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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57화 (157/231)

157화

“뭐?”

카르낙이 되물었다. 가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난 좀 더… 이곳에 남아 있고 싶어요.”

“…….”

이곳? 이곳 어디? 여기? 포드의 대장간 말인가? 어째서? 왜 이곳에 남고 싶어 하지? 자미에 포드 때문인가? 그녀에게서 과거 자신의 유모나 스승의 그림자를 본 건가? 그녀의 곁에는 늘 그녀를 보호해 주는 중년의 여성이 있었다. 엘버그에 와서는 그 역할을 에이가가 대신했었다. 그녀에겐 그들이 모친 같은 존재였으리라. 그래서일까. 그래서 자미에 포드의 곁에 좀 더 남고 싶은 걸까?

“내가 폐하를 또 위험에 빠트릴지도 모르고, 또 아주 많은 갈등과 싸움이 있겠죠. 서로를 미워할 때도 있을 테고, 함께 있기 싫을 때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래도 여기에 남겠어요.”

“…어디 말이야? 릴리? 어디를 말하고 있는 거야?”

“폐하의 곁이요.”

“…….”

“저는 좀 더 폐하의 곁에 있을래요.”

뭐야, 무슨 소리야.

“왜?”

그가 물었다. 대체 왜? 너무 놀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넌 한 번도… 그래. 넌 단 한 번도 이곳에 와 행복한 적이 없었잖아.”

단 한 번도 내 곁에서 좋았던 적이 없었잖아. 너는 늘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찾을 수 없었잖아. 그래서 괴롭고 힘들어했다. 이곳에 와 계속해서 잃기만 할 뿐, 너는 단 하나도 얻은 것이 없었다.

“더는 네가 불행해지길 원하지 않아.”

그의 말에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알아요. 그 점은 정말 감사해요.”

“…….”

카르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 작은 머릿속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일까.

“나는 너무 맹목적이었어요, 칼.”

그녀가 ‘칼’이라고 불렀다. 그 한 음절에 담긴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카르낙은 그냥 무너져 버리고만 싶어졌다.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만 보려고 했어요. 당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내가 원하는 대로 당신을 봤어요. 내 기준에 맞추기 위해 당신을 여기저기 끼워 맞추고 조립하고 틀에 가두었죠.”

“난… 한 번도…”

난 한 번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당신은 늘 옳았어, 릴리. 네가 원했던 것들…. 다만 내가 그걸 따르지 못했을 뿐이야.”

그리고 늘 나의 모자람을 인정하기 싫어 너를 탓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네가 진정으로 날 사랑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이제 와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바라는 것은 가질 수 없었고, 오히려 그녀를 궁지로 몰아 죽음에 다다르게 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하고 무섭다.

“꿈속에서 당신을 봤어요, 칼.”

릴리는 사경을 헤매던 때, 자신 안에 침잠되어 있던 것들이 어떻게 의식 속에서 발현되었었는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얼마나 그를 애타게 찾았는지도.

“내내 당신만 불렀어요.”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언제나 깊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쉴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던 그때였다면 잠시나마 그곳에 서서 사색에 잠겼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공간은 고요한 만큼 공허하였고, 평화로운 만큼 두려웠다. 철저히 혼자인 곳이었으나 그녀는 거기에 홀로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떠오르는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두려울수록, 괴로울수록 더 애가 타고 간절했다.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그녀는 얼마나 절실히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던가.

“죽을 것 같은 순간에… 나는 당신만 찾았어요. 죽고 싶지 않아서 구해 달라는 뜻이 아니었어요. 그때의 나는… 내가 죽는 순간까지… 아마도…”

“…….”

“아마도 당신의 옆에 있고 싶었던 것 같아요.”

분명 그랬다. 그래서 그토록 처절하게 그를 불렀다. 숨이 멎을 때, 정말로 그런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카르낙뿐이었다. 오로지 그의 품만이 그리웠다.

“난 이곳에 목적을 가지고 왔어요. 내 핏줄로 이어진 모든 연을 다 끊어 버리겠다는 목적이요. 왜냐하면 나의 태생이, 내 몸을 타고 흐르는 이 피가 영원히 날 구속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여기에 왔어요.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요.”

릴리는 상념에 잠겨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칼… 난 당신의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어요. 그 역할에 충실하고자 마음먹었어요. 그건…그러니까… 내겐 속죄 같은 거였어요.”

“알아.”

모두 알고 있어. 네가 내게 보여 주었던 자비와 친절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했어야 했다고 늘 후회했다. 그녀가 보여 주는 그 작은 친절과 자비에 감사했어야 했다고. 이제 와 뒤늦게 그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까 지금이라도 욕심부리지 않으려는 거야. 아니까, 당신을 그라타로 보내려는 거야.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릴리.”

카르낙은 제 마른 입술을 한번 축이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날 혼란스럽게 하지 마. 릴리.

“그렇게 결정하기까지 정말 힘이 들었어. 난 아직도 싸우고 있어.”

그는 제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여전히 피를 흘려. 피가 흐를 때마다 너의 행복과 너를 잃으면 내가 잃게 될 것들에 대해 생각해. 아무리 많은 피가 흘러도 네가 행복을 잃는 것보다 값지진 않다고. 나는 언제나 그렇게 나를 설득하고 있어.”

릴리는 제 가슴을 툭툭 치는 그의 손을 조용히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길이 그의 명치쯤에 닿았다.

“하지 마.”

카르낙은 어금니를 물었다. 자칫 위협으로도 들릴 수 있을 만한 음성이었다. 눈동자는 날카로웠고, 가슴은 부풀었으며 표정은 당장이라도 포효할 것처럼 격앙되어 있었다. 그는 화가 난 듯 보였다. 금방이라도 상대방의 목을 조를 것 같은 태세였다. 그러나 파니릴리는 물러설 수 없었다.

“내 말을 들어 봐요. 내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당신에게 이야기해야 해요. 나는 내 목적에 눈이 멀어 있었어요. 그것들이 내 행동을 가두고 내 눈을 가렸어요. 난 가슴이 아니라 머리가 하는 말을 따랐어요. 당신을 언제나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대하려고 노력했어요.”

“…….”

“당신을 위한다며 바른말을 해 댔던 것. 그거… 사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나를 위해서였어요.”

“…릴리.”

“그런 말들로 나는 나를 숨겼던 거예요. 나를 감췄어요.”

“부탁이야.”

카르낙이 그녀에게서 손을 빼고 몸을 돌리려 했다. 릴리는 더 힘껏 그의 손을 쥐고 달아나지 못하게 당기며 애원했다.

“끝까지 들어야 해요, 칼.”

“릴리.”

제발 내게, 내게 미련을 주지 마. 내게 희망을 주면 안 돼. 제발.

“난 당신이 나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카르낙이 완전히 저를 떨쳐 내고 달아나기 전에 릴리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주 잠시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바람마저 멎은 듯한 찰나의 정적이 카르낙을 감쌌고, 릴리 역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곁에 더 있고 싶어요. 이젠 머리로 당신을 대하는 것에 지쳤어요. 완벽한 척, 도덕적인 척, 올바른 척하는 것에도 지쳤어요. 이젠 정말이지, 칼… 당신을 가슴으로 보고 싶어요. 감각으로, 심장으로, 느끼는 대로 당신을 알고 싶어요.”

“…….”

“그냥 다 잊을래요. 내 목적 같은 것, 내가 속죄해야 하는 원죄 같은 것. 그냥 칼…. 난 여기서 그냥 나로 살고 싶어요. 당신이랑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맡긴 채 그냥… 여기서요.”

“…….”

릴리는 애가 탔다. 자신의 진심이 전해졌을까. 얼마나 더, 무슨 말을 해야 그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녀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었다. 겁이 날 때도 있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어 답답하면서도 가슴속으로 삼켜야 했던 것들도 더러는 있었다. 그것이 치부가 될까 감추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래야만 좋은 아내가 될 것 같았다.

참고 인내하며 숨기고 감추어야 한다. 그리고 늘 강인해야, 언제나 흔들리지 않아야, 이 폭풍 같은 사내를 견딜 수 있노라, 그를 다스릴 수 있노라, 그를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노라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러나 이젠 그러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칼….

“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어떤 식으로든. 내가 당신을 떠나는 것도, 당신이 나를 떠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내게서 달아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예전처럼… 그냥… 날 욕심내면 안 되나요?”

“…….”

“내가 당신에게 확신을 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난… 남고 싶어요. 당신 옆에서 알아 가고 싶어요. 아주 많은 것들을. 나에 대한 것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요. 그러니까, 칼. 내게 화를 내고 조바심 내고 안달하면 안 될까요?”

“……”

“그냥 예전처럼요. 내가 달아나려고 해도… 날 붙잡으면 안 돼요?”

지나친 욕심인지도 모른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 당신이 내게 안달하던 그 모습 그대로를 원하는 것은. 하지만 모르겠다.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있었던 아주 깊고 돌이킬 수 없었던 일들.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노라 절망했던 일들. 그 모든 것을 지워 버릴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죽음의 목전에서 그를 애타게 찾던 때로부터 포드 부인을 구하겠노라 저에게서 등을 돌려 떠나갈 때까지. 릴리는 매 순간마다 그가 저에게서 물러서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또한 인정할 수 없었다. 매분, 매초 그가 자신에게서 영영 달아날까 두렵고 무서워 참을 수가 없었다.

“난 당신이 예전처럼 날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것 말고는 바라는 것이 없다. 원하는 것은 오직 그거 하나다. 지금 그녀는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것을 가질 수만 있다면.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지나온 과오들, 고통들, 실수들…. 알아요. 우린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죠. 하지만… 하지만 난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

“나는, 나는 이렇게 끝낼 수가 없어요. 칼. 그러니… 그러니까 그냥 다시 날 사랑해 줄 수 없을까요?”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카르낙은 여전히 굳은 채 말했다. 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

“단 한 순간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 없어.”

“그렇다면 왜 이토록 날 피하려는 거예요?”

“…릴리.”

“왜 나를 그라타로 보내려는 건가요? 난 가고 싶지 않아요. 여기서 해결해 보고 싶어요.”

이해하기 어려워, 릴리. 너를 이해하기가. 네가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 건지. 가슴이 너무 뛰고 눈앞이 흐려져서 숨이 막혀. 숨이 막혀서 무서워.

“대체….”

대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난 인내하지 않는 카르낙 발투만을 원해요. 투로인 그를요. 거칠 것 없고 상스럽고 전혀 엘버그인답지 않은 그를요.”

“…….”

“당신이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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