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70화 (170/231)

170화

“리오에 가면 모든 것이 확실해지겠죠,”

“네. 그럴 겁니다.”

“고마워요, 로리아나.”

릴리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왕비의 것답지 않게 정갈하고 소박한 매무새. 거기에 잡힌 반지와 팔찌로 화려하게 꾸며진 제 손이 로리아나는 부끄러웠다.

“황송한 말씀이십니다.”

“로리아나가 우릴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끔찍해요.”

“폐하의 군마 덕분이지요. 오코가 아니었다면 저 역시 폐하께서 위독하신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중죄를 범할 뻔했습니다.”

릴리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캘던의 사람들이 정말 그리웠어요.”

정말이었다. 그것을 떠나온 뒤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의 안락함과 충직하고 진실된 친구들이 그리웠다. 그들이 곁에 있었다면 지나온 모든 일을 이겨 내기가 훨씬 더 쉬웠으리라.

“그곳을 떠나와 정말 많은 일을 겪었거든요.”

로리아나가 릴리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캘던에 머물며 온실 속 화초처럼 있었다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일들을 겪어 왔을 것은 그녀를 본 순간부터, 그녀의 행색과 여윈 낯빛에서 충분히 알아차렸다.

“이 고난이 지나가면, 전하께서는 한층 더 강인해지실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맞아. 겪지 않았으면 얻을 수 없었을 깨달음도 많았다. 얻을 수 없었을 인연과 얻을 수 없었을 감정들도.

“새로운 사람도 얻으셨고요.”

“매짐 말인가요.”

“네.

“투로와 엘버그의 피가 반씩 섞인 듯 보이던데.”

“네, 맞아요.”

“하게너의 영지에서 얻은 종자인가요?”

로리아나가 생각할 수 있는 정도는 투로들이 득세한 영지에서 데려왔다는 것 정도였다.

“아니요. 그는 매짐 포드, 대대로 대장간을 운영하던 포드 가문의 장자랍니다.”

“…투로가 창기가 아닌 직업을 갖다니.”

게다가, 매짐이 태어날 때라면 아직 세상은 알기어스 왕의 발 아래에 있었을 터. 검은 머리를 물려받지 않았다 하여도 그 역시 투로의 핏줄. 엘버그 왕국에서 환영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니 세상은 넓은 것이 아니겠어요? 내가 믿던 것들이 사라지기도 하고, 내가 원했던 것들이 무의미해지기도 하고. 그 앞에 서서 깨닫게 되고 말아요. 내가 얼마나 작고 부족한 존재인지.”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늘 제 박자와 흐름에 맞춰 그저 흘러갈 뿐이고 인간의 무지만이, 돌덩이처럼 그 안에 박혀 흐름을 거스르며 고집을 피울 뿐이다. 그러니 유연해야 했다. 함부로 단정을 지어서도, 함부로 신념을 가져서도 안 된다. 진리는 그저 흐름일 뿐, 그것을 정의 내리는 순간 퇴색해 버리고 만다. 릴리는 이 여정 동안 그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그동안 믿었던 모든 것을 버리기에 딱 적당한 때이지 않은가. 이제는 변할 때이다. 세상의 흐름에 맞추어서. 흐르는 물처럼 말이다.

***

카르낙은 번쩍 눈을 떴다. 여느 때와 다름이 없어 낯선 아침이었다.

“칼,”

아내의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릴리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부푼 눈망울을 하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서글픈 얼굴이 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워 카르낙은 한숨을 쉬듯 웃음을 뱉었다.

“릴리.”

그러자, 릴리가 와르륵 그의 가슴팍으로 무너졌다.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그녀는 어깨를 떨며 그 말을 반복했다. 카르낙이 손을 들어 릴리의 등을 도닥였다.

여긴 어디일까.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피니 안락한 막사로 옮겨진 것 같았다. 릴리가 보였고 영 낯선 여자들이 보였고 웬 꼬부랑 노파가 보였고 그리고… 로리아나.

로리아나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왕에게 예의를 다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네가 어떻게.”

“근위대장님께 명령을 받았습니다. 유랑을 가장하여 폐하를 찾아 리오로 데려오라는.”

“…핀이 너에게?”

“물론 저뿐만은 아니고요. 캘던의 많은 이들에게요. 근위병뿐 아니라 상인과 귀족들도 모두 은밀히 폐하를 찾고 있을 겁니다. 제가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또 저 같은 창기의 유랑단에 합류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기도 했다. 그러니 정예병이나 귀족 나부랭이가 엘버그 대륙을 쑤시고 다니는 것은 핀이 만약을 위해 뿌려 둔 미끼에 불과했다. 적의 감시를 분산시킬.

릴리가 카르낙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들며 이야기했다.

“오코가 로리아나 일행을 이리로 데려왔어요. 폐하의 군마에게 아주 큰 상을 내리셔야겠어요.”

아직 뺨 위에 눈물이 흥건했다. 카르낙은 손등으로 그것을 부드럽게 훔쳐주었다.

“내가 놈을 살려 준 적이 몇 번인데, 제 밥값을 이제야 한 거지.”

실없는 농담에 설핏 웃음이 났다. 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상처가 말끔하게 아물고 바스러졌던 뼈가 붙어 자유롭게 오른손을 움직이는 카르낙을 보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대로 그의 목숨을 잃거나, 적어도 팔 한쪽은 잃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리. 당신은 정말… 마법을 부렸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죠?”

릴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아무 흔적도 없이 나을 수가 있지? 기적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몰라. 기억이 안 나.”

말리는 이가 거의 다 빠진 잇몸을 우물거리며 대꾸했다. 노인은 어제보다 더 노쇠해 보였다. 카르낙을 치료하는 내내 무언가에 씐 듯하더니 릴리의 생과 카르낙의 목숨을 교환하며 제 삶도 같이 빼앗겨 버렸나 싶을 정도였다.

“어떤 것들은 내가 알고 어떤 것들은 내가 모르지. 그것들은 내가 모르는 것들이었어.”

“것? 것이요?”

로리아나가 되물었다. ‘것’이 무엇일까. 물건? 아니면 힘? 아니면 영혼?

“내가 아는 것은 하얀 늑대에게 물려 살고 싶다면 늑대를 죽이고 그 혀의 살점을 먹여야 한다는 것뿐이야. 그 이후엔 기억이 안 나. 그 고약한 것들이 온통 내 진을 빼놨어.”

“…….”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에 로리아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부나비의 창기들을 위해 그녀를 고용해 함께하고 있지만 말리는 이해할 수 있을 때보다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더 많았다.

“말리, 혹시 당신도 달거리를 하지 않나요?”

“맞아. 난 달거리를 안 해.”

“…그럼 당신도 다이옌인가요?”

“뭐?”

“다이옌이요. 그라타에선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을 그렇게 불러요.”

“몰라. 그런 거. 그냥 나는 그냥 다른 계집들보다 억세게 재수 없는 팔자를 타고난 것뿐이야.”

사람들이 다이옌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할 때도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이젠 그 존재를 믿을 수 있다. 말리가 하는 것을 보았으니 분명. 분명 사람들의 말처럼 다이옌 역시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으리라.

세상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존재한다. 하얀 늑대가 존재하고, 그 늑대와 소통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리고, 그리고 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마법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는 믿는다.

“왕에게는 힘이 있어.”

말리의 부옇게 흐려진 눈동자가 병상에 누워 있는 카르낙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도 날카로웠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천박하고 고약해. 길들이기가 불가능한 그 힘이 왕의 삶을 지배하고 있어. 당신이 날뛰는 종마 같은 것은 그 이유라우”

“…….”

“당신의 팔은 불로 지졌어. 뼈도. 살도.”

로리아나는 말리와 카르낙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리의 표정처럼 카르낙도 그다지 놀랍지 않은 낯빛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듣고 있는 저는 도통 모를 소리에 나오는 말마다 놀랍고 의문스러운데 말이다. 대신 카르낙은 제 어깨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모든 감각은 전보다 더 기민했고 근육은 더욱 단단했으며 움직이는 느낌은 더욱 날렵하고 생생하였다.

“말리는 치료사예요. 그녀가 당신을 살렸어요.”

릴리가 카르낙에게 노인에 대해 설명했다. 어쩐지 반쯤은 맛이 가 보이더라니. 카르낙이 상체를 일으켰다. 릴리가 곁에서 그를 도왔다. 사실 아내의 도움 따윈 필요 없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만 그녀의 손길은 어느 때고 기분이 좋았으므로 내버려 두었다.

“그렇다면 고맙단 인사를 해야겠군. 그다지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감사 인사는 안 받아. 감사를 표할 거면 차라리 돈을 줘. 만 겔링쯤.”

말리의 말에 카르낙은 소리 내어 웃었다. 강퍅한 노인네가 욕심도 많군. 그러나 바른말을 하며 속내를 숨기는 이들보다는 나았다. 오히려 대하기 쉽고 편했다.

“값은 리오에 무사히 도착하는 대로 치르도록하지. 늙은이. 그나저나 매짐은 어디 있지?”

아까부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카르낙은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하얀 늑대가 릴리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몸을 던지긴 했는데, 그 뒤로 어떻게 되었더라. 매짐은? 놈은 살아는 있나? 릴리가 대답했다.

“매짐은 말타기 연습을 하고 있어요.”

“그 조랑말과 함께?”

이번엔 로리아나가 답했다.

“아니오. 제 마차를 끄는 종마로 연습 중입니다. 함께 온 부나비의 감시꾼 하나를 붙여 주었지요. 더하여. 그 황순이란 조랑말은 제가 짐을 싣는 데 쓸 계획입니다.”

카르낙이 튼튼한 녀석이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완전히 두 다리를 바닥으로 내렸다. 지난밤까지 사지를 헤매던 병자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침착하고 온건한 모습이었다. 이제 그는 완연히 엘버그의 왕다웠다.

“캘던으로부터의 소식은? 혹, 내게 전해 줄 것이 있나?”

“없습니다. 전하. 다만 근위대장께서 리오에서 기다리고 있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핀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면, 놈은 멀쩡히 살아 리오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물어볼 것도 없는 이야기다. 늘 그랬지. 핀은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놈이었다.

“내 검은 어디에 있지?”

그러자 로리아나가 탁자 위, 벨벳 천으로 귀하게 감아 놓은 카르낙의 검을 정중히 그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받쳐 드는데도 그 하중을 이기지 못해 어깨가 떨렸다. 카르낙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가볍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폐하께서는 부나비의 감시꾼으로 위장하셔야겠습니다. 왕비 전하께서는 제 몸종으로 위장하실 겁니다. 그래야 제가 두 분을 안전하게 리오로 모실 수 있습니다.”

카르낙이 제 검을 살필 동안 릴리가 그를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왕이 쾌차하였으니 모든 짐을 꾸려 서둘러 리오로 떠날 일만이 남았다. 그러려면 이곳을 가능한 빨리 정리해야만 한다.

“폐하께서 드실 음식을 챙겨오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한 요기 후, 이곳을 뜨도록 해도 될는지요?”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좋을 것이 없으니. 릴리가 다시 카르낙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곧 돌아오겠습니다.”

로리아나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막 천막을 나가려는데 카르낙이 그녀를 불렀다

“로리아나.”

로리아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네, 폐하.”

“고마워.”

단출한 감사의 인사. 로리아나가 알기로 카르낙 발투만은 그런 것은 할 줄 모르는 사내였다. 왕으로써 마땅히 내뱉어야 할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이 담긴 진솔한 감사 따위는. 지금껏 그를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도 파니릴리처럼 변한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 이후에도 발투만 왕가의 핏줄이 대대손손 왕좌에서 왕좌로 이어지길 바라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를 따르는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로리아나는 기꺼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귀하신 분을 보필할 수 있어 그저 황송할 뿐입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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