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마을 사내 둘을 죽인 것을 보았어요. 용병인지, 탈주병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을에서 쉽게 물러서진 않을 겁니다.”
“…….”
길란은 고개를 들어 카르낙을 보았다. 카르낙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포드 부인을 구해 올게요. 다만 여차하면 이 마을을 떠날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무장한 사내가 여럿이야. 자칫 자네까지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네. 살기 위해 내 집에 뛰어든 자를 사지로 몰아넣을 순 없어.”
“저와 제 처를 찾으러 다니는 자들일 수도 있어요.”
“…자네가 예사 사람이 아니란 것은 진즉 눈치채고 있었어. 늙고 노쇠하였다 해도 그만한 눈치는 있어. 그러니 더 지체하지 말고 떠나라는 거야. 그런 연유라면 더욱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어.”
“제 아내는 어떻게든 부인께 은혜를 갚겠다 했지요.”
카르낙의 어투에는 여전히 고저가 없었다. 또한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다. 말 한마디 않고 주어진 일을 우직하게 해내던 일꾼 이스바의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달랐다. 그는 전혀 다른 사내였다.
“제가 대신해서 그 값을 치를 겁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난 평생 누군가의 원망을 들으며 살고 싶지 않아.”
“그저 빚을 갚는 것뿐입니다. 어르신.”
뒷일은 알 수 없다. 운이 나빠 제 운명이 여기서 끝이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후회나 자책 따위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늘 두 손에 쥔 것 중 하나를 택한 후 그는 나머지 하나는 파괴했다. 두려웠던 탓이다. 훗날 이것이 아니라 그것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이 남아 저를 괴롭힐까 내내 그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외면하고 기피하며, 파괴하고 형체 없이 부숴 버렸다. 되돌아갈 수 없게 하여 스스로를 맹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길이 있다 한들, 혹은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다 한들 거기에 미련을 두진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결정을 내리고 난 후에는 전에 없이 모든 것이 선명하고 말끔하였다.
아무런 두려움도 생기지 않았다. 어쩌면 이 여정의 끝이 결국은 파니릴리를 잃고 마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녀를 배웅하며 느껴야 할 고통과 기쁨 대신 그녀를 대신해 제 목숨을 내놓는 편이 더 편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젠 내가 자네를 의지해야 할 처지로구만.”
노인의 말에 카르낙은 설핏 웃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자신과 아내를 품어 주어 그동안 분에 넘칠 만큼 과한 보살핌을 받았다. 투로로서의 동질감인지, 아니면 그저 사람이 사람에게 지니는 선한 자비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베풀어 준 것은 카르낙이 그동안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을 무엇이라 정의 내려야 할지도 모를.
“일단 저를 매짐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세요. 놈들이 다시 이곳을 찾을지도 모르니까요. 기다렸다가 밤이 깊으면 일을 치르죠.”
“…알겠네.”
길란은 한발 물러섰다. 아내가 온전히 돌아오길 소망한다. 그 이후의 일은…. 그 이후의 일은 그때 다시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더 깊은 숲속에 들어가 비렁뱅이로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고 해도 아내를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카르낙은 두껍고 조악한 식탁에 기대었다. 그는 말했다.
“종이와 펜이 필요합니다.”
“구해 주겠네.”
매짐은 모자를 챙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바.”
길란은 카르낙의 허리춤을 주시했다. 카르낙도 그의 시선을 느꼈다.
“검을 줘 보게.”
카르낙은 조금 망설이다가 검집에서 칼을 뽑아 칼등이 그를 향하도록 하여 건네주었다. 길란은 힘겹게 칼을 들어 칼날을 부엌의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대장장이의 본능 같은 것이었다. 또한 그가 카르낙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 노인의 안광에 잘 벼린 칼날에는 붉고 푸른 빛이 어렸다.
“이 검은 누가 만들어 주었나?”
“…모릅니다.”
길란은 칼끝을 손으로 매만졌다. 굳은살이 박여 거친 손끝이 베일 듯 아슬아슬하였다.
“자네, 어떠한 불에도 녹지 않는 칼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아니요.”
“아주 오래전, 장인어른이 말씀해 주신 이야기라네. 어느 날 장인어른의 선대께 새하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아름다운 검을 한 자루 들고 이곳을 찾았지. 그자가 하는 말이, 누구도 이 칼을 다루지 못해 이 먼 곳까지 왔으니 이 검을 녹여 관을 만들어 주면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명예와 부를 하사하겠노라 했다더군. 어른은 사시사철, 1년 365일 철을 달구었으나 깨지지도, 녹지도, 균열이 나지도, 그을리지도 않았다네. 결국 선대께서는 그 칼을 가져가 귀하신 분께 되돌려 주며 이것은 감히 사람이 건드려선 안 되는 물건이라 경고했다 하시더군.”
“아마네스 여신의 검이었나 보죠.”
카르낙이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길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 말에 귀하신 분께서는 슬픈 얼굴로 눈물을 보이며 말씀하시길, 이것은 악에서 나와 악으로 쓰였으니 이것을 녹여 여신의 재단에 바치지 않으면 이 대륙에 끊임없는 재앙이 몰아닥치리라 하셨다지.”
“…….”
“그 검이 지닌 것은 붉은 것들을 부르는 칼날. 피와 화염과 불꽃과 정욕을 불러내는 물건이라고 말이야.”
“대를 이어 내려오는 전설인가 보군요.”
하여간 이 대륙에는 참으로 전설들이 많았다. 그놈의 시답지도 않은 전설들. 무슨 전설이 그렇게 많은지. 그것들이 전부 사실이었으면 지금 엘버그 왕국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진 않았으리라. 사람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사실이라 믿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안에 여기 이 투로, 길란 포드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길들이는 데 실패한 검은 에나의 손에 의해 불의 장벽 너머로 던져졌다네.”
흰소리다. 에나 따위. 불의 장벽은커녕 하게너의 영지 근처에도 온 일이 없다. 정말 그랬다면 왜 하게너 가문에 그 영광스러운 장면에 대한 흔적이 하나도 없었겠는가. 대대손손 그날을 기념하는 기념품이나 상징물, 혹은 그림이나 조각물 정도라도 있어야 했다.
“나는 때때로 그 검에 대해 상상하곤 했지. 그것이 어떤 모습일까 하고 말이야.”
길란은 칼등을 한 번 손으로 쓸고 그것을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훌륭한 검이야. 내가 본 중 가장 아름답고 단단하고 또한 견고해. 내 상상 속의 검처럼.”
“과한 칭찬이십니다.”
스코크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것을 한 번도 귀담아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길란도 같은 말을 하니 과연 그렇게 귀한 검인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혹여 이것이 불의 장벽 너머로 던져진 그 검인가 싶은 생각도 아주 잠시 들었다.
그러다가 ‘푸’ 하고 헛웃음을 키며 그것을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그럴 리가 있나. 그렇게 귀하고 대단한 검이라면 사막 한가운데에 고물처럼 나뒹굴고 있진 않았으리라. 모두 이 검의 처음 모습을 보았다면 감히 지금 같은 감상은 내놓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쳐다보지도 않았겠지.
길란은 카르낙을 매짐의 굴로 안내했다. 조악할 줄 알았던 굴속은 의외로 견고했다. 혹여나 큰일이 닥쳤을 때 장정 너덧 명이 잠시 피신하기에 안성맞춤일 정도였다. 최근까지 계속해서 개보수를 한 게 틀림이 없었다.
어두운 굴속, 촛불 하나에 의지해 사내 셋과 여인 하나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이후 한참 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을 깨트린 것은 릴리였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요?”
“길란이 책임지고 당신을 리오로 데려다줄 거야.”
리오의 길드장과 핀에게 보낼 편지는 미리 써 두었다. 어떻게든 배편을 마련해 파니릴리를 안전하게 그라타로 데려다주라는 마지막 왕명이 담겨 있었다.
“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과 약간의 노기마저 서려 있었다.
“난 당신이 잘못될 경우를 묻고 있는 거예요.”
릴리는 자신의 안전과 행방을 염려하여 묻는 것이 아니었다. 카르낙 발투만에게 자신이 겨우 그런 것이나 묻는 여인으로 보이는 걸까. 그런 것이 아니야. 자신의 안위 따위 엘버그에 온 이후 단 한 번도 염려해 본 적이 없다. 혼자 리오에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곳에 가면? 설사 살아서 모두를 만난다 치면? 그럼 그 이후엔? 그 이후에 카르낙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라타로 돌아가는 것? 그까짓, 그까짓 그라타로 돌아가 빈껍데기로 살아가는 것? 그래. 그랬다. 설령 그라타로 돌아간다 한들, 그것은 빈껍데기였다.
“마찬가지야. 길란이 당신을 리오로 보내 줄 거야.”
“그 말이… 그 말이 아니에요!”
파니릴리는 성을 냈다. 내가 묻는 건, 내가 묻고 싶은 건 만일 당신이 잘못되면, 그러면….
“당신이 잘못되었을 경우 어떻게 하면 당신을 구할 수 있을지를, 그걸 묻는 거예요!”
화가 났다. 초조하고 눈앞이 깜깜하고 덜컥 겁이 났다. 당신을 잃으면? 만약 내가 당신을 잃으면? 그럼? 그럼 그땐 어떻게 해? 상대는 열댓 명의 무리이고 당신은 혼자이고, 무장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누구도, 누구도 당신을 도울 수가 없는데.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잠깐의 방심으로 당신이 해를 입으면? 혹여나 다시 돌아오지 못하면? 당신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데 나 혼자, 혹시 나 혼자 살아남게 되면? 그럼 그땐 어떻게 해?
아아. 그래. 알겠어.
이제 알겠다. 그래.
이제야 알게 되었다. 카르낙 발투만이 없이는, 그가 없는 인생은….
빈껍데기일 뿐이란 것을.
갑자기 천지가 뒤바뀌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파니릴리. 그가 없는 인생을 살겠다고. 그라타로 돌아가겠다고. 그에게서 도망치려 부질없는 몸부림을 지금껏 쳤던가. 당장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막막한 주제에. 당장이라도 그를 잃으면 삶의 의미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그가 없는 인생을 꿈꿨는가. 지금껏 도래하지 않을 미래를 탈출구 삼아 현실의 고통을, 사랑에서 오는 고통을 망각했는가.
그를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노라, 단지 그를 가련하게 여길 뿐, 그에게 보탬이 되어 그저 이 긴 악연을 매듭짓고 싶을 뿐이라 스스로를 자위했는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랑 앞에 여지없이 무너져 버릴 나약하고 초라한 한 명의 여인일 뿐인 것을 그저 외면하고 싶었는가. 도덕, 평화, 정의, 자비와 인류애라는 거대한 껍데기를 둘러쓴 채 그저 허풍을 떨었을 뿐이다.
본래의 파니릴리는. 이 나약하고 어리석은 여인은 그저 한 남자가 세상의 전부인, 사랑에 눈먼 초라하기 그지없는 피조물일 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