고 바르시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잘 모르겠어요, 테르조 님. 하지만… 하지만….”
아이는 머뭇거리다가 곧 용기를 내어 말했다.
“파니릴리 왕비님은 살려주실 거죠?”
바르시는 벌써부터 테이먼 테르조가 발투만을 이길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 편이 진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참으로 아이다운 발상이었다.
“그녀가 살았으면 좋겠니?”
그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내내 저에게 정말로 잘해 주셨는걸요. 또… 절 이곳으로 보내 주셨고요. 또… 그분은… 그분은 정말 천사 같으세요. 아마네스 여신님처럼 아름다우세요. 전 그분이 우리 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편이 되어서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눈처럼 새하얗고 얼음의 결정처럼 눈이 부신 여인이라고. 또한 아마네스 여신처럼 자애롭고 선하며 누구보다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여인이라고 말이다.
“그녀를 좋아하나 보다, 바르시.”
그러자 바르시는 볼을 붉히며 헤헤 웃었다. 테이먼은 그 나이 때 자신을 떠올렸다. 그는 열 살 무렵, 아버지가 붙여 준 음악 가정교사를 짝사랑했다. 하얀 피부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예쁜 얼굴만큼이나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늘 그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곤 했었다. 지극히 순수하고 이상적인 첫사랑이었다. 테이먼은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부러 위압적인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넌 나와 결투를 해야겠구나. 이제부터 네가 나의 연적이니.”
파니릴리 알기어스의 생사 여부를 확인 한 순간부터 테이먼 테르조는 그녀 이외에 다른 이를 마음에 담아 본 적이 없었다. 제 아비를 닮았다면 필시 엘버그에서 제일 가는 미녀임에는 틀림이 없을테고, 그녀의 성격이나 타고난 핏줄 역시 나무랄 곳이 없었다. 자신에게 걸맞는 여인이라 함은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지 않겠는가.
***
에나의 구역은 따로 경계가 없었다. 신의 땅은 정확히 눈이 덮이기 시작하는 지점부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전진하여도 도저히 땅을 덮은 눈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저 멀리 설산이 모습을 드러냈건만.
“빌어먹을, 대체 얼마나 더 가야 북쪽에 당도하는 거지?”
루이스가 말고삐를 바짝 쥐고 욕설을 내뱉었다. 바닥은 온통 진흙탕이라 발이 푹푹 빠졌다. 부러 시간을 들여 정성껏 손 보아 둔 말발굽이 벌써 엉망이 되어 버렸으리라.
핀이 고삐를 당겨 카르낙의 옆으로 붙었다.
“얼음이 전부 녹았어. 에나의 땅이 반 토막 났겠군.”
“그렇다면 조만간 법령을 재정하려 들 테지, 이대로 두다간 땅을 전부 잃게 생겼으니.”
가뭄과 모래폭풍의 탓일 것이다. 직접적인 피해는 빗겨 갔다 해도 이곳 역시 엘버그의 땅,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얼음 값은 더 천정부지로 치솟겠어. 하긴, 근래에 치솟지 않은 물건이 있겠냐마는 말이야.”
드문드문 빈 집들이 보였다. 어느 것은 아주 오래되어 보였고 어느 것들은 그다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곳이나 뭉근하게 녹아내린 진흙 더미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릴리는 리오에서 출발할 때쯤 오르티스에게서 선물받은 새하얀 백마를 타고 있었다. 승마를 제대로 배우지 않아 어색했지만 여유로운 행군 덕에 그녀는 서서히 말고삐를 잡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요.”
릴리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이상한 냄새?”
“네. 무슨 냄새인지 모르겠는데… 이상한 냄새예요.”
카르낙과 핀이 코를 킁킁거려보았다. 그러나 카르낙은 릴리가 말한 이상한 냄새는 전혀 맡을 수 없었다. 핀도 마찬가지인지 카르낙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아. 저기, 보이네요.”
루이스가 정면 지평선 너머를 가르켰다. 하얀 깃발을 든 기수 몇이 희미하게 보였다. 에나의 사병들인 것이다.
드디어. 에나의 땅에 도착했구나. 세상의 불길을 잠재우고 잠들었다는 아마네스 여신의 첫 번째 아이가 잠든 곳. 릴리는 이곳에 자신의 본질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전에 보관되어 있는 엘버그 왕국에 대한 신비한 서적과 증거들을 제 두 눈으로 보고 읽고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여기서라면 아마네스 여신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을 테고 그러면, 하얀 늑대와 교감했던 그 신비한 경험과 어쩌면 카르낙 발투만이 가진 설명할 수 없는 능력 또한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으리라.
푸드득, 하고 하늘 위로 새가 날았다. 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산봉우리들 사이로 새들이 요란하게 날개짓을 했다. 뭐지? 왜 이렇게 불안해 보이지?
“…멈춰요, 칼.”
릴리는 하늘 위를 빙빙도는 새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내 여유롭던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릴리?”
갑작스러운 아내의 변화에 카르낙은 당황하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불안했다.
“…뭔가가….”
분명 뭔가가 있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분명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소름이 끼칠 만큼 두려운 것이었다. 오고 있어. 무언가가 지금 일어나고 있어.
“폐하!”
어디선가 카르낙을 불렀다. 새하얀 깃발을 든 기수들 뒤로 새까맣게 모여든 군사들이 보였다. 테이먼 테르조의 상징인 청록색 깃발과 은색 판금갑옷으로 중무장한 병사들.
“…이런 미친 새끼.”
핀이 저도 모르게 욕설을 씹어뱉었다. 에나의 사병들을 인질로 잡고 에나의 땅에서 정말 전쟁을 벌이겠다고? 필시 놈은 에나 역시 대관식을 치르기 전에 몰아내겠다는 심보이리라.
“멈추라더니. 과연. 당신이 옳았군, 릴리.”
카르낙은 제 검집에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아니. 아니야. 릴리는 여전히 불안한 눈동자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예요. 칼. 이것은… 그러니까 이것은.
“전열을 갖춰!”
핀이 검신에서 칼을 뽑으며 외쳤다. 뿌우우. 기수들이 호각을 불었다.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금속이 스르릉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칼!”
릴리가 말의 고삐를 뒤로 바짝 당기며 소리쳤다. 하늘 위로 더 많은 새들이 원을 그리며 돌았다. 위험해. 위험하다.
“릴리, 고삐를 너무 당기지 마.”
그녀의 백마가 투레질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저러다가 앞발이라도 들어 올리면 분명 그녀는 낙마하리라.
“흩어져선 안 돼! 모두 방패를 들고 전열을 갖춰! 닥치는 대로 베고 찔러!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라! 그래야만 승리다!”
“왕비를 엄호해!”
카르낙이 다급히 외쳤다. 루이스가 방패와 창을 든 보병들을 그녀의 주위를 감싸도록 배치시켰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릴리는 눈앞에 닥친 위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보였다.
와아아, 하고 지평선 너머 함성이 들렸다. 곧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이쪽으로 전력질주해 오리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산 사이에 미리 매복해 있던 테이먼 테르조의 병사들이 보였다.
“빌어먹을!”
카르낙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지껄였다. 잘못된 결정이었나. 평판이 어찌되든, 이성적인 결론을 내리는 대신 예전처럼 칼부터 들었어야 옳았나. 영주들에게 군력을 동원해 모조리 죽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었다.
“칼!”
릴리가 다시 그의 이름을 외쳤다. 도망쳐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도망칠 곳이 없다. 릴리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보았다.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이 상황에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이….
엎드려요, 칼. 차라리… 바닥에…
쿠구구구구구구궁, 하는 소리가 나며 지축이 흔들렸다. 처음엔 그 진동이 미약하여 테이먼 테르조의 군인들이 내는 발소리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카르낙은 주위를 돌아보며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지축이 점점 더 심하게 진동했다.
릴리, 카르낙은 퍼뜩 제 아내를 쳐다보았다. 릴리, 당신….
그 이후엔, 말그대로 사방이 요동쳤다. 군마들이 일제히 앞발을 들며 히스테릭하게 울었다. 오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르낙은 간신히 고삐를 잡고 버텼으나 놈은 진정할 줄을 몰랐다. 바닥은 점점 더 크게 흔들렸다. 병사들이 혼비백산하며 몸을 숙였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창과 방패를 놓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핀과 루이스는 말에서 떨어졌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방으로 지축이 흔들려 쉽지가 않았다.
릴리 역시 백마에서 떨어졌다. 카르낙은 그녀에게 향하기 위해 오코의 고삐를 당겼다.
“릴리!”
병사 하나가 방패로 떨어진 릴리의 몸 위를 엄호해 주었다. 카르낙은 다시 주의를 살폈다. 멀리 산등성이에서 새하얀 연기들이 피어올랐다. 산에서도. 땅에서도, 꼭 뜨거운 물이 증류하는 듯, 아니, 꼭 어딘가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 듯….
“…….”
카르낙은 멍하게 그 연기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이런, 염병할.
“퇴각!”
그는 소리쳤다. 산등성이마다 눈덩어리들이 조각나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산사태였다. 곧 저 해일은 땅위로 고일 것이다. 벌써. 산새에 숨어 있던 테이먼의 병사들이 눈덩어리들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해일에 깔려 꼼짝없이 죽을 터였다.
카르낙은 냉큼 오코에게서 내렸다. 그러자 오코는 전속력으로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마 늘 그렇듯 살길을 찾아 도망쳤다 일이 진정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에게 돌아오리라. 카르낙은 바닥에 떨어진 방패 하나를 머리에 쓰고 릴리에게로 향했다.
처음 겪는 재앙에 모두가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엘버그 왕국에 닥친, 첫 번째 지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