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흡사 사람의 비명 소리와도 비슷한 호각 소리였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다는 그 호각 소리는 검은 깃발과 마찬가지로 카르낙 발투만과, 그의 근위대를 상징했다.
오르티스는 그 소름 끼치는 소리를 듣고 재빠르게 도시 성문 앞으로 뛰어갔다. 어느새 무장한 군인들이 그 앞에 줄을 맞춰 도열해 있었다.
맨 앞에 핀이 보였고 휘황찬란한 마차를 둘러싼 무리들이 보였다. 오르티스는 캘던에서 한 번 본 왕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더 짧아지고 험한 여정에 조금 더 야위었지만 강렬한 라일락색 눈동자의 그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리고 왕의 단단한 등 뒤에 앉아 있는 소담한 체구의 하얗고 사랑스러운 왕비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머리에 쓴 것을 벗어 가슴팍에 대고 허리를 숙이며 왕에 대한 예의를 표했다. 핀과 루이스 역시 왕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그를 맞이했다.
“국왕 폐하, 비전하.”
“핀, 루이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
카르낙의 대답에 루이스는 눈을 굴리며 숨을 푹 내쉬었다. 멀쩡한 목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좀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폐하. 설마 리오까지 기어서 오시나 했습죠.”
루이스의 말에 카르낙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야윈 것에 비해 지친 기색은 없었다. 참으로 그다웠다.
“네놈이었으면 기어서도 도착 못 했을 거다, 루이스.”
“머리카락은 어쩌셨습니까?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핀이 그의 행색에 골몰하다가 물었다. 터번을 쓴 릴리의 머리 모양이 어떤지 아직 보지 못해 그의 행색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릴리가 터번을 풀기라도 하는 날에는 제 머리카락 따윈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은 짧더라도 머리카락이 있지 않은가.
“사연이 아주 길어.”
그때, 오르티스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으시겠군요. 리오에 잘 오셨습니다. 국왕 폐하, 비 전하.”
그는 고개를 숙여 왕에게 예를 갖추었다. 카르낙은 그자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인사를 할 만한 사람이라면 리오에는 딱 한 명뿐이었다.
“오르티스.”
“누추하오나, 두 분을 저의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곳에서 못다 한 회포를 푸시지요.”
“먼저 광장에 네 전임자의 시체가 전시되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아무리 길고 험한 여정이었다 한들 카르낙 발투만은 카르낙 발투만이었다. 오르티스는 새삼 그가 어떤 남자였는지 잊지 않은 자신에게 감사했다. 다행히 전임 길드장이었던 반스 이드위너의 머리는 아직 광장에 효수되어 있었다. 말라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채로 말이다.
“그럼… 비전하께서는….”
“함께 갈 거다. 그녀도 반스 이드위너의 결말을 볼 자격이 있으니.”
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콧김을 뿜는 오코의 콧등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말했다.
“비 전하께서는 먼저 오르티스의 집으로 돌아가 쉬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정숙한 여인이 보기에 그리 좋은 모양새는 아니잖아요.”
카르낙은 핀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릴리라면. 그러나 지금의 파니릴리에게? 지금 그녀에게 과연 반스의 시체가 보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일까. 카르낙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매짐.”
카르낙의 부름에 매짐이 엉거주춤 말고삐를 당겨 곁으로 다가왔다. 루이스와 핀은 처음 보는 웬 애송이의 등장에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왕이 말했다.
“앞으로 네놈들이 훈련시켜야 할 애송이다.”
“…….”
루이스와 핀은 매짐을 위아래로 훑었다. 뭐야? 이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이 생긴 놈은?
“반스의 시체를 보고 기겁을 할 놈은 이놈 같으니 데려가 먹을 곳과 잘 곳을 마련해 줘.”
“아니요, 폐하. 저는… 절대로…”
매짐은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카르낙이 말 고삐를 돌렸다. 오르티스는 리오의 사병이 준비해 준 말등에 조심스레 올랐다. 본디 짐승의 등에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왕의 명령이니 직접 말을 끌고 그를 광장까지 안내해야만 했다.
“더하여 부나비의 창기와 여종들에게 넉넉한 사례비를 줘. 그들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네. 그러겠습니다.”
핀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안내해라, 오르티스.”
왕이 말고삐를 당기며 명령했다. 오르티스는 그의 앞에서 조심스레 말허리를 찼다. 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광장으로 향했다. 핀 역시, 루이스의 가슴팍을 툭툭 치고는 자신의 말에 올랐다.
“신병은 네가 담당해라.”
“예? 아니, 저.”
“그럼 이따 공관에서 보지.”
“아니, 저…”
핀은 쌩하니 그를 지나 왕의 대열에 합류했고 루이스는 거절의 의사 한 마디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덩그러니 남았다. 젠장, 왜 하필 나야! 나도 오르티스의 집에 가서 진탕 술이나 마셔 보고 싶다고! 카르낙 발투만의 무용담도 좀 듣고! 할 말이 아주 많단 말이야!
“…….”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죽도 밥도 안 되는 웬 애송이 하나를 데리고 공관으로 가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주어야만 한다. 놈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루이스는 놈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매짐은 눈치를 살피다가 주섬주섬 말에서 내렸다.
어느새 사람들은 부나비의 창기들을 보기 위해 한쪽으로 쏠렸고 매짐이 남은 자리에는 오로지 루이스만이 존재했다. 매짐은 아버지의 곁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청년이었다. 제아무리 성공에 대한 갈망과 욕심이 크다 하더라도 생전 처음 보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남자 앞에서 겁을 집어먹는 것은 당연했다.
“병아리.”
병아리? 주변에 병아리가 있나 두리번두리번 살피다가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그는 확신이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예?”
맞나? 나를 부른 것이? 저도 모르게 쳐다봤다가 루이스의 눈빛에서 살의를 느끼고 그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분명, 저를 부른 것이 맞다.
“뭍에 사는 짐승 중 가장 멍청한 게 뭔지 아나?”
“…아니….”
“조류다.”
대답도 하기 전에 루이스가 답했다.
“조류 중에서도 가장 멍청한 게 뭔지 아나?”
“…혹시… 다….”
“닭이다.”
이럴 거면 왜 묻나. 묻지를 말지. 대답할 틈도 없이 본인이 다 말할 거면서.
“그리고 너 같은 놈은 닭보다도 못한 존재. 즉, 병아리 같은 놈이라 이거다.”
근거는 있는 이야기야…? 매짐은 당최 이 사내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루이스? 맞나? 이름이 루이스랬나? 왕과 막역한 사이 같은데. 바로 옆에 있던 핀이란 사내와는 결이 달랐다. 그 빨간 머리의 사내는 좀 날렵하고 차분한 것이 적어도 말은 통하게 생겼는데 이 사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병아리는 뇌라도 있지. 그쪽은 머릿속에도 든 거라곤 근육뿐인 거 같은데 말이야. 남 말할 처지야…? 그러나 매짐은 터져 나오는 말을 꾹 참았다. 입을 여는 순간 황천길 행이란 것은 너무도 자명했으므로.
“그러므로 너는 인간은커녕, 닭보다도 못한 존재다.”
“…….”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하지 마라.”
“…….”
“알겠나?”
“예.”
매짐이 대답하자 루이스가 발을 쾅 굴렀다. 흠칫 놀라 그는 더 큰 소리로 답했다,
“예, 네! 네! 알겠습니다!”
“삐약.”
응?
“…예?”
뭐?
“앞으로 모든 말에 대답은 삐약이야. 애송아!”
“…….”
…예?
“네놈이 사람 구실을 할 때까지 넌 절대 사람의 언어를 쓸 수 없다. 알겠어? 그러니 따로 명령이 있기 전까지 네놈의 대답은 전부 삐약으로 통일할 거다 알겠어!?”
“…삐…”
대답은 알고 있으나 선뜻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알겠어?”
루이스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눈을 부라렸다. 서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왜 집을 떠나왔다. 그깟 기사가 뭐라고. 그깟 칼 따위 휘두르는 것이 뭐라고. 뭐 하자고 그 먼 길을 떠나 여기까지.
“알겠냐고!”
루이스의 성화에 이기지 못해 매짐은 큰 소리로 답했다
“삐, 삐약!”
아흐흑….
***
카르낙은 광장에 효수된 반스 이드위너의 시체를 살펴보고서야 오르티스의 집으로 향했다. 반스의 시체는 카르낙의 명령으로 그가 광장을 떠난 뒤 곧장 그곳에서 치워졌다. 사람들은 왕에 대한 배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진저리칠 만큼 똑똑하게 지켜보았으며 그러기에 더욱더 놈의 시체가 사라지는 것에 안도했다.
오르티스는 캘던에 다녀간 후부터 제집을 단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분명 리오에 들릴 것이라 확신하였고 그때 왕을 100퍼센트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영영 도시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마음이 조급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왕을 맞이할 귀빈실이었다. 가구며, 침구며 아주 사소한 장식과 액세서리까지 세세하게 살펴 최고급품으로 꾸몄다.
혹여나 테이먼 테르조를 떠올릴 만한 푸른색과 초록색은 그 방에서 모두 치우고 발투만 왕가를 상징하는 검은 빛과 그의 눈동자를 닮은 바이올렛 그리고 왕비를 보며 연상시킬 수 있는 하얗고 투명한 것들로만 채워 넣었다. 또한 아마네스 여신에 대한 상징 역시 모두 치웠다. 혹여 디셋 사제의 반역을 왕이 되새겨 떠올릴까 두려운 까닭이었다.
카르낙 발투만과 파니릴리는 그렇게, 오르티스가 오래전부터 국왕 부부만을 위해 공들여 가꾸어 온 방 안에 들어섰다. 최고급 상아로 만든 잔에 시원한 얼음부터 채워 넣어 오르티스는 그것을 국왕 부부에게 건넸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네.”
카르낙은 얼음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캘던성을 떠나온 지가 이리도 오래되었던가. 한때는 안줏거리처럼 씹어 먹던 것인데 새삼 그 모양이나 촉감이 처음 보는 것처럼 생경하였다. 또한 이제 정말로 신전이 있는 북쪽 땅에 가까워졌다는 뜻인 것 같아 감격스럽기도 했다.
“두 분을 위해 깨끗한 목욕물과 새 옷을 챙겨 두었습니다. 준비를 마치시고 문밖의 시종을 부르시면 제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공손히 말하며 오르티스는 파니릴리의 행색을 살폈다. 캘던에서의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환하게 웃을 때면 정말이지 눈이 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파니릴리가 부나지의 싸구려 시동의 옷과 깃털이 달린 요란한 터번을 두르고 있는 것이 불편했다. 또 그때에 비해 눈에 띄게 마르고 수척해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이지 상냥하고 아름다운 왕비님이셨는데.
“왕비 전하께서 맛있게 드셨던 석양의 열매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러자 파니릴리가 방긋 웃었다. 비록 행색은 초라할지라도 여전히 그 미소만은 눈이 부셨다.
“고마워요, 오르티스. 정말 친절하시네요.”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쉬십시오, 비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