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58화 (158/231)

158화

“…그 사람은 널 아프게 했어,”

“지나간 일이에요.”

“그 사람은… 다시 널 아프게 할지도 몰라.”

“알아요.”

“그는 다시 널 몰아붙이고, 협박하고, 옥죌 거야. 그리고 다시는… 다시는 너를 놓으려 하지 않을 거야.”

릴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다시, 너를, 다시는, 돌려보내지 않을 거야.”

다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다시는 달아날 수 없어. 다시는… 다시는 너에게 자유가 허락되지 않아.”

그는 널 소유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주지 않을 거야. 전보다 더 미치광이가 되어 다시는 널 놓지 않을 거야. 손에 꼭 쥐고 숨이 막히도록 조일 거야. 그러다가, 그러다가…. 그가 널 죽일 거야. 그 순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절대로 너를 놓지 않아.

“지금 달아나지 않으면… 지금이 아니면 릴리, 기회는 없어.”

그러니 이 기회를 잡아. 이 기회를 잡아서 내게서 달아나. 내가 너를 죽이기 전에. 내가 너를 망치기 전에. 내 곁에서 빛을 잃어 가는 너를 보며 행복에 겨워 광란의 춤을 출 미친 사내에게서 아주 멀리.

“알아요. 그리고 지금처럼 그것을 원했던 적이 없어요.”

“…절대로 도망갈 수 없는데도? 다신, 다신 널 놔주지 않는데도? 죽어서도 떠날 수 없는데도? 그래도?”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침내 카르낙은 릴리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의 허리와 등을 껴안고 힘껏 옥죄고서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그리고 가득 그 향을 들이켰다.

“넌 이제 내 거야, 릴리. 완전히 내 거야. 절대로 놔주지 않을 거야. 다시는 놔주지 않겠어. 설령 네가 빌고 울고 후회한다고 해도 절대로. 절대로 놔주지 않아. 절대로. 절대로.”

릴리는 카르낙의 품에서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그것이 그녀가 원한 것이었다. 서툴고 거칠어 사랑에 요령이 없던 뜨거운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안는 그만의 방식이 좋았다. 그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강한 포옹이 좋았다.

이제야 카르낙 발투만을 다시 만난 것 같았다. 이제야 드디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다. 다시는 이 남자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모습 이대로 영원히 자신을 사랑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것이 파니릴리, 자신이 기다려 온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외로웠기 때문일까, 소유하려는 사랑에 익숙지 않아서일까, 때론 숨이 막히고 답답하고 달아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모든 것이 어색하고 불편해 정말로 죽을 것 같았던 때도 물론 있었다. 그리하여 절망하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단 생각도 했었다.

그땐 몰랐던 것이다.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떠나고 싶고, 달아나고 싶고,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는지.

그것은 사랑에 대한 두려움과 굶주림이었다. 두려워서 달아나고 싶다가도 그러한 자신을 붙잡아 주길 바라는 것. 카르낙이 주는 사랑이 딱 그랬다. 울고불고 악을 지르며 버둥거리는 그녀를 붙잡고 껴안으며 이것이 내 사랑의 방식이라며, 숨 막히도록 비틀리고 강렬한 사랑을 주는 것.

그게 파니릴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사랑인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 요구인가. 부덕하고 비틀리고 아무런 가망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원한다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것을 원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카르낙은 그런 것을 주었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 말할수록, 비틀리고 굶주릴수록 그것은 파니릴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꼭 맞는 사랑의 형태가 되어 갔다.

사실 애정과 사랑에 굶주린 것은 자신이었다. 끝도 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것도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사랑은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고 깊고 어두워 그녀조차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카르낙이 그것을 채워 주길 원했다. 그의 집착과 사랑이 끝나는 날에 아마 자신의 이 굶주림도 바닥이 보일 터였다.

이것은 사랑일까, 그의 눈먼 사랑을 원하는 이 감정 역시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분명 자신은 카르낙을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이 꿈꾸고 상상해 왔던, 그리고 지금껏 받아 왔던 수많은 사랑의 형태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럼에도 이것에 무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분명, 이것 역시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 역시 사랑일 터였다. 끊임없는 갈증과 목마름으로 그에게 애정을 구걸하는 이 감정 역시, 분명, 분명 사랑일 것이다.

카르낙이 허겁지겁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더는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망설일 필요가 없다.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그녀의 두 뺨을 붙잡고 그는 곧바로 입술을 붙였다. 릴리는 저항 없이 부드럽게 입술을 벌렸고, 카르낙은 물어뜯을 것처럼 그녀의 입술을 빨고 혀를 밀어 넣었다.

그녀를 얼마나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질 수 있었던 것은 멀루아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사지를 강제로 묶어 놓았던 때였다. 그때 둘을 집어삼켰던 것은 열망이나 사랑이 아닌 절망과 두려움이었다.

그녀에게 증오를 이야기할 때도, 그러한 순간조차 그녀의 육체를 갈망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고, 스스로도 혐오하는 자신을 그녀가 어떻게 느낄까 두려웠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내내 그런 끔찍한 고통을 짊어진 채 살아야 했다. 앞으로도 영영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를 갈망하는 자신을 저주하고, 그리하여 고통받으며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카르낙은 릴리의 옷 위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젖가슴을 움켜쥐었을 때 차라리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대로 다시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감촉을 다시 느꼈을 때, 내려놓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짐이 그의 등에서 사라져 갔다. 그것은 구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너무나 과분하고 고귀한 구원.

카르낙은 그녀의 모든 곳에 입을 맞췄다. 사랑과 열정과 숭배가 담긴 입술은 몸에 걸친 옷가지를 뚫을 듯 뜨거웠다. 릴리는 그가 제 몸의 구석구석에 입을 맞출 때마다 황홀함을 느꼈다. 그녀 역시 두 번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만 같던 감정이었다. 그를 원망할 때에도 갈망하던 감촉이었다. 거부해야 할 때조차 차라리 타락하기를 택하고, 기꺼이 몸을 던지고 싶던 열망이었다.

카르낙은 그녀의 뺨과 턱, 귓불에 입을 맞추고 다시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어느새 그의 하체가 부풀어 있었다. 릴리는 그가 자신을 껴안고 그것을 비빌 때마다 흥분으로 호흡을 멈추었다.

“릴리….”

그가 신음하듯 릴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를 안고 싶었다. 옷을 모두 벗겨 내고 이 자리에서 곧바로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 자신을 파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것일까. 이미 한 차례의 유산으로 사지를 오갔고, 안심해도 좋을 만큼 긴 시간이 지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또다시 그녀를 아프게 할까 두려웠다. 자신의 욕망이 다시 그녀에게 상처를 주진 않을까. 그래서 혹 그녀를 망가뜨릴까 봐 두려웠다. 곁에 두고 소중히 아껴 주고 싶다.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대하고 싶었다. 이제 내 것이니까. 온전히 내 것이니까.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저 안온한 곳에 고이고이 모셔 두고 쳐다만 보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잡한 갈망으로 그녀를 망가뜨릴 바에야.

릴리도 알았다. 카르낙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부서질까 두렵지 않았다. 또한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릴리는 먼저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헐벗은 허벅지 위에 얹어 놓고 곧바로 물 안으로 제 손을 집어넣었다. 팽창한 그의 것이 느껴졌다. 차가운 물 속에서도 그것만은 단단하고 뜨거웠다. 카르낙이 윽, 하고 몸을 떨었다.

페니스 위로 손이 닿았을 때의 느낌이 너무 강력하여 그는 무력하게 릴리의 어깨 위로 고개를 떨구며 무너졌다. 정말로 와르르, 자신의 모든 것이 그녀의 손가락에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더.”

카르낙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애원했다.

“더 만져 줘, 릴리. 더.”

릴리는 기꺼이 그의 말에 따랐다. 그의 페니스를 조금 더 힘주어 쥐고 조금 더 빨리 위아래로 매만졌다. 릴리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수면에 파동이 일었다. 찰박, 찰박 물소리가 났다.

“아.”

그가 크게 숨을 토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새로 보이는 그의 턱이 꿈틀거렸다.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그가 질끈 물었다. 릴리의 허벅지 위에 얹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가 붉게 변했다. 흥분을 참지 못한 카르낙은 그녀의 젖가슴을 찾아 움켜쥐고 반대편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거야. 아. 조금 더. 아, 흐읏, 릴리….”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릴리는 제 손길을 맞췄다. 그가 헐떡임이 가빠질수록 손의 움직임도 더 강하고 빠르게 변했다. 손안에서 그의 것이 더더욱 부피를 키웠다. 릴리가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바짝 조이자 그의 하반신이 저에게 완전히 밀착되었다.

카르낙이 다시 한번 ‘헉’ 하고 숨을 멈췄다. 릴리가 손으로 부드럽게 그의 페니스를 제 밀부로 인도한 것이다. 으드득, 하고 카르낙이 어금니를 갈았다. 흥분하다 못해 그대로 온몸이 터져 버릴 성싶어 그는 제 페니스를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밀어내고 제 것을 붙잡아 그녀의 음순에 몇 번이고 치댔다.

선단에서 묻어 나오는 말간 액이 그녀의 음순을 적셨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카르낙은 제 손에 침을 뱉어 그것을 제 귀두에 펴 발랐다. 그러고는 그녀의 안으로 쑥, 저를 밀어 넣었다.

“흑!”

릴리의 허리가 뒤로 활처럼 휘었다. 카르낙은 넘어가려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아당겨 제 목덜미로 인도했다. 릴리는 허겁지겁 그의 목을 껴안았다. 카르낙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당기며 제 것을 뿌리 끝까지 박아 넣었다. 그러고 나자 ‘아아’ 하는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지독히도 황홀하고, 지독히도 온전한 감각. 자신의 것도 아닌 자궁이, 릴리가 있어야만 끼워 맞출 수 있는 그 작고 안락한 구멍이 마치 자신의 집이라도 된 양, 아주 오래전부터 머물렀던 곳이기라도 한 듯, 카르낙은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안온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영원히 그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은 감각 말이다. 이대로 영원히 그녀의 안에서 머물거나 그게 아니면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릴리가 재촉하듯 ‘칼’ 하고 부르며 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카르낙은 천천히 빠져나왔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뿌리 끝까지 빠듯하게 넣었다. 릴리가 몸을 떨며 신음했다. 기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를 더욱더 기쁘게 해 주고 싶어 카르낙은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흥분한 릴리가 쾌감에 비명을 지르게 만들고 싶었다. 그녀를 위해 제 몸을 도구처럼 쓰고, 그로 인해 저도 쾌감에 몸부림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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