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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56화 (156/231)

156화

아무리 궁리를 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요?”

카르낙은 얼굴을 물 밖으로 내밀고 말했다.

“아니.”

그의 움직임은 물결도 일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그들은 어디서 도망친 탈영병들이었을까요?”

릴리가 멍하니 다른 곳에 시선을 주다가 물었다. 그녀는 아까 전의 이야기를 곱씹고 있는 것 같았다. 매짐은 카르낙이 그들을 어떤 식으로 차근차근 죽였는지 또 사내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을 하며 죽어갔는지 마치 자랑거리라도 되는 듯 세세하게 털어놓았다.

전형적인 영웅담의 서사를 갖춘 이야기는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고도 남을 만큼 훌륭했다. 아마 앞으로 매짐은 아주 오랫동안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신나게 자신의 활약상까지 집어넣어 가족에게 모험담을 들려주는 동안 카르낙은 조용히 맥주잔만 매만지고 있었다. 릴리는 그만이 아는 이야기가 더 많을 것이라 짐작했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포드 가족의 앞에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내밀하고 더 가치 있는 이야기들이 분명 숨어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카르낙은 쉽사리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에게는 늘 다가갈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더 심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예전에는 ‘그’라는 커다란 집에 굳게 잠긴 방이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그’라는 집 자체에 발도 들일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두드려도 그는 절대 자신의 내부에 들여보내려 하지 않는 듯했다.

멀루아를 떠나온 후부터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가 유산을 하고 난 뒤부터. 릴리는 카르낙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더는 자신에게 손도 대지 않으려 하는 점만 보아도 그랬다. 부부는 고사하고 다정한 친우로서의 상냥한 접촉조차 둘 사이에는 전무했다.

큰 고비를 넘겼고 여전히 위태롭고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지만 그렇다하여 이렇게까지 서로를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 걸까, 릴리는 좀처럼 이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카르낙의 달라진 태도를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리 깊은 숲속 마을이라지만 폐하의 용안을 몰라봤다니…. 분명 이 근방의 군인들은 아니었을 거예요.”

아무리 머리카락을 자르고 행색이 남루해졌다 하여도 그가 왕에 즉위하고 꽤나 오랫동안 각 지방의 성벽마다 새 왕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더랬다. 게다가 카르낙은 특이한 눈동자 색을 가졌고 보기 드물게 잘생긴 사내이니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그 외모를 잊기 힘들었다. 거기에 칼을 휘두르는 것까지 목격했다면 더욱 그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각 지역마다 억양과 쓰는 단어가 조금 다르다고 들었어요. 혹시 그들이 사투리를 쓰던가요?”

릴리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호기심이 왕성한 여자였다. 카르낙도 그 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질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원기를 회복하고 생기가 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카르낙은 그녀가 던지는 집요한 질문들을 좋아했다.

지금도 그랬다. 릴리의 계속되는 질문은 그를 안도하게 하였다.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릴리는 이제 정말로 먼 길을 떠나도 될 정도로 건강해져 버렸다.

“별로….”

카르낙은 고개를 저으며 뒷말을 흐렸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뜻임은 누구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릴리는 답을 듣기를 단념하고 천 하나를 집어 들어 물에 적시며 말했다.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줄게요.”

“…….”

사실 카르낙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서로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몸도 마음도 편했다. 그 이상 다가가면 그녀의 영역을 침범하는 기분이 들었다. 침범해서는 안 될 곳에 발을 들인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벌써 여러 번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것마저 거부하면 그녀가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한다 오해할까 걱정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대충 말을 지어내서라도 한 두 마디는 답을 할 것을.

하는 수 없었다. 카르낙은 얌전히 그녀의 앞에 다가갔다. 손을 뻗으면 뺨을 만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였다.

흠, 하고 릴리는 마뜩잖은 소리를 냈다. 카르낙의 태도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조금 심통이 났다. 대체 어디까지 선을 그려는 생각인걸까. 이런다고 해서 얻는 게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릴리는 신발을 벗고 치맛자락을 무릎 위까지 걷어냈다. 카르낙은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를 처다만 보았는데 그녀는 자세를 바꾸어 자리에 앉았다. 새하얀 종아리가 무릎까지 물에 잠겼다. 치맛자락이 아슬아슬하게 수면 위에 닿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릴리, 옷이 젖겠어.”

릴리는 치마를 허벅지 위까지 걷어 올리고 돌돌 뭉쳤다. 카르낙이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이젠 릴리의 새하얀 허벅지까지 감상하게 생겼다.

“이제 됐죠?”

“…….”

심기가 몹시도 불편해졌건만 릴리는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로지 카르낙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주겠다는 일념 하나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 때문에 치맛자락을 이렇게 걷어 올리는 것 따위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걸까.

사람에게는 아니, 남자에게는 일종의 영역 같은 것이 있다. 가능하면 그 안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안전했다. 사내는 모두 늑대라거나, 여성의 행실을 탓하며 남자의 잘못을 전가하는 짓은 천박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자꾸만 그녀를 탓하고 싶어졌다.

이것 봐. 나는 물에 있고, 너는 땅 위에 있고. 그렇게 애써 내가 쳐 놓은 경계선을 너는 아무 생각도 없이 이렇게 쉽게 넘잖아. 너는 그저 네 목적을 위해 물에 두 발을 담근 것뿐이지만 이게 나에겐… 나에겐 너무… 너무 과하단 말이야.

대체 왜 나에게 선을 긋지 않는가. 왜 날 경계하지 않지? 우리 사이는 달라졌다. 멀루아에서 떠나오며, 네가 아이를 잃으며 분명 우리 사이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러니 너도 변해야지, 파니릴리. 너도 더는 예전처럼, 꼭, 내게 다시 가까워지려는 것처럼 이렇게 굴어선 안 되잖아.

“굳이….”

카르낙은 릴리의 손길이 제 뺨에 닫기 전에 입을 열었다. 그 덕에 릴리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하였다. 새벽빛에 비치는 그녀의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투명했다. 순수하고 맑고 깨끗하고 또 한편으로는 연약하고 서글퍼 보여서 품에 있는 힘껏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사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그녀를 마주하면 늘 품에 힘껏 안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그는 마음이 놓였다. 초조하던 기분이 느슨해지고 불안하던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랬다. 사실 모든 행동은 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연약하고 서글퍼 보인다는 것 역시 그가 느끼는 것일 뿐 파니릴리는 한 번도 서글프고 연약해 보인 적이 없었다. 그것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마음대로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하여 좋은 남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긴 거울이 없잖아요.”

릴리가 그에게 미리 답했다. 굳이 이럴 필요 없다고 할 것이 뻔한 탓이었다.

“당신이 피를 묻힌 모습은 정말 많이 봤어요.”

“…….”

“그런데….”

릴리가 조심스럽게 젖은 천으로 카르낙의 뺨을 문질렀다.

“그런데 내가 챙겨 닦아 준 적은 없던 것 같아요.”

“…….”

“이상한 일이죠? 전장이나 전투에서 무사히 돌아온 남편을 기꺼이 보필해야 할 아내가 한 번도 남편의 피를 닦아 본 적이 없다는 거요.”

한 번도 그럴 상황이 없었지. 늘 치열하게 칼을 휘두르고 적의 목을 베었지만 그때마다 릴리가 함께했다. 다시 돌아온 후로 어떤 싸움이든 그녀를 뒤에 두고 떠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늘 혈투의 중심에는 릴리가 있었다. 그라타에서 푸른 숲에 둘러싸여 아름답고 귀한 것들만 보고 듣고 누려왔던 그녀는 스스로를 추스르고 위로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곳이 얼마나 버거웠을지 굳이 헤아려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난 바랐던 적 없어.”

그래서 카르낙은 한 번도 그녀가 지친 자신을 따스하게 맞이하고 안아 주길 바란 적이 없었다. 그저 그녀만 온건하다면, 그녀의 몸이나 마음이나 다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그러니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욕심일 뿐이었다. 바라서는 안 될 욕심.

“난 폐하께… 좋은 아내였을까요?”

“…….”

무슨 이야길 하는 거야, 파니릴리.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걸 왜 묻는 거야? 어째서 그것을 묻는 거지?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이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이다.

“당연하잖아.”

너무나 당연하잖아. 네가 어떻게 내게 좋지 않을 수가 있어? 네가 어떻게 내게 나쁠 수가 있지?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한 번도 내게 좋은 아내가 아니었던 적 없어. 넌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축복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릴리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서글퍼보였다. 그 표정을 본 카르낙은 혼란스러웠다. 또, 나는 또 너에게 신기루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또 너를 놓치기 싫어서, 너를 안고 싶어서, 곁에 두고 싶어서 또 너를 가엽다, 슬퍼 보인다, 아파 보인다 여기고 싶은 걸까.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실은 그 미소가 네가 가진 의미의 전부임에도 또 다시 미몽을 꾸려한다.

“릴리.”

카르낙이 그녀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손은 힘없이 그의 뺨에서 떨어졌다. 애처로운 몸짓이었다. 그래서 더 카르낙의 손아귀에는 힘이 들어갔다. 그는 힘껏 릴리의 손을 쥐고 아주 분명하게 진심을 담아 한 문장 한 문장 또박 또박 내뱉었다.

“네 물음에 답하지 않는 건… 너를 더 이상…”

“…….”

“너를 더 이상 내 일에 끌어 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왜냐하면… 릴리…”

“…….”

그는 파리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시선을 다잡고 제 목울대를 움직여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왜냐하면 너는 이제 곧 그라타로 돌아가야 하잖아.”

너는 다시 꿈 꿀 수 있다. 너는 다시 평화롭고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네가 이곳을 떠나기만 한다면 너는 다시 네가 원하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 네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네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라타에서의 삶이다.

“앞으로의 네 삶은 그곳에 있어.”

“…….”

“그러니 고맙지만 더는 내게 마음 쓰지 않아도 돼.”

“…….”

“더는 날 돌보려 하지 않아도 돼. 내 짐을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아도 돼.”

“…….”

“난 괜찮아. 릴리.”

“…….”

“난 이제 정말로 괜찮아.”

“…….”

단단한 표정만큼 단단한 목소리였다. 확신에 찬 눈빛만큼 그것을 뱉어 낸 입술도 강인해 보였다. 그것을 보는데 릴리는 마음이 아팠다. 누가 칼로 제 배를 찌른 듯 날카롭게 아팠다. 그래. 꼭 찢어지는 것 같았다.

꼭 잡았던 것이 품에서 달아나는 것처럼, 아무리 손을 뻗어도 도저히 닿지도 잡을 수도 없는 것처럼.

누가 그 새장의 문을 열었을까. 누가 그것을 안에서 끄집어내어 날아가라 재촉했을까. 아직 원하지 않는다. 아직, 보낼 준비도. 날아갈 준비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되지 않았다.

“난… 가지 않을래요.’

그러니까 아직 당신도 날 보내지 말아요. 아직 날 놓지 말아요.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는 듯 그 새장의 문을 열지 마세요. 아직 내 하늘은 충분히 넓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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