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우린 언제 리오에 가나요?”
릴리가 웅덩이에서 나오며 물었다. 카르낙은 부러 그쪽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회피하며 제 콧등을 긁었다. 언뜻 본 하얀 나신은 조금 야위었으나 예전과 다름없이 날씬하고 탐스러웠다.
“네가 다 회복되면.”
“이미 충분히 회복된 거 같아요.”
대답하는 릴리의 목소리는 확신에 가까운 어투였다. 카르낙은 조금 뜸을 들였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리오까지 가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또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고. 그러니까 아주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해.”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순 없잖아요.”
“…….”
카르낙은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릴리의 말이 맞다. 그토록 오래 기다릴 순 없다. 모두가 살아있다면, 분명 그럴 테지만 진작 리오에 모여 목을 빼고 이제나저제나 카르낙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벌써 군인들을 풀어 저와 릴리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또 어느 쯤에서 테이먼 테르조의 암살자들과 맞닥뜨려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루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랬다. 리오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리오로 돌아가 여전히 왕의 굳건함과 강력함을 그리고 왕권을 거스르는 위협에 대한 무자비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을 인지했지만,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헛된 욕심이 자꾸만 그것을 가로막았다. 아주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이런 꿈같은 보통의 나날을 더 누리게 해 달라는 마음이었다. 복수도. 상처도, 분노도, 슬픔도 비치지 않는 이 평화와 흐르는 물처럼 고요한 일상들을 부디 그녀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욕심이었다.
그리하여 아주 먼 시간이 지난 후에도, 어쩌면 육신이 모두 도륙당해 이 땅에서 썩어간 후에도 눈을 감으면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의 편린들로 간직하도록 말이다.
“이스바! 이스바!!!”
막 릴리가 슈미즈를 입고 매무새를 다듬는데 멀리서 외침이 들렸다. 카르낙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가 손을 휘적거리는 모양새를 보았다. 릴리는 막 앞치마를 둘러매고 머리 위에 천 하나를 덮어썼다.
“매짐?”
릴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매짐의 실루엣을 알아차렸다. 달려오는 모양새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좋지 않은 예감에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카르낙의 소매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카르낙이 안심하라는 듯 맞은 편 손을 움직여 그녀의 손을 꼭 덮어 주었다.
매짐은 당도하기도 전에 고함부터 쳤다,
“구, 군인이! 군인이 왔어요!”
군인. 군인이라. 어느 쪽? 어느 쪽의 군인?
“깃발은 보았어?”
그는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다.
“못 봤어요! 그런 건 없었어요! 그들이, 그들이 분명, 분명 마을로, 마을로 향하는 걸….”
분명 보았다. 대장간에서 분명 무장을 한 자들이 마을의 초입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서둘러 두 사람을 찾아오라 했다. 찾아서 숲의 깊은 곳에 숨기라고.
“아저씨와 아주머니는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챙기실 거예요. 숲 속에 작은 굴이 있어요. 어렸을 때 취미로 파두었죠.”
낡은 곡괭이나, 못 쓰는 쟁기 같은 것을 모아다 잔뜩 쌓아 두고 자신만의 기지를 만들었다. 친구들은 저를 이상하게 여겼고 친구의 부모들은 핏줄을 들먹이며 저를 기피했었기에 몰래 파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처음엔 개구멍처럼 작았다가 나중엔 성인 너덧이 들어가도 너끈할 정도로 커졌다. 아버지가 너는 두더지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사람으로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니냐며 놀라 말을 잃을 정도였다.
겉으로는 끌끌, 혀를 차면서도 흙벽을 고정할 수 있는 튼튼한 나무 판과 기둥부터 작은 촛대, 낡고 녹슨 검, 방패 따위를 모르는 척 건네주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퍽이나 대견해하셨던 것도 같았다.
“이스바 경.”
매짐은 그 자리에 서서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 카르낙에게 독촉했다. 전혀 달아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서두르셔야 해요. 한 둘이 아니에요. 적어도 열댓 명이 넘어보였어요.”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데다가 지대가 높은 덕에 비교적 평화로웠지만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진 않았다.
아무리 깊은 숲속에 있는 마을이라 해도 몇 번 도적들의 약탈을 겪어 봤다. 대부분 초라하고 옹색한 차림에 손에는 도끼나 쇠망치 같은 것을 든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떼가 타고 더러운 옷과 망토를 두르고 있으나 절제된 몸짓에 빠르고 기민한 말을 타고 있었다. 그저 그런 도적떼가 아니었다. 모두 훈련받은 이들임이 분명했다.
“아내를 부탁해.”
카르낙이 몸을 돌리려는 것을 매짐이 붙잡았다.
“어쩌시려고요? 수가 너무 많아요. 게다가 모두 무장한 상태에요.”
카르낙은 릴리를 쳐다보았다. 우리 편일수도, 적일수도 혹은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확인해야 했다. 부디 핀이 보낸 자들이길 간절히 바라야했다. 릴리 역시 말하지 않아도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렇기에 소란 떨지 않고 의연히 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약하지 않아. 둘이 있을 때보다 그는 혼자 있을 때 더 강하다. 그것을 알고 있다.
“몸조심해요.”
그러니 남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카르낙은 매짐이 릴리를 데리고 걸음을 재촉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돌려 숲길을 헤치며 달렸다. 그는 자신이 검과 갑옷을 묻어 둔 지점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에도 깊은 새벽녘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검과 갑옷이 녹슬지 않게 손질해 두었을 뿐 아니라 때를 대비해 말린 과일과 고기, 식수 등을 가죽주머니에 넣어 곁에 함께 묻어 두었다. 포드가 무두질을 도울 수 있도록 해 준 탓에 절차는 더욱 손쉽고 순조로웠다.
자작나무 숲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서른 발자국, 커다란 바위로 부터 오른쪽으로 열 발자국을 더 뗀 곳. 그곳의 나뭇잎과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치우자 검의 손잡이가 보였다.
카르낙은 그것을 쥐고 몇 번이고 흔들어 뺐다. 우수수, 무너진 흙덩어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가죽으로 둘러놓은 흉갑은 빼고 그는 오른쪽 견갑만 착용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바위를 무너진 흙덩이 아래 밀어 넣고 곧바로 대장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포드의 대장간은 마을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그 덕에 사방을 살피기 좋았고 구태여 마을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하기 쉬웠다.
그는 커다란 바위 아래로 상체를 낮추고 마을의 초입을 살폈다. 칼부림이나 비명은 없었다. 몇몇 군인은 말에서 내린 채였고 매짐의 말대로 깃발은 없었다.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으나 행색은 초라했다. 오랫동안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한 말들은 고되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카르낙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용병이거나 혹은 무리에서 이탈한 탈주병. 허나 어느 쪽이라도 안심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일지라도 아군은 아니었다. 비록 그들이 나름의 예의를 갖추어 마을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 하더라도 여차하면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 수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주민들의 얼굴이 잿빛인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카르낙은 포드가의 대장간에 있으면서 한 번도 마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꺼렸고 길란도 구태여 그를 마을로 심부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종종 마을 사람들이 대장간에 방문하면 카르낙은 무두질을 핑계로 실내에 머물렀고 가끔은 길란이 그렇게 하도록 시키기도 했다.
그러니 마을이 돌아가는 사정 같은 건 몰랐다. 물론 알 필요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가능한 조용히 숨어 있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대장간을 떠나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카르낙은 군인들과 말을 섞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내용 역시 유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난한 대화 끝에 군인 중 하나가 칼을 뽑아들었을 때, 평화는 깨졌고 곧 피바람이 불 것이란 사실만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때서야 카르낙은 발견했다. 이미 그들의 발밑에 머리가 잘려나간 사내의 시신 하나가 나뒹굴고 있다는 것을.
달아나야 해. 저들이 볼일을 끝내고 이 마을을 떠날 때까지 포드 일가를 데리고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거나 이곳에서 가능한 멀어져야 한다. 카르낙은 마을이 아비규환으로 변하기 전에 서둘러 포드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화로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나 길란은 그곳에 없었다. 카르낙은 집으로 향했다. 문을 벌컥 열고 “길란!” 하고 부르자 백발의 노인이 굽은 허리를 한 채 텅 빈 주방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길란.”
“…아내를 데려갔어.”
“언제요?”
“…방금 전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뒷길로 돌아온 카르낙이 포드 부인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빌어먹을. 카르낙은 혼자 욕을 짓씹었다.
“치료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마을에는 치료사가 있다고 했었다. 포드 부인은 사내들이 아니라 부인들을 주로 돌보는 산파였다. 아마도 머리가 잘려나간 사내는 치료사였으리라. 그렇기에 포드 부인이 필요해진 것이다. 치료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무리 중 부상당한 자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고.
포드 부인이 부상자를 치료해 주면 그들은 순순히 그녀를 풀어 주고 마을을 떠날까. 이미 사내 둘에게 칼을 휘두른 자들이?
아니. 아닐 거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마을에서 취할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취한 후에 떠나갈 것이다. 그동안 이 마을은 피와 공포에 절여져 있겠지. 대장장이인 길란은 무사할까. 말의 발굽과 무기들을 손보려 들 것이고 짐승의 가죽들을 포함하여 대장간의 쓸 만한 것들은 모두 갈취해 가려 들 것이다.
틀렸어. 너무 늦었어. 아내가 잡혀 갔으니 길란은 도망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매짐 역시 마찬가지다. 이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골치 아픈 일을 피하려면 릴리만을 데리고 달아나야 한다. 그러면 자신은 아무것도 잃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 된다.
그러니까 가려면 지금 가야 해, 카르낙 발투만. 아무리 깊은 숲속에 있어 문명과 동떨어진 채 살아왔다 하여도 그들 역시 엘버그 대륙의 후손들.
그들 몇 죽어 나자빠지는 것이 하루 이틀인가. 소중한 사람만 지키면 된다. 지금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된다. 릴리를 데리고 그동안 준비해 두었던 짐을 찾아 이곳을 떠나면 된다. 그러면 잃을 것도, 달라질 것도, 골치 아파질 것도 없다.
그러니 정신 차려. 이건 너와 아무 상관이 없어. 그들에게 신세를 졌다하여 위험을 담보로 그들을 도울 필요는 없어. 그저 돈이 될 만한 것, 쓰지 않는 판금 흉갑 따위 하나를 던져 주고 가면 그뿐이다. 그 정도. 너에게 그들은 그 정도의 가치일 뿐이다.