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73화 (173/231)

173화

그런 사람의 농담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나. 울든지 화를 내든지 어쨌든 반응을 하게 되어 있고, 그러다가 종국엔 울며 끝나게 될 것이다. 그걸 아니까 더 저러시는 거겠지. 정말 성미 한번 잔인하다.

릴리는 익숙하게 카르낙을 따라 오코에 올랐고, 매짐도 자신의 갈색 말에 올라타 카르낙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제 새로운 말에 이름을 지어 주시죠.”

부나비의 감시꾼에게 새롭게 받게 된 갈색 말을 카르낙은 한번 쓱 훑어보더니 무심히 뱉었다.

“누렁이.”

“아니….”

아니, 근데 진짜, 저 양반이….

마침 로리아나가 마차에 올랐고 선두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출발한다!”

카르낙이 가볍게 발로 오코의 가슴을 쳤다.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를 내며 오코가 먼저 앞으로 향했고, 매짐은 오코의 꼬랑지를 보며 욕설을 삼켰다.

***

핀은 오르티스가 제공한 길드의 공관에 병사들을 주둔시켰다. 해안가에 인접해 있는 공관은 크고 넓었으므로 캘던에서 데려온 왕의 정예병들이 머물기엔 적당한 곳이었다. 자유롭고 활발하던 도시는 캘던의 근위대가 오며 긴장감에 휩싸였다.

무장을 한 근위대의 규모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전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전쟁으로 다시 초토화될까, 하루하루 불안에 휩싸여 살아갔다.

그것은 오르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시의 상인들은 왕의 근위대가 하루빨리 도시를 떠나길 소망하고 있었으나 그들에겐 내세울 명분이 없었다. 이미 리오는 한 차례 캘던을 배신하여 역모를 꾸민 직후였다. 지금 그들을 내쫓는 것은 역으로 이곳에서 전쟁을 일으켜도 된다는 빌미를 제공할 뿐이었다.

오르티스는 초조함을 숨기고 리오의 성벽으로 향했다. 근위대장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왕의 근위대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데 벌써 길드 반년 치의 예산을 허비했고, 대장인 핀에게 가져다 바치는 술이며, 값비싼 과일이며, 음식은 모두 길드 개개인이 헌납하여 충당했다. 오늘 그에게 가져갈 것은 오늘 아침 바다에서 막 채취한 싱싱한 굴과 진귀한 와인이었다.

“대장님.”

오르티스가 숨을 헐떡이며 성벽 위에 서 있는 그를 불렀다. 계단을 오르느라 이미 체력을 소진할 대로 소진한 모양이었다.

“오르티스.”

핀이 성벽 너머 먼 곳을 바라보다 그를 맞이했다.

“오늘은 싱싱한 굴과 고급 와인을 가지고 왔습니다.”

오르티스의 뒤를 따라온 몸종이 간이 테이블 위에 굴을 수북이 쌓아 놓은 은쟁반과 은잔을 내려놓았다.

“우린 지금 유람을 온 것이 아니오, 오르티스.”

“그건 저도 압니다만, 상인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오르티스는 뒷말을 흐렸다, 무엇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 차마 제 입으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핀의 얼굴은 돌처럼 딱딱했다. 평소 그는 이렇게 무섭고 고압적인 자가 아니었다.

왕의 옆에 있으면 오히려 그는 능글능글하고 여유로운 데다가 흰소리로 사람들을 웃기는 여우 같은 사내였다. 가끔은 체통 없다 여겨질 때도 있었다. 비천한 왕 아래 경박스러운 근위대장이라며 사람들의 안줏거리로 씹히기도 했다. 한때, 이국의 용병 대장이라 했었지. 제 수하들을 거느리고 피 튀기며 전장을 거닐던.

그 믿기지 않던 과거가 이제는 믿겼다. 농담과 여유를 걷어 낸 이후의 얼굴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혈한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폐하가 아니었다면 당신들은 지금 같은 자유를 누리지 못했어. 그러니 천금 같은 생명을 살려 부를 누리게 해 준 보답은 해야지.”

“하여, 하여 모두가… 모두가 정성을 다해 예의를 갖추고 귀히 대접해 드리고 싶은 것뿐이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도착하신다면 우린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을 떠날 거요. 만일 그 전에 테이먼 테르조의 군사가 이곳에 먼저 도착한다면, 차라리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할 거야.”

하지만 당신네들이 없다면 테이먼 테르조가 리오를 노릴 일은 없겠지. 오르티스는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미소 지었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대장님.”

잔에 와인을 한 잔 따라 권한 후 오르티스는 조용히 성벽에서 내려갔다. 핀은 미간을 찌푸린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

조용히 이를 지켜보던 루이스가 한 발자국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저러다 테이먼 테르조 쪽에 붙으면 어떡합니까?”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 들어가는 거지.”

애초에 테이먼 테르조는 기존의 왕권을 되찾으려는 자들의 구심점이 아니던가. 테르조가 왕위를 쟁취하게 되면 리오는 다시 왕의 권력에 묶이게 된다.

“모르죠. 저들이 제 편이 되어 주는 대가로 테이먼 테르조가 리오의 자유를 보장해 줄 수도 있잖습니까.”

“글쎄, 저들에게 자유를 준 왕을 이미 한 번 배신했던 자들과의 약속을 놈들이 지킬까? 나라면 절대로 안 해. 오히려 더 강력하게 통제하겠지.”

자유 도시는 그 존재 자체로 늘 위협이 될 테니 말이다.

왕과 왕비가 행방불명된 지 벌써 석 달이었다. 캘던으로 돌아가 군사를 정비해 리오로 향할 동안 그는 카르낙과 릴리를 찾기 위해 사람들을 풀었다. 마음 같아선 병사들을 풀어 엘버그의 곳곳을 이 잡듯이 뒤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테이먼 테르조의 귀에 왕 내외가 습격으로 행방불명되었다는 이야기가 흘러 들어가게 된다면 놈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캘던으로 진격해 왕위를 차지하려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의 병사들에게 카르낙 발투만은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러니 카르낙 없이 전쟁이라도 시작된다면 병사들은 왕의 부재를 이겨 내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대로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왕좌를 빼앗길 확률이 컸다.

그러니 은밀해야 했다. 카르낙과 릴리를 찾는 일은 최대한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했다. 로리아나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녀라면 신뢰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어디로 움직여도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녀는 기꺼이 핀의 도움에 응답하였다. 자신뿐 아니라 부나비의 창녀들을 모조리 풀어 각 지방으로 흩어지게 하여 유랑을 가장해 왕을 찾게 한 것이다, 엘버그에서 로리아나의 부나비는 유명하였으므로 어느 지역에 가도 환영받을 수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돈도 넉넉히 벌 수 있을 테니 분명 그녀로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으리라.

“카르낙이 돌아와야 해.”

핀이 혼자 중얼거렸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반드시 그부터 돌아와야 했다. 그가 돌아와야만 이 불안한 나날들이 잠잠해지고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집중할 수 있으리라.

“돌아올 거야. 곧 반드시 돌아올 거야.”

덧붙여 중얼거리는 것은 단언이라기보다 주문이나 기도에 더 가까웠다. 그가 돌아오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것은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카르낙은 절대 어떠한 상황에서도 죽지 않아. 마치 불사신 같은 놈이라구. 하지만 만일의 경우, 만에 하나….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만약 죽었다면 말입니다.”

카르낙 발투만이 제 목숨처럼 귀히 여기는 그 여자가 죽기라도 했을 경우. 그 경우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카르낙이 릴리를 잃은 채 돌아오게 된다면 과연 그가 전과 같은 왕일 수 있을까? 카르낙이 죽었으리라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러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순 있을 것 같았다. 만일 그가 제 아내를 잃는다면 말이다.

“…….”

핀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것 역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파니릴리의 부재가 카르낙을 망가뜨린다는 가정은 핀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공포였다.

“어차피 카르낙은 파니릴리를 그라타로 보내려 했어.”

회피하려는 듯한 핀의 말에 루이스가 대꾸했다.

“그건 마누라가 혹시 죽을까 봐 그랬죠.”

“신의 아이라며. 신의 가호가 그녀와 함께했겠지.”

루이스는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왕의 근위대에 그딴 것을 믿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신의 아이니, 무슨 신의 사제니, 마법이니 권능이니, 기적이니.

핀은 파니릴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루이스는 달랐다. 때론 성가시고 때론 정말 곤란하고 때론 매우 얄미운 존재였지만 그녀가 웃으며 조곤조곤 자신을 엿 먹이는 방식을 루이스는 좋아했다. 또 그녀의 명령은 그를 분명 난감하게 했어도 늘 선의와 자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좋았다. 적어도 그녀를 따르는 것에는 죄책감이나 의구심이 들지 않았다. 늘 옳은 일을 한다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다면 몰라도.

루이스는 테이먼 테르조 군대의 습격 당시 캘던에 있었으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카르낙과 파니릴리가 놈들을 피해 도망칠 때 이미 그녀의 생명이 위태로웠다는 것은 안다.

제대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남편의 품에 안겨 달아난 그녀가 과연 온전히 몸을 회복했을까. 그 반대의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것쯤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테르먼 테이조는 죽이겠어.”

핀이 스산하게 말했다. 잔뜩 독이 오른 목소리였다.

“카르낙이 끝내 돌아오지 않더라도 난 놈을 칠 거야. 반란이든 반역이든, 뭐든 상관없어. 반드시 놈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고 말 거야.”

당한 것은 반드시 갚아 주어야 한다. 잃은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이, 더 처절하게 놈들을 도륙 내야 한다. 그것이 카르낙 발투만의 방식임과 동시에 핀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념이었다.

“대장님! 대장님!”

감시병이 첨탑 위에서 소리쳤다. 핀과 루이스는 동시에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성벽의 감시병은 손으로 성벽 밖의 먼 곳을 쿡쿡 찌르며 가리켰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리오는 자유 도시인 만큼 오고 가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루이스와 핀은 별다른 기대감 없이 성벽 가까이로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카르낙을 기다려….”

오색찬란한 무리를 바라보다 루이스가 뒷말을 흐렸다, 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오는 이들을 살폈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지나치게 정신 사나운 마차. 깃털을 꽂은 머리띠를 두른 사내들은 분명 로리아나의 몸종들이었다.

“로리아나야,”

루이스가 중얼거렸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깨닫는 데 놈은 늘 한 박자 늦었다.

“저것 봐.”

핀이 손가락으로 마차의 옆을 가리켰다.

“오코야.”

“…….”

윤기 흐르는 검은 말, 그 위에 올라타 있는 새까만 남자. 검은 머리에 펄럭이는 검은 망토가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넋 놓고 감상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핀은 자리를 박차고 벽을 뛰어 내려가며 목청껏 외쳤다.

“성문을 열어! 어서!”

‘허’ 하는 헛웃음과 함께 루이스의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빌어먹을 카르낙 발투만.”

이 빌어먹을 벌레 새끼. 오만 걱정을 다 시키더니 참으로 사지 멀쩡하게도 돌아오는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