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65화 (165/231)

165화

“…약초….”

릴리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약초, 약초를 구해야 해. 릴리는 횃불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쓸만한 것이 있을까? 땅은 거칠고, 억세고 질긴 잡초들이 듬성듬성 군락을 이루고 있었지만 과연 이 중에 카르낙의 몸에 쓰일만한 것이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시각은 이미 어두운 밤. 풀을 살펴보려면 일일이 땅을 밝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약초를… 약초를 찾아봐야겠어요.”

부목을 단단히 묶어 고정하고 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매짐이 그녀의 짧아진 블리오 자락을 잡았다.

“안 됩니다, 부인. 또 숲속에 어떤 짐승이 있을지 모릅니다.”

“괜찮을 거예요.”

분명, 늑대는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주춤거리고, 무엇인가를 전하려는 듯 빤히 쳐다보며 이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결국, 결국은 물러났다.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스바 경은 물론 매짐 자신도 이미 늑대의 저녁밥이 되어 있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를 이 어두운 밤중에 홀로 헤매고 다니게 할 순 없다.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해요. 늑대가 있다는 것은 다른 금수들도 있단 이야기 아니겠어요? 어떤 짐승이 있을지 모릅니다. 한 번은 물러났어도 두 번은 봐주지 않을 수도 있고요.”

“여기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을 순 없어요.”

“하지만….”

“그이를 잘 보살펴 줘요.”

“…부인.”

릴리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허리까지 오는 건초 덤불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당장 필요한 것은 출혈을 멈추는 것이다.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고통이라도 덜어 낼 수 있는 환초가 필요하다.

만일, 만일 그가 죽는다면. 그가 이대로 죽게 된다면. 그렇다면 고통 속에서 죽어 가게 내버려 둘 순 없다. 적어도 평화로움 속에서 고통 없이…. 그 생각에 미치자 주룩 눈물이 났다.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은 것을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쳐 내고 그녀는 단단히 걸음을 내디디며 발밑을 살폈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뭐라도 좋아. 뭐라도 좋으니 제발. 카르낙을 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제발 내게 내어 줘.

아마네스 님, 제발. 저를 가엽게 여겨 부디 약초를 주세요. 무엇이라도 좋으니 제발. 제발 그를 살릴 수 있게 해 주세요. 은총을 베풀어 주세요. 당신의 사랑은 상하 고저를 막론하고 천한 것과 귀한 것을 가리지 않으며 모두에게 같다는 것을 부디 제가 알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제발. 제발. 같은 말을 주문처럼 반복하며 걷는데 발밑에 무엇인가가 보였다. 릴리는 그 위를 덮고 있는 건초들을 모두 걷어 냈다. 듬성듬성 작고 동그랗고 거친 잎사귀, 딱초가 보였다.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보이는 대로 딱초를 뜯어 제 블리오 자락에 넣었다. 주로 부인병에 많이 쓰인다고 들었지만 출혈에도 효과가 있다고 했으니 카르낙에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릴리는 서둘러 카르낙에게 돌아갔다. 매짐이 릴리의 블리오 자락에 든 앉은뱅이 잡초를 바라보며 물었다.

“약초인가요?”

“네. 딱초예요. 출혈을 멈추게 해 줄 거예요.”

그녀는 풀을 한 움큼 잡아 제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입 안에 넣고 씹자마자 쓰고 떫고 비린 맛이 났다. 본래 깨끗하게 씻어 말린 후 먹거나, 빻아 환부에 바른다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도 도구도 없었다.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돌 대신 튼튼한 치아로 짓이기는 것뿐이었다.

릴리는 헛구역질을 해 가며 풀들을 잘근잘근 씹었다. 토막 나고 조각나고 뭉개져 밀가루처럼 부드러워질 때까지 씹다가 퉤 뱉어 내 그것을 카르낙의 환부에 붙였다. 너덜거리는 피부에 쓰디쓴 약초가 닿을 때마다 그가 신음을 내뱉었다. 고통에 입술까지 바짝 마른 상태로도 그는 반대편 손을 휘저어 릴리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릴리….”

그가 앓는 듯 중얼거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눈을 뜨나, 감으나 눈앞이 깜깜했다. 그대로 자고 싶었다. 정신을 놓고 저항하기를 멈추면 평온함 속에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칼! 잠들면 안 돼요!”

그러나 릴리가 그의 환부에 약초를 바르며 계속해서 그의 뺨을 두드렸다. 잠들면 안 돼요. 잠들어선 안 돼요. 출혈이 멈출 때까지 잠들면 안 돼요! 잠들면 피가 멎는 속도가 늦어진다. 멎는 속도가 늦어지면 피를 더 많이 흘리게 되고 그럼 잠든 카르낙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 적어도 피가 멎을 때까지는 깨어나 씩씩하게 죽음과 싸워야 한다.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르낙 역시 몇 번이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를 썼다. 그녀의 목소리를 밧줄 삼아 그것을 지탱하여 심연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악을 써도, 발버둥을 쳐도 고통 앞에 무너져 내리는 영혼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릴리.”

그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제 아내가 자신의 옆에 있는지 제대로 확인해야 했다.

“칼!”

릴리가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카르낙은 듣지 못하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릴리…”

그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릴리, 릴리. 아무리 찾아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분명 손에 그녀의 손을 쥐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느껴 보려 하여도 그녀의 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손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손이 달려 있다는 느낌이 어떤 거였지? 발이 있다는 느낌은? 숨 쉰다는 느낌. 눈을 뜨고 감는다는 느낌은 어떤 거였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릴리.

“칼!”

릴리….

***

릴리는 계속해서 딱초를 씹고 짓이겨 카르낙의 환부에 붙였다. 얼마나 그 짓을 반복해서 했던지 턱이 얼얼하다 못해 아예 감각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매짐은 계속해서 수풀을 뒤져 딱초를 공수해 왔다.

어느덧 동이 터 오고 있었고 아직 오코와 매짐의 조랑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매짐도 릴리만큼 안색이 파리했다. 그는 한 움큼 따 온 딱초를 그녀의 앞에 놓아 주고는 진이 빠진 듯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한 듯 크게 한숨을 내뱉고 매짐은 릴리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반복해 풀을 씹고 그것을 제 남편의 환부에 붙이는 것 말고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기계 같은 모습이었다.

“부인.”

매짐이 그녀를 불렀다. 어쩌면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때인지도 몰랐다. 안타깝지만, 서글프지만. 이젠 단념해야 할 때가 됐는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차라리 그의 생명에 집착하기보다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편이 덜 괴로울 것이라 여길 찰나에 기어이 릴리가 울음을 터트렸다. 매짐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도닥이며 위로했다. 휘청거리다가 릴리는 그의 어깨 위로 무너졌다.

“멈추질 않아요.”

그녀가 매짐의 품에서 절규했다.

“피가 멈추질 않아요.”

계속해서 풀을 씹어 붙였다. 블리오 자락을 계속 찢어 핏물을 닦아 내고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정신을 차리라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러나 피는 멈추지 않았고. 카르낙은, 그녀의 남편은 깨어나지 않았다.

살려 달라, 제발 살려 달라,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할 테니 제발 그를 살려 달라 밤새 빌었다. 밤새 아무에게나 제발 이 기도가 닿는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그를 구해 달라고 계속해서 빌었다.

인정할 수 없다. 그를 이대로 잃을 수는 없다. 아직 그에게 사랑을 다 전하지도 못했다. 아직 그에게 해 주지 못한 것도 많았다. 이제야 제대로 그의 곁에 머무르려고 했다. 이제야 간신히 그의 옆에 남겠노라 결심했다. 아직 풀어내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그를 잃을 수는 없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이 모든 것은 자신 때문이라고. 도저히 자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동이 터 왔다. 릴리는 푸르게 질린 카르낙의 몸 위에 엎드렸다.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채 사경을 해매고 있었다. 릴리는 그의 가슴에 뺨을 대고 중얼거렸다. 거기로 가지 말아요. 가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부디 그곳으로 가지 말아요. 그가 생사의 경계에 서 있다면, 제발 그 반대편으로는 가지 말아 달라고. 부디 그를 그곳으로 데기로 가지 말아 달라고 계속해서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으니, 제발, 제발 내 남편을 이렇게 데려가지는 말아 달라고.

내가 아이를 잃고 정신을 잃은 채 홀로 빈 호수를 헤매고 있을 때, 끝도 없이 넓은 곳에 방향을 잃고 헤매다 물에 빠져 남편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 때, 그때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처참하고 무기력하고 나약한 존재가 된 기분.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해 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고통스러운 기분. 그저 살아나기만 한다면, 곁으로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때 카르낙은 자신을 불렀다. 자신이 간절히 그를 찾을 때, 분명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가 저를 살렸다. 끝도 없이 빠져드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 오로지 그의 목소리만이, 파니릴리 자신의 구원이었다. 그러니 부디 돌아오라고. 릴리는 꺼져 가는 카르낙의 심장에 대고 말했다. 부디 당신도 내 목소리를 듣고 내게 돌아오라고.

“부인!”

매짐이 제 남편의 몸을 매만지며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릴리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는 눈을 찌푸리고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했다. 먼지바람이 일고 있었다. 무언가. 분명 무언가가 오고 있다. 그는 손가락으로 바람이 이는 곳을 쿡 찍어 가리켰다.

“오… 오코!”

그러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는 확신에 차 있었고 파니릴리도 벌떡 남편의 가슴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오코예요! 오코가!”

그러자 릴리도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검은 말이 보였다. 맞아. 저건, 저건 카르낙의 말이야. 저 검고 단단한 말은, 그리고….

“마차예요!”

매짐이 다시 소리 질렀다. 릴리도 그것을 발견했다. 오코가 달려오는 그 뒤로 더 큰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오는 것. 분명 그것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였다. 그 뒤로 말을 탄 장정 무리 몇이 더 보였다. 매짐은 더할 나위 없이 흥분해 펄쩍 뛰었다.

“사람! 오코가! 오코가 사람들을 데려왔어요!”

이런 염병할! 오코! 세상에! 영악한 짐승! 그가 제 주인을 위해 사람들을 데리고 오고 있어!

매짐이 오코를 향해 달려갔고 릴리는 다시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제 남편의 뺨을 쓰다듬었다. 다행이다. 다시 또 눈물이 흘렀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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