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오코가 끌고 온 마차가 근처에 멈추었다. 화려하나 품위라든가 고급스러운 느낌은 들지 않는 외형이었다. 붉은색 망토를 두른 장정 하나가 말에서 내려 마차의 문을 열었다. 커다란 덩치에 구릿빛 피부의 사내는 무척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순수한 엘버그인은 아닌 것 같았다.
딸랑딸랑. 마차에서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작은 방울 소리가 들렸다. 릴리는 사내의 손을 잡은 까무잡잡하고 가느다란 여인의 손목을 보았다. 온갖 화려한 장신구가 치장된 피부는 진주를 개어 바른 듯 매혹적이었다.
“…로….”
릴리는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더 믿을 수 없었다.
“로리아나.”
“전하.”
여전히 건강하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차림을 한 그녀를 보자 온몸에 힘이 쑥 빠졌다.
“어… 어떻게….”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그녀라면 캘던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에이가와… 스코쿠와… 세일린이 있는 그곳. 캘던을 고향이라 여긴 적이 없건만, 로리아나를 보자 그리움으로 마음에 미어졌다.
돌이켜 보면, 모두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캘던에서의 나날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고 소중했다. 이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리 오랫동안 그곳을 떠나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지는지. 지금 이 순간엔 그 모든 것이 요원하게만 보였다.
“근위대장의 명으로 전하를 찾고 있었어요.”
“…핀이….”
로리아나가 다가와 몸을 숙였다. 매짐은 갑자기 나타난 화려하고 아름다운 로리아나의 용모에 말문이 막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갑자기 천국에라도 다다른건가 싶어 그는 몇 번이고 제 눈을 비볐다.
“발투만의 깃발을 나부끼며 폐하를 찾아다니는 것보다 유랑을 가는 창기들이 움직이는 데는 훨씬 더 안전하죠.”
그러며 리리아나는 카르낙 발투만을 살펴보았다. 잿빛 블리오 천으로 칭칭 감겨 있는 오른쪽 어깨가 피로 흥건했다.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인지 왕의 낯빛은 백지장처럼 새하얬고 입술이 푸른색으로 변한 지는 이미 오래된 것 같았다.
로리아나는 눈을 들어 릴리의 안색도 살폈다. 제 블리오 자락과 같은 잿빛 천을 터번처럼 두른 그녀의 얼굴도 남편 못지않게 수척했다. 절망과 희망과 안도와 불행이 뒤섞인 처연한 표정. 잠잠한 바다와도 같던 캘던에서의 그녀와는 너무도 달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할 지경이었다. 그 얼굴만 보아도 국왕 내외가 지금껏 겪어 온 고난을 모두 설명하고도 남았다.
“…늑대… 늑대가… 늑대가 칼을…”
“늑대요?”
“하얀 늑대예요.”
매짐이 릴리의 말을 정정했다. 로리아나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살짝 눈가를 떨었다. 그녀는 사창가에서 엘버그와 투로인이 섞인 혼혈아를 많이 보았다. 매짐은 딱, 그 혼혈아가 가진 특징이 아주 잘 두드러지는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을린 피부에 밝은 갈색 머리, 제 어미의 것이 분명할 푸른색 눈동자가 그랬다.
하얀 늑대. 로리아나는 그의 답을 곱씹었다.
“하얀 늑대가 폐하를 물었나요?”
릴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리아나와 대화를 하는 사이 장정들이 들것을 가져왔다. 등이 굽은 파리한 노파 하나가 그의 곁에 앉아 약상자를 열었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 귀하디 귀한 돋보기를 한쪽 눈에 끼운 그녀는 그는 쑥 꺼진 눈꺼풀을 깜빡이며 카르낙의 면부와 상처를 면밀히 살폈다. 로리아나는 행여 릴리가 근심할까 그녀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말리. 부나비의 치료사예요. 실력이 아주 뛰어나죠.”
노파는 몇 개 남지 않은 이빨로 앙상한 입술을 몇 번이고 씹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치료 못 해.”
기함할 말이었다. 릴리가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처럼 상체를 곧추세우며 고함쳤다.
“할 수 있어요! 늑대에 물린 상처잖아요! 몇 가지 고약과, 지혈, 지혈제만 있으면 돼요! 내가. 내가 숲에서 딱초를 발견했어요! 이걸 말려서 차로 만들고, 약을, 고약을,”
노파 말리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인상을 찌푸리자 괴팍한 인상이 더 괴팍해졌다.
“하얀 늑대에게 물리면 어떤 치료제도 쓸 수 없어.”
“하지만,”
“괜히 신의 사자라 하는 게 아니야. 그놈에게 물리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의 은총을 비는 것밖에 없다고.”
노파가 팔을 휘젓자 사내 하나가 그녀를 일으키고 마른 손에 단단한 지팡이를 쥐여 주었다. 입맛을 다실 때마다 턱이 떨렸다. 가만히 있으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떠는 것은 이미 여러 번 생사의 고비를 넘긴 증거임에 틀림없었다.
“정말로 방법이 없나요, 말리? 이분은 엘버그 왕국의 국왕 폐하세요.”
뭐? 매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리아나와 말리 그리고 릴리와 사경을 해매는 이스바(라 알고 있는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국왕? 국왕 폐하라고? 그러고 보니 국왕은 투로라고 했다. 무자비하고 거칠고 거대한 괴물 같은 투로.
하지만 이스바 경이? 이스바 경이 무자비하고 거칠고 거대한 괴물이던가? 그는 강했다. 강하고 무뚝뚝하고 성실하며 매우 뛰어난 전사였다. 그런 이스바 경이 정말, 정말 왕이란 말인가? 전쟁을 일으켜 엘버그 땅을 도륙하고 사람들을 학살하고, 가까이로는 멀루아 영지를 모조리 불태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이스바 경이?
“알고 있어. 나 아직 노망 안 났다우.”
분명 늙은이가 그새 까먹었나 싶어 다시 짚어 주는 거지 싶어 말리는 허리를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늑대에게 물린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건 하얀 늑대뿐이야.”
그러나 하얀 늑대는 잡을 수 없다. 누구도, 지금껏 살아오며 그 누구도 하얀 늑대를 죽이거나, 포획하거나, 혹은 그 시체라도 찾았다는 이를 보지 못했다. 사실 하얀 늑대를 마주했다는 사람들조차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그와 마주쳤다면 십중팔구 죽었고, 살아남았다면 아주 멀리서 희미한 형체만을 본 정도인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방법이 있어 무엇을 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인데.
“어떻게요?”
릴리가 조바심에 입술을 달싹였다.
“하얀 늑대를 죽여 그 혀의 살점을 잘라 와야 해.”
“…….”
아. 하고 매짐이 탄식했다. 불가능해. 불가능하다. 그 집채만 한 짐승을 무슨 수로 죽인단 말인가. 훈련받은 병사 너덧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해치웠던 이스바 경, 그러니까, 아마도 국왕인 저 남자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한 짐승을.
“내가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한 것은 릴리였다. 로리아나는 요원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사내들이 들것을 가져와 조심스레 국왕의 몸을 그 위에 눕혔다. 몇 미터 앞에 벌써 천막이 쳐졌다. 부나비의 일꾼들이 부지런히 먹을 것을 꺼내고 침구를 정리하며 왕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중이었다.
매짐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부인.”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는 곧바로 호칭을 정정했다.
“아니, 저, 전하.”
부르면서도 믿기지 않아 억양이 기괴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어 갔다.
“못 들으셨어요? 놈을 죽여야 한다잖아요. 놈을 죽여 혀를 잘라 와야 한다잖아요. 그놈을 어떻게 죽여요? 지금 이 상황에 그 커다란 놈을 죽이는 건 무리예요.”
맹수를 죽이는 데 인이 밴 사냥꾼들이 떼로 덤벼든다면 모를까,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야 그 축에 끼지도 못할 테고 저 로리아나란 여자를 따라온 이 사내 너덧을 다 합쳐도 놈을 잡기란 불가능하다.
설사 그놈이 이스바 부인을 아니, 왕비 전하를 살려 주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불가능해. 살려 주는 것과 제 목숨을 내놓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자비일지언정 후자는 희생이다. 과연 그녀를 위해 놈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겠는가. 왜냐하면 놈은 아마네스 여신의 사자이고 그녀는, 왕비는….
“알기어스….”
그랬다. 이스바가 왕이고 그의 아내가 왕비라면 분명 눈앞의 이 여자는 알기어스, 아마네스의 핏줄. 촌구석에 처박혀 살아도 그것만은 안다. 나라의 근간인 설화와 왕족의 뿌리를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도저히 그 빛을 알 수 없는 눈동자, 단 한 톨 남기지 않고 모두 밀어 버린 머리카락. 마치 씻지 않은 듯, 씻고 나서도 반들거리는 얼굴 위에 발려 있던 거무죽죽한 흙먼지들. 손끝에 칠해져 있던 숯 그을음.
“왕비… 왕비 전하.”
그것을 이제야 진실로 눈치채고 말았다. 그랬다. 그랬던 거다. 놈은 알아본 거다. 제 주인의 고귀한 핏줄을. 신의 사자가 되어 어떻게 신의 여식을 죽일 수 있겠는가. 매짐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매짐에게 신이었다. 신의 여식이니 그 자체로 신이나 다름이 없다. 신을 제 눈으로 본 것이다. 영광스럽고도 감히 두려워 그는 머리를 땅에 처박고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그러나 시골 촌뜨기가 무엇을 어떻게 느끼건 나머지 일행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감격에 겨워 바닥에 엎드려 있는 동안 로리아나는 릴리를 설득해야 했다.
“제가 사람들을 풀어 볼게요. 여기 있는 부나비의 짐꾼들은 모두 무예에 능하고 무기도 잘 다뤄요. 그들을 풀어 일단 늑대를 찾아낸 후에…”
“아니요.”
릴리가 로리아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못 찾아요. 내가 찾아야 해요.”
“…하지만 어떻게….”
“몰라요. 하지만 분명히 내가 가야 해요. 나 혼자요.”
“전하. 그건 안 됩니다.”
“늑대는 절 죽이지 않아요.”
물론, 그런 이야기가 있는 것은 로리아나도 안다. 하얀 늑대는 신의 사자이고 알기어스의 핏줄인 파니릴리는 신의 자식이니 신화에 따르면 분명 놈은 파니릴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가 아니던가. 지금은 어느 누구도 진실로 신을 믿지 않는다. 설령 신을 믿는다 하여도 신의 증거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없기에 더 간절히 그것을 구하려는 것이다.
엘버그인들조차 그러할진대 신의 저주를 받았다 여겨지는 로리아나는 어떠한가. 그녀는 차라리 신이 없다 믿는 쪽이었다.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증거로 파니릴리를 홀로 몰아넣을 순 없었다.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현실은 그것과 다르다.
“제가 보았어요.”
매짐이 말했다. 진정 신이라도 본 듯, 떨리는 목소리가 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